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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아빠는 달린다 (83/183)

83. 아빠는 달린다2022.02.12.

회의실 안의 공기는 밖과 다르게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지헌의 커다란 손은 기분 좋고 든든해서 정오는 오랫동안 쓰다듬을 받고 싶기도 했지만 이내 거리를 두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찾아오면 곤란하므로. 지헌도 정오의 마음을 헤아려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실을 떠나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그녀와 얘기하고 싶었다.

16551158109206.jpg“7년 전의 내가 요리를 잘했다는 건 진짜야?”

16551158109214.jpg“응! 너무너무! 내 원룸 주방도 다 오빠 거였어. 요리는 오빠 담당이었어.”

지헌이 물꼬를 틀어주니 정오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16551158109214.jpg“7년 동안 요리는 하나도 안 한 거야?”

16551158109206.jpg“응. 해온 줄도 몰랐으니까.”

취미 요리라느니 하는 허풍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듣지 않았지만, 그의 덤덤한 대답이 왠지 너무나 딱하게 들렸다. 그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의 무의식 어딘가에 아직 꺼내지 못한 기억이 숨어 있을 거라는 희망.

16551158109214.jpg“오빠, 이거 볼래?”

정오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앨범을 열었다. 예나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사진을 따로 휴대폰에 담아왔다. 지헌은 가까이 다가가 정오의 휴대폰 화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작고 아늑해 보이는 방을 찍은 사진이었다. 방이 왠지 낯익었다. 자신이 꾸민 아파트 맨 끝방과 아주 비슷했다.

16551158109214.jpg“예전 내 방이야. 오빠가 자주 놀러 왔던 내 원룸.”

아……. 지헌은 옅게 탄식했다. 외딴 기억의 조각이 퍼즐맞추기 하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머리와 심장이 함께 저렸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가면 그토록 마음이 편해졌던 건가? 이정오의 집이라서?

16551158109214.jpg“오빠는 오빠 집보다 내 원룸이 더 좋다고 했었는데 그 이유가…….”

지헌이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 정오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가 금세 입을 닫았다. 지헌은 눈썹을 휘며 물었다.

16551158109206.jpg“그 이유가 뭐?”

16551158109214.jpg“그런 게 있어.”

16551158109206.jpg“뭔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16551158109214.jpg“오빠가 기억해줘.”

16551158109206.jpg“싫어. 네가 말해.”

16551158109214.jpg“기억하려고 노력해봐. 그럼 기억이 나겠지.”

이정오. 너, 나를 너무 거칠게 다루는 거 아니니. 소중하게 다뤄지고 싶은 지헌이 미간을 세게 구기며 눈을 감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16551158109206.jpg“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깨질 것 같네.”

16551158109214.jpg“아, 아파?”

16551158109206.jpg“기억하려니까 힘든 것 같아.”

16551158109214.jpg“많이 아파?”

16551158109206.jpg“응.”

16551158109214.jpg“원룸에 있으면 내가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다 보이니까, 그래서 내 원룸이 좋다고 한 거였어.”

그의 엄살에 겁을 먹은 정오가 곧장 실토했다. 그녀는 그렇게,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지헌은 이내 기운을 차린 얼굴로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길게 늘였다.

16551158109206.jpg“그랬구나. 정지헌답네.”

16551158109214.jpg“뭐야. 지금 거짓말한 거야?”

16551158109206.jpg“그 정도는 눈치챘어야지.”

16551158109214.jpg“와, 정지헌 진짜!”

으르렁. 정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헌은 쉿, 하고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정오는 그가 얄미운 마음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릴 여유 없이 지헌의 한탄을 들었다.

16551158109206.jpg“나는 왜 제일 소중한 걸 잊어버렸을까.”

16551158109214.jpg“…….”

16551158109206.jpg“다른 건 다 잊어도, 그건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16551158109214.jpg“우리가 만난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가라앉은 눈빛이 정오의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얄미웠던 남자는 어느새 또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16551158109214.jpg“그래도 차츰 떠오를 거야. 난 믿어.”

역시 결국은 그를 위로하게 되었다. * 지헌은 정오가 머물고 있는 회의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갔다. 박영광 차장이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언뜻 보았다.

16551158168382.jpg“어…… 이사님.”

지헌을 발견한 영광이 흠칫 굳었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영광은 가시방석, 아니, 가시 바닥을 딛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냥 단둘인 상황 자체만으로도 어렵고 어색한데,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직후라 더욱 힘들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영광에게 지헌이 먼저 말을 걸었다.

16551158109206.jpg“화요일 촬영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거죠?”

16551158168382.jpg“네. 이대로 더 문제가 없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16551158109206.jpg“제작 2팀이 고생해준 덕에 일정을 지킬 수 있게 됐네요. 촬영도 기대하겠습니다.”

16551158168382.jpg“네.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16551158109206.jpg“제가 차장님을 많이 존경합니다.”

지헌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영광이 찬찬히 얼굴을 들었다. 촬영 얘기를 하다가 이게 웬 뜬금없는 존경인가 싶었다. 그렇게 바라본 지헌의 얼굴은 존경을 고백한 사람인가 싶을 만큼 딱딱한 무표정이었다. 영광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맺혔다.

16551158168382.jpg“아니 이사님 저를 왜…….”

16551158109206.jpg“동료들과 두루두루 친밀하게 지내시고, 늘 성과도 훌륭하시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좀 전에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장면이 거짓말인 것처럼 지헌의 눈빛은 매서웠다. 이건…… 동료들한테 입도 벙긋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란 소리지? 존경을 가장한 압박. 눈치 빠른 영광은 지헌의 의도를 재빨리 알아챘다.

16551158168382.jpg“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광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서 대답했다. *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온 지헌은 정오가 다시 건네준 USB를 PC와 연결했다. 이번엔 예나 사진이 제대로 모두 저장된 것 같았다. 정독하듯이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보는 처지라 하룻밤에 다 보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헌은 한 장만 더, 한 장만 더, 하며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결국 사진을 전부 확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침.

16551158109206.jpg“헉!”

지헌은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니, 잠을 잤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새벽 5시가 넘어서 이러다간 월요일을 망치겠다 싶어 눈을 붙였다. 침대에 누웠다간 제시간에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아 의자에 기대어 잠들었는데 깨어나니 아침 7시 55분이었다. 헐레벌떡 일어난 지헌은 재빨리 씻고 나와 옷을 챙겨입고 문을 나섰다. 사진 속의 예나에게 집착하다가 실제 예나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예나가 통원버스를 타는 시각은 8시 20분. 20분 안에 정오의 집에 가야 했다. 아이에게 매일 오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지켜야 했다. 비록 아이가 자신을 싫어할지라도, 무시할지라도. 겨우겨우 차가 밀리지 않는 길로 정오의 집 인근에 접어들었는데 근처까지 가니 길이 꽉 막혀버렸다. 이제 3분. 초조해진 지헌은 골목에 차를 대고 곧장 차에서 내려 부랴부랴 뛰었다. 멀리, 예나가 늘 버스를 타는 그곳에 어린이집 버스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멀리서도 너무나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두 여자, 정오와 예나……. 흐으으으으으. 예나야, 아빠가 간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뛰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맞받아치는 바람이 목구멍까지 파고들어 바늘처럼 찔러댔다. 그래도 아빠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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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아아아아아! 그리하여 가까스로 세이프. 헉헉헉헉. 너무 뛰어 토할 것처럼 숨이 차고 머리가 멍하고, 온 세상의 빛깔이 휘발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또렷하게 보이는 공주님에게.

16551158109206.jpg“예나야, 안녕.”

탁해진 호흡 때문에 괴물 목소리가 나왔다. 예나가 대답도 안 하고서 잔뜩 찡그린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아, 저 귀엽고 쪼그만 게 내 딸이라니. 지헌은 오늘도 역시 입영 열차를 보내듯이 예나가 버스에 자리를 잡아 앉을 때까지 힘껏 손을 흔들었다. 예나가 잠깐 쳐다보고는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16551158109214.jpg“왜 이렇게 뛰어왔어.”

버스가 떠난 후, 정오가 외면당한 지헌이 안 됐다는 듯 지헌의 등을 문질렀다.

16551158109206.jpg“길이 막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

지헌이 아직 고르지 못한 숨을 정리하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16551158109206.jpg“어제 예나 사진 보다가 늦게 잠들어서 늦어버렸다.”

16551158109214.jpg“어후. 내가 못 살아. 우리 예나가 아빠를 잡네.”

그래도 괜찮다. 인사를 했으니. 약속을 지켰으니. 예나야. 아빠는 숨넘어가게 뛰다가 괴물이 되어도, 몸이 다 으스러져도 매일 널 만나러 올 거야. *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하원 버스에 오른 예나는 아침의 지헌을 떠올렸다. 아침에 잠깐 얼굴 보는 거, 그게 뭐라고,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던 아저씨. 왠지 아저씨를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느릿느릿 버스에 올랐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달려오는 동안 너무너무 숨이 차서 괴물 소리를 들려주었던 아저씨. 그 목소리가 흉악해서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언제나처럼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인사를 안 한다고 내일은 안 나온다면 이제 아저씨하고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독한 계획을 세웠다. 마음은 독했지만 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면서는 내내 웃음이 났다. 엄마가 읽어주었던 동화책에도 더러 괴물이 나왔지만 엄마는 예쁜 괴물밖에 할 줄 몰랐는데. 아저씨는 흉악한 괴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의 쓰임을 발견했다. 아저씨의 쓰임을 떠올리고 나니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고 내일이 되면 또 입술을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16551158230409.jpg“예나야, 다 왔다. 내려야지.”

어느새 학원 앞에 도착하여 버스가 섰다. 선생님이 예나와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학원 선생님이 아직 마중 나오지 않아 예나와 선생님은 길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16551158230409.jpg“오늘은 조금 늦으시나 보다. 선생님이 학원에 전화해볼게.”

어린이집 선생님이 학원에 전화하는 동안 예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학원 앞이 택시 승강장이라 이따금 학원 선생님이 기다리는 자리에 사람이 서 있을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슈트 차림이 멋진 할아버지 한 명이 도로를 향해 서서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의 포즈는 다 똑같은데.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데. 이 할아버지는 택시 말고 다른 차를 기다리고 있나?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16551158230409.jpg‘이 아이구나.’

재광은 곁눈질로 몰래몰래 아이를 보았다. 태풍의 영향권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꽤 바람이 부는 선선한 날이었다. 바람이 아이의 앞머리를 흩트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이마에 단단히 박힌 분홍빛의 연어반이 묘한 가슴 저릿함을 안겨주었다.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 손을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입술과 손끝을 괴롭혔지만 재광은 잘 이겨냈다. 저편에서 차를 대놓고 지켜보던 운전기사와 수행비서가 크게 팔을 흔들었다. 회장님, 일정이 촉박합니다. 가셔야 합니다. 거기 계속 그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수행비서가 이 앞까지 달려와 ‘회장님’이라고 외칠 것 같았다. 재광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발끝에 아쉬움이 달라붙었다. 예나도 할아버지가 떠나는 방향을 오래 쳐다보았다.

1655115823046.jpg“예나야!”

그 반대편으로 도빈이 달려왔다. 그제야 예나는 고개를 돌렸다. 진서와 학원 선생님도 동시에 달려왔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떠난 후, 가장 먼저 달려온 도빈이 반갑게 물었다.

1655115823046.jpg“예나야, 나 기다리고 있었어?”

1655115823047.jpg“응. 기다리고 있었어.”

사실이 아니지만, 예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짐작대로 도빈의 입이 헤벌쭉 늘어났다. 누군가의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왠지 또 아저씨가 생각났다.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오는 아저씨.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저씨. 아저씨는 내일 아침에 또 올까? 오지 않으면 왠지 궁금해질 것 같았다. 그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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