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방해하지 마2022.02.09.
“이마에 연어반이 있어요. 저 어렸을 때처럼.”
이마에 연어반?
“일곱살 짜리가 벌써 바둑을 둘 줄 알고요.”
바둑까지 둔다고? 지헌의 이야기에 재광은 새삼 설렜다. 재광은 한참 동안 사진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속눈썹 개수까지 세어볼 듯이 뚫어져라 살펴 보았다. 아이는 심장이 뻐근해질 만큼 몹시 귀여웠다. 몹시 귀엽긴 한데…….
‘이런 귀여운 아이가 지헌이의 딸이라고?’
재광의 눈동자가 사진 속 아이와 지헌의 얼굴을 거듭 오갔다. 사진 속 아이와 아들 녀석을 유심히 비교하며 더 골몰하게 되었다. 내가 저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핏줄이라고 하니 닮아 보이긴 한다만, 하나는 몹시 귀엽고 하나는 조금도 귀엽지 않으니 솔직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엄마를 닮은 건가…….’
재광은 간신히 사진을 내려놓고는 흠흠, 헛기침했다.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선은 아버지로서 이성적인 면모를 보여야 한다.
“네 아이가 맞아? 그건 확실해?”
“네. 맞아요. 아주 일부지만 분명히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진짜 기억이 아닐 수도 있잖아. 7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
“일단은 친자검사를 해야 해.”
“그게,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
“아이가 아직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왜.”
“아이는 7년 동안 아빠 없이 지냈으니까요.”
멀뚱히 바라보던 재광이 한참 뒤에, 지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겠구나. 7년 만에 나타난 아빠를 곧장 받아들이긴 힘들겠지.”
하지만 위엄 있게 원칙을 강조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네. 조만간 할 겁니다. 다만 아이와 어느 정도는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리는 거고요.”
좀 전에 지헌은 재광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지만 되도록 영미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정오와 자신이 헤어지게 된 이유 또한 교통사고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연락이 닿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다고. 현재의 지헌이 어머니를 몹시 원망하고 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머니를 헐뜯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역효과를 줄 수도 있다. 자칫하다가 아버지 또한 자신의 이야기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최대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이 현재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사실만 말해야 했다.
“사실 어머니께서 몰래 친자검사를 하셨어요.”
“그럼 네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네.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신지는 여쭤보지 못했지만 따로 조사를 하신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받아보신 결과지엔 친자일 가능성이 없다고 나왔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머니께서 아이의 머리카락으로 몰래 검사를 하셨는데, 중간에 머리카락이 바뀐 것 같아요. 최 기사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검체물을 가지고 유전자연구소로 갔는데 도중에 채은엽을 만났다고 하네요.”
“채은엽은 네 친구 아니냐.”
“채은비의 오빠이기도 하죠. 저랑 채은비를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친구고요.”
놀라운 사실이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재광은 골똘히 생각하며 턱을 매만졌다.
“아이가 제 친자라는 게 밝혀지면, 채은비와 저를 결혼시키겠단 꿈에서 더 멀어질 테니 그런 일을 꾸몄겠죠.”
“그렇다는 건, 너랑 채은비랑은 여태 정리가 덜 되었다는 거냐?”
“오래전에 정리했습니다. 채은비와 채은엽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
“어머니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 같고요.”
지헌은 조심스럽게 다시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제게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일단 친자검사를 하고 친자라는 게 확인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네 엄마 말이 틀린 건 없어. 친자확인 검사가 먼저다.”
“제가 아이와 친해져야 친자확인 검사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
“물론 아이의 모발로 먼저 친자확인 검사를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채은엽 같은 오염 변인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려고 합니다. 직접 데려가서 피검사를 할 예정이에요.”
지헌의 침착한 주장에, 재광은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재광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라.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돼.”
“빨리해야죠.”
허락이 떨어지자 지헌의 입가에도 잠잠히 미소가 생겨났다. 어머니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친자확인 검사는 잘못되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인정해준 것만으로도 괜찮은 성과였다.
“아이 엄마는 카피라이터라고?”
“네.”
“정말로 아이가 네 딸이라면…… 인연이 신기하구나.”
“운명이죠.”
운명이라고 대답하며 정오를 떠올린 순간 지헌은 멈칫했다.
“저는 광고회사 취직하려고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서. 오빠는 꿈이 뭐예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시원한 바다 냄새. 그리고 그 바다와 어울리는 반짝이는 미소를 지으며 곱게 물어오던 여자. 긴 머리의 이정오. 생각이 아니라 이미지가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2개월 전, 본사에 근무하고 있던 지헌이 맥스기획의 이사로 부임하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사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무작정 광고대행사에 가고 싶었다. 채은엽의 동생 채은비가 걸리적거렸지만 이마저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너무나 확고한 의지였다. 그건 정오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내 무의식 어딘가에는 이정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걸까?
“운명이 맞아요.”
지헌이 주문을 외듯 한 번 더 확고하게 말했다. 재광은 지그시 미소를 지은 아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들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닮았나…….’
아이가 커갈 때 재광은 일이 바빠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자신이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정말로 아이가 귀엽지 않아서가 아니고 자신이 아이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말씀드리러 올게요.”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예나 사진을 집어들려 하자 재광은 재빨리, 엄하게 말했다.
“사진은 놓고 가.”
* 맥스기획 회의실. 정오는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엔 지헌이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일이 있다고 했다. 며칠 그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고 오늘은 조금 허전했다. 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정지헌한테 의지했다고. 그를 믿고, 그가 가족이 되어준다면 환영하겠지만 그래도 마냥 의지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겐 복잡한 문제가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울 테니까. 또한 7년 전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가 다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역경에도 상처받지 않고서 꿋꿋하게 헤쳐가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정지헌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 대리, 배고프지? 뭐 좀 시켜 먹을까?”
회의실을 지나가던 박영광 차장이 들어와서 물었다. 옆 팀의 신입사원 카피라이터는 조부상으로 지방에 내려갔고, 채은비는 감감무소식.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정오는 카피라이터 대표로서 홀로 제작기획서를 손보는 처지가 됐다. 그래도 같은 팀의 디자이너들에 비하면 자신의 고생은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성미란 팀장과 박영광 차장도 간간이 들여다봐 주어서 기운 빠지진 않았다. 출출하긴 했지만.
“차장님, 떡볶이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좋지. 그럼 보리분식 떡볶이 먹을까? 이 대리 거기 좋아하잖아.”
“아쉽지만 거기는 배달이 안 돼요.”
“그럼 내가 가서 사 올게.”
“아니, 날도 더운데…….”
“괜찮아. 매번 이 대리가 고생을 도맡아 하는데 먹을 거라도 든든하게 먹여야지. 이따가 회의실에서 다 같이 먹자.”
“네. 고맙습니다.”
친절한 박영광 차장이 떠난 후, 정오가 다시 혼자가 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미 열려 있는 문 앞에 지헌이 보였다. 지헌에게 의지하지 않겠단 방금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가워서 헤벌쭉 미소를 짓게 됐다. 하지만 이내 소신 있게,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이사님, 나오셨어요.”
“네. 나왔습니다.”
정오의 야무진 인사에 지헌이 능숙하게 맞장구쳐 주었다. 둘만 있는 회의실에서 이 무슨 연극인가 싶기도 하지만, 앞으로 주의하겠단 어제의 약속대로 그가 노력하려는 것이 보여서 정오는 뿌듯했다. 언제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문이 닫힌 후에도 정오는 능청스럽게 공대했다.
“아침에 일 있으시다면서요. 일 잘 보고 오셨어요?”
“아버지 만나고 왔죠.”
“진짜? 뭐라셔?”
하지만 지헌이 내놓은 대답에 정오가 먼저 흥분하고 말았다. 합. 실수를 했단 사실에 정오는 급히 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지헌이 기다렸다는 듯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정오의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귀 뒤로 넘어가는 순간 그가 어깨를 내려 입술을 부드럽게 겹쳐왔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그녀의 손이 놀라서 허공에 떠올랐다.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그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심장이 수십 번은 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헌이 반들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쓱 닦아내며 웃음기 어린 눈매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와, 이 기회주의자. 그의 앞에선 실수를 할 수가 없다. 실수를 하면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해버리니. 자투리 시간까지 악착같이 찾아먹겠다는 그의 심보가 조금 괘씸해서 살짝 노려보다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께선 뭐라고 하시는데?”
“친자검사를 빨리했으면 하셨고.”
“…….”
“예나가 정말 내 딸이 맞다면 인연이 신기하다고 하셨어. 반감 같은 것도 없으셨고.”
“아무 반감이 없으셨어?”
“티는 많이 안 났지만 오히려 반가워하셨던 것 같은데. 어머니랑은 다른 분이지. 예나를 많이 좋아하실 것 같아. 느낌이 그래.”
“다행이다.”
지헌의 대답에 정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마냥 의지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자신이 겁내던 문제를 그가 이토록 든든하게 해결해주니 신기했고 더 기대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난 게 있어.”
잠깐의 상념에 지헌이 끼어들었다.
“이게 제대로 된 기억인지 모르겠는데 뭔가 생각난 게 있어. 바닷가 같았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거기서 네가 나한테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지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정오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응. 맞아! 멜버른 해변에서 내가 오빠한테 얘기했었어. 광고회사에 들어가는 게 꿈이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오빠한테도 꿈이 뭐냐고 물었었는데, 그건 기억 안 나?”
드디어 공유하는 기억이 생겼단 사실에 정오는 가슴이 벅찼다. 감격스러웠다.
“오빠는 딱히 꿈이랄 건 없다고 했었지. 꿈 없는 젊은이였어. 그땐 그랬는데 한국에서 다시 만났을 땐 취직해서 자리 잡고 싶다고 했었어.”
그 상기된 표정에 지헌 또한 두근거렸다. 지헌의 손은 저도 모르게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회의실 밖. 사무실에 있는 팀원들에게 점심 메뉴를 물어보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박영광 차장은 출입문에 달린 유리창을 확인하고는 얼어붙었다. 이정오 대리와 정지헌 이사 단둘이 있는 회의실의 공기가 묘했다. 정오는 문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옆에서 정오를 향해 몸을 돌린 지헌의 옆모습은 잘 보였다. 체내에 냉매가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차디찬 모습만 보여주었던 이사님께서 따뜻한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으로 정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직접 확인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 멍해진 순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선 다시 냉기가 느껴졌다. 분명히 지헌은 문밖에 영광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오에게로 향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방해하지 마. 왠지 그의 눈빛에선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영광은 오금이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