소설리스트

81. 세상을 구하는 귀여움 (81/183)

81. 세상을 구하는 귀여움2022.02.05.

정오와 지헌이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진동이 울렸다. 지헌의 휴대폰 진동이었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지헌이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기에 정오가 물었다.

16551157199083.jpg“누구 전환데 그래?”

16551157199089.jpg“어머니.”

16551157199083.jpg“받아봐. ……내가 자리 비켜줄까? 그냥 나 혼자 갈까?”

16551157199089.jpg“아니야. 괜찮아.”

정오가 조금 멀어지자 지헌은 금세 정오의 팔을 잡아당겨 제 옆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하라는 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16551157199145.jpg[얘. 지헌아.]

지헌이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기도 전에, 장영미 여사의 목소리가 따끔하게 울렸다.

16551157199089.jpg“네. 어머니.”

16551157199145.jpg[집에 좀 와. 엄마랑 얘기 좀 하자.]

16551157199089.jpg“무슨 얘기요?”

16551157199145.jpg[무슨 얘기긴. 너도 할 얘기 많을 거 아니야.]

영미는 다급한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은 목소리였다.

16551157199145.jpg[아까 은엽이가 집에 왔었어.]

16551157199089.jpg“어머니, 채은엽은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16551157199145.jpg[그 애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엄마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은엽이가 거짓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16551157199089.jpg“…….”

16551157199145.jpg[착하고 말도 잘 듣던 네가 갑자기 은비랑 헤어지고 엄마 말도 안 듣고 엄마를 무시하고 그러는데 어떻게 네 말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겠니. 그 이예나란 애가 네 딸이 아니면 넌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야말로 바보 되는 거야. 호구 되는 거고. 그뿐이니?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텐데…….]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오자 지헌은 재빨리 통화 볼륨을 낮추었다.

16551157199145.jpg[검사를 먼저 하자. 피검사를 해. 피검사 결과 친자라고 나오면 그때 다시 얘기해. 지금은 그런 애랑 어울리는 거, 엄마는 반대야.]

유쾌한 전화는 아니었다. 그나마 금방 끊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헌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정오가 눈치 빠르게 용건을 파악했다.

16551157199083.jpg“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시는구나.”

16551157199089.jpg“……친자검사를 빨리하길 원하시네. 피검사로.”

16551157199083.jpg“나야 협조할 수 있는데 예나가 걱정이지.”

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아빠를 미워하는 딸인데, 점수를 더 잃을까 걱정이 되었다.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지헌이 결단력 있게 말했다.

16551157199089.jpg“친자 검사는 나중에 하자. 예나가 날 받아들이게 되면.”

16551157199083.jpg“어머니께서 계속 뭐라고 하실 텐데 어떻게 견디려고?”

16551157199089.jpg“괜찮아. 그건 방법이 있어.”

지헌은 정오가 걱정하지 않도록 든든히 대답했다. 차는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금방 정오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오가 안전벨트를 푸는 동안 지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1157199089.jpg“나 들어가도 돼?”

16551157199083.jpg“그럼. 당연히 들어와야지. 빨리 내려.”

정오의 대답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생각지도 못한 용돈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정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것 하나에 새삼 감동하는 그가 자꾸 귀엽게 여겨졌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알면 그는 미소를 거둘 테지만. 지헌 덕분에 정오 또한 일상이 소중해졌다. 아이의 자는 모습, 아이의 지나치는 말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주님이지만 가끔 정오도 현실에 치여 아이를 소홀히 여길 때가 더러 있었다. 집에 싸들고 온 회사 일에 빠져 있다가 예나가 ‘엄마’를 열 번쯤 부르고 나서야 대답한 적도 있었고 대강 놀아준 적도 많았다.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칭얼거리면 조용히 하라고 타박을 준 적도 있었다. 자신이 쉽고 편하게 넘긴 일들이 지금의 지헌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상일지. 그 생각에 정오도 반성하게 되었다. 앞으로 아이에게 조금 더 다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오가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달려왔다.

1655115725697.jpg“엄마아!”

16551157199083.jpg“예나 공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녀 상봉. 정오가 예나를 꼭 안고서 거실 가운데로 걸어오며 물었다.

16551157199083.jpg“우리 예나, 엄마 보고 싶어서 군산 갔다가 바로 온 거야?”

1655115725697.jpg“응. 엄마랑 같이 자려고.”

16551157199083.jpg“그래도 할머니 피곤하실 텐데.”

1655115725697.jpg“예나도 피곤했어. 그래도 온 거야.”

모녀의 대화만 길게 이어지자,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던 국순이 나와 물었다.

16551157256993.jpg“이예나, 아빠한텐 인사 안 해?”

1655115725697.jpg“……안녕하세요.”

아빠란 호칭은 쏙 빼고 인사한 예나가 정오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1655115725697.jpg“엄마, 왜 오늘도 같이 왔어?”

16551157199083.jpg“아빠가 예나 보고 싶다고 해서.”

정오도 예나에게 속삭여주었다.

1655115725697.jpg“어제도 봤는데 왜?”

16551157199083.jpg“예나도 엄마랑 어제도 같이 잤는데 오늘도 같이 자려고 군산에서 돌아왔잖아. 똑같은 거야. 아빠도 예나를 매일매일 보고 싶거든.”

흥. 정오의 다정한 설득에도 예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매일매일 보고 싶다면 왜 예전에는 오지 않았느냐고, 또 한 번 따지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저씨와 얽히면 엄마가 자신을 미워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고집으로 정오의 옆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는 예나에게, 지헌이 말을 걸었다.

16551157199089.jpg“예나야, 아빠랑 바둑 둘까?”

하지만 역시나 예나는 뚱하게 거절했다.

1655115725697.jpg“싫은데요.”

흥. 내가 맨날 바둑만 두는 줄 아나.

1655115725697.jpg“엄마랑 실뜨기할 건데요. 엄마, 나랑 실뜨기하자.”

16551157199083.jpg“어어, 그래.”

돌연 실뜨기 상대로 낙점된 정오가 지헌의 눈치를 보다가 뜨개실을 가져왔다. 실뜨기는 번갈아가면서 하는 것이니 자신이 실을 떠서 지헌에게 건네면 자연스럽게 세 명이서 하게 될 것이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지헌이 실뜨기를 할 줄 모른다는 것. 정오의 손에서 예나의 손을 거쳐 다시 돌아온 실을 정오가 지헌에게 쑥 내밀었다. 지헌의 눈동자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예나가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1655115725697.jpg“아저씨 실뜨기할 줄 몰라요?”

16551157199083.jpg“예나야, 아빠라고 불러야지.”

정오의 지적에 예나는 더욱 고집스럽게 입술을 꽉 맞붙였다.

16551157199083.jpg“우리 예나는 친구들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잘 도와주고, 친구들이 모르는 게 있으면 잘 가르쳐주고 그러는 친절한 친구인데, 아빠한테도 친절하게 실뜨기 가르쳐주면 어떨까?”

정오가 예나에게 실을 넘겨주며 다정하게 구슬렀다. 한참 가만히 있던 예나가 마지못해 뜨개실을 지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양손이 모두 뜨개실에 붙잡혀 있는 처지라 발가락을 사용해야 했다.

1655115725697.jpg“여기에 손가락 하나를 넣고요, 여기에 또 손가락을 넣고요. 여기랑 여기에도 하나씩 넣고서 쭉 당기면 돼요.”

16551157199089.jpg“여기? 여기?”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예나의 발가락을 따라 지헌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고작 실뜨기를 하면서 과학 실험이라도 하는 듯 심각한 두 사람을 보니 정오와 국순은 웃음이 나서 겨우겨우 참아냈다. 지헌은 예나의 지침을 받들어 뜨개실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걸쳤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에 야무지게 걸려 있던 실이 지헌의 손으로 넘어왔다. 예나가 손을 빼며 말했다.

1655115725697.jpg“지금이야, 쭈욱 당겨!”

예나의 철저한 조언에 지헌은 우직하게 실을 당겼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한 나머지 뜨개실은 길게 풀리고 말았다. 예나는 울상이 되었고 지헌은 무안해졌다.

1655115725697.jpg“으아아아 망했어! 아저씨 때문에 다 망했어!”

16551157199083.jpg“예나야, 아빠라고 불러야지.”

정오가 득달같이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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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중한 밤이 종이 한 장 넘기듯 훌쩍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지헌은 단정하게 슈트를 갖춰 입고 본사를 찾았다. 아버지께 용건이 있었다. 세련그룹의 총수 정재광 회장. 1년 365일 중 380일 일을 한다는, 하루를 25시간으로 쓰는 철저한 남자.

16551157199089.jpg“아버지, 저 왔습니다.”

16551157314218.jpg“그래.”

16551157199089.jpg“일요일인데 여기 계시네요.”

16551157314218.jpg“보고받을 게 많아.”

임원 보고 때 잠깐 얼굴을 본 것 빼고, 개인적으로 만난 건 거의 두 달 만이었지만 부자의 대화는 정 없이 뚱하기만 했다.

16551157314218.jpg“너도 이 자리에 앉게 되면 내 심정을 알게 될 거야. 수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자리다. 그 직원뿐만 아니라 그 직원의 가족까지도 우리 가족이 되는 거야. 그러니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일에 대한 이야기와 뒤따라오는 조언엔 아버지의 인생 철학이 묻어났다. 일에 있어서는 그토록 완벽하지만 결코 가정적인 분은 아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철저한 책임감이 어머니를 더욱 외롭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신에게 더 집착했을 것이다. 무심한 아버지. 무심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께 모든 걸 털어놓아도 될지, 사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모든 외압을 막아줄 수 있는 방패가 되어줄지, 아니면 어머니와 같은 편에 서서 그를 압박할지. 갈등이 커질까 싶어 두렵지만, 그래도 부딪혀 볼 것이다.

16551157199089.jpg“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6551157314218.jpg“그래. 그러니 왔겠지. 말해봐.”

지헌은 용기를 내어 운을 떼었다.

16551157199089.jpg“아버지, 혹시 손녀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 뜬금없는 질문에 재광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16551157314218.jpg“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었냐?”

재광은 당연하지만 지루한 주제라는 듯 거칠게 한숨을 쉬고는 쉽게 대답했다.

16551157314218.jpg“그래. 결혼 좀 해. 내가 오래전에는 네 형이 먼저 장가들고 나서 널 보내려고 했지만, 이젠 그런 거 없다. 마음먹었으면 바로 해. 손녀든 손자든 많이많이 낳고.”

16551157199089.jpg“아니, 그런 게 아니라.”

16551157314218.jpg“…….”

16551157199089.jpg“사실은 이미 아이가 있어요. 일곱 살.”

귀찮은 일을 해치우려는 듯 손을 휘저었던 재광이 고개를 번쩍 들어 지헌을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지헌을 빤히 바라보던 재광은 소파 자리를 권하며 자신 또한 그 맞은편에 앉았다.

16551157314218.jpg“앉아.”

혼외자식. 아들이 혼외자식을 만들었다. 아직 미혼이니 그나마 다행이다만 그 아이가 일곱 살이나 되었다는 건 상당히 문제가 될 터였다.

16551157314218.jpg“아이 이름이 뭐야.”

16551157199089.jpg“이예나예요.”

16551157314218.jpg“이 씨라고?”

16551157199089.jpg“저는 몰랐으니까요.”

16551157314218.jpg“…….”

16551157199089.jpg“기억을 다 잃는 바람에 모든 걸 놓쳐버렸죠.”

재광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16551157314218.jpg“얘기해라. 빼놓지 말고 다 얘기해.”

지헌은 그간 있었던 일을 재광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정오를 만났고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자신의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증으로 정오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까지. 재광은 지헌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땀에 젖었던 양손을 천천히 문질러댔다. 제 아들이 이런 사연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16551157314218.jpg“손녀딸. 손녀딸이라…….”

충격과 설렘, 호기심과 안타까움. 일에 집중하여 사는 동안 잊고 살았던 갖가지 감정이 다들 제가 제일이라며 속에서 날뛰어대는 것 같았다. 그런 흥분한 가슴에, 아들녀석이 더욱 불을 지폈다.

16551157199089.jpg“아버지. 딸이 위대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딸이죠. 게다가…….”

16551157314218.jpg“…….”

16551157199089.jpg“엄청 똑똑해요.”

똑똑해?

16551157199089.jpg“그리고 엄청 예쁩니다.”

그리고 예뻐? 엄청?

16551157199089.jpg“엄청 귀여워요.”

귀엽기까지?

16551157199089.jpg“세상을 구하는 귀여움이에요.”

아버지를 반드시 설득하고 말겠다는 사명을 갖고 찾아온 지헌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화룡점정이 될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정오에게서 전달받은 사진이었다. 이번 일곱 살 생일날 아침에 찍은 예나 공주의 어여쁜 모습이 담긴 사진. 재광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정씨 집안, 3대 만에 나타난 귀한 여자아이. 그 귀한 손녀딸을 사진으로 먼저 영접한 소감은……. 이럴 수가. 재광은 저도 모르게 심장께에 지그시 손을 올렸다. 심장이 아파서. 정말로 세상을 구하는 귀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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