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제발 정신 차려! (84/183)

84. 제발 정신 차려!2022.02.16.

다원주류 신제품의 새 패키지 시안은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지헌이 디자이너와 함께 다원주류 본사를 직접 방문하여 끝장을 보고 왔다. 시안대로 오늘 밤에 샘플 작업이 이루어지면 바로 확인하고 내일 촬영장으로 보내야 했다. 디자이너가 가장 바빴지만 정오 역시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오늘 미앤톡 티저 광고가 온에어되었단 사실을 잊고 말았다. 오후 늦게야 정오는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가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훈훈한 광고다, 따뜻한 카피에 가슴이 찡하다, 부모님께 연락해야겠다, 본편 광고가 기대된다…… 꽤 호평이 많이 달려 있었다. 물론 이후의 본 광고에서 좋은 반응이 나와야겠지만, 일단 사람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광고가 반향을 일으켜 상품의 매출까지 끌어올렸을 때 가장 보람 있지만 이럴 때도 카피라이터로서 뿌듯함을 느낀다. 내가 쓴 카피 한 줄이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에 스며들었을 때. 정오는 새로 나온 광고를 국순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문자 메시지를 보내놓고서 업무를 이어갔다. 내일 광고 촬영 문제로 AE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서 승규와 마주쳤다. 승규가 먼저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16551158331955.jpg“안녕하세요. 대리님.”

16551158331959.jpg“네. 안녕하세요. 차장님.”

정오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니 승규가 더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서 말했다.

16551158331955.jpg“지헌이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16551158331959.jpg“네. 저도 차장님께 얘기했다는 말 들었어요.”

16551158331955.jpg“여러모로 신기한 인연이네요.”

16551158331959.jpg“그러게요. 도빈이 아버님이 차장님이라는 것도 신기했는데.”

16551158331955.jpg“시간 있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정오가 다정하게 맞장구쳐주니 승규가 가까이 위치한 빈 회의실을 가리켰다. 승규는 회의실에서 정오에게 휴대폰에 담긴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승규의 휴대폰을 건네받은 정오의 눈이 커졌다. 지헌과 친구들의 술자리 동영상이었다. 지헌의 앳된 모습이 화면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16551158331959.jpg“이건…….”

16551158331955.jpg“지헌이의 7년 전이에요. 그때가 아마 6월쯤이었을 거예요.”

16551158331959.jpg“…….”

16551158331955.jpg“사고로 깨어난 후에는 다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죠.”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술집에서, 지헌이 발그레한 얼굴로 지그시 미소 짓고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도 지헌은 혼자 술을 마시며 기분 좋게 웃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선해 보이는 눈동자에 정오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7년 전 6월. 아마 정오와 지헌이 연애를 시작한 직후인 듯했다.

16551158331955.jpg“엄청 순둥순둥해 보이죠? 원래 이런 친구는 아니었어요. 군대 있을 때도 우직하고 성실하긴 했는데 뭘 하든 반응은 차가워서 가까이 가는 친구는 별로 없었어요. 그랬던 애가 호주 여행을 다녀온 이후부터 조금씩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 같네요.”

승규가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6551158331955.jpg“이렇게 달라져 가던 친구가, 7년 전 그때의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성격이 다시 변한 거죠. 더 차가운 녀석이 되었어요. 심장에 하트가 사라진 것처럼.”

16551158331959.jpg“…….”

16551158331955.jpg“내 친구의 인생에서 대체 뭐가 사라졌기에 이렇게 변했을까. 그게 내내 궁금했었는데, 이정오 대리님이었네요.”

승규의 의견에 정오는 가슴이 찡해졌다. 지헌의 옆에 승규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7년 전의 지헌은 승규가 이토록 좋은 친구란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 터놓고 얘기하지 않았겠지. 그토록 차갑고 무뚝뚝한 지헌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준 승규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16551158331959.jpg“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얘기 들려주신 것도.”

정오는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16551158362261.png

  * 국순 백반. 예나는 식탁 앞에 앉아 출입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16551158362264.jpg“엄마.”

16551158331959.jpg“예나공주! 밥 다 먹었어?”

업무를 끝마치고 정시에 퇴근한 정오가 예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16551158362264.jpg“아니. 엄마랑 먹으려고 기다렸지.”

16551158331959.jpg“그래. 어서 밥 먹자.”

주방에서 홀로 일하는 국순에게 인사하고 나온 정오는 예나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퇴근은 일찍 했지만 내일이 촬영날이고 이전에 큰 이슈가 있어서 정오의 휴대폰엔 불이 났다. 두어 숟가락 뜨면 휴대폰이 울리고, 통화를 마치면 또 다른 데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오랫동안 몇 술 뜨지 못했다. 10여 분간 휴대폰에 붙잡혀 있다가 겨우겨우 자유를 얻었다. 10여 분이 흘렀지만 예나의 밥그릇도 그대로였다. 어쩐지 예나가 평소보다 기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말도 없고 밥 먹는 속도도 느려지는 아이라 정오는 몇 분 지켜보다가 타일렀다.

16551158331959.jpg“이예나, 골고루 먹어야지.”

16551158362264.jpg“엄마, 나 그만 먹으면 안 돼?”

16551158331959.jpg“안 돼. 다섯 숟가락만 더 먹어.”

16551158362264.jpg“못 먹겠는데.”

16551158331959.jpg“그래. 그만 먹어. 대신 간식은 없어.”

간식까지 못 먹게 하면 투정을 부리며 칭얼거렸는데, 예나는 시무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정오는 예나에게 물었다.

16551158331959.jpg“우리 예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16551158362264.jpg“엄마.”

정오의 관심에 용기를 얻은 예나가 말했다.

16551158362264.jpg“예나 휴대폰 사주면 안 돼?”

16551158331959.jpg“……응?”

16551158362264.jpg“엄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예나만 없잖아.”

16551158331959.jpg“우리 예나는 아직 일곱 살이라…….”

16551158362264.jpg“아저씨는 엄마한테 마음대로 연락할 수 있는데 나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연락도 못 하잖아.”

당황한 정오가 대답할 말을 찾는 동안 예나가 예리하게 항변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지헌과 통화를 했다고 받아들인 건가?

16551158331959.jpg“예나야. 엄마가 지금 통화한 건 일 때문에…….”

16551158362264.jpg“사줘어어. 휴대포온!”

으아앙. 정오가 더 설명하기 전에 예나는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식당 문을 연 손님이 예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오는 예나를 잘 달래어 저녁을 먹이며 어린이용 휴대폰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른 기능 없이 통화와 문자메시지 전송만 가능한 휴대폰이라면 하나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치추적기능도 갖추고 있으니 만에 하나의 불상사에도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정오는 예나와 함께 휴대폰 대리점에 방문하여 휴대폰을 개통했다. 신용카드 크기 정도의 앙증맞은 휴대폰이 아이의 손에 꼭 맞았다. 앙증맞은 아이가 앙증맞은 것을 들고 있네. 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해맑게 핀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통화와 문자메시지 전송 외에 아무 기능도 없는 휴대폰인데, 아이는 제 것이 생겼다는 사실, 제 번호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것 같았다. 정오는 예나에게 엄하게 당부했다.

16551158331959.jpg“이예나. 이건 네가 울어서 사준 게 아니야.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엄마한테 바로 전화하라고 사주는 거야. 알았어?”

16551158362264.jpg“응!”

16551158331959.jpg“앞으로도 그래. 울고 떼쓰면 아무것도 안 들어줄 거야. 알겠어?”

16551158362264.jpg“응!”

예나의 씩씩한 대답에도 정오는 시름이 쌓였다.

16551158331959.jpg“후우, 엄마는 걱정이다. 네가 휴대폰을 장만하면 도빈이도 갖고 싶어 할 텐데.”

  * 외근을 다녀오니 하루가 후딱 지나버려 금방 저녁때가 되었다. 처리할 업무가 많은 월요일이라 지헌은 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아이 사진을 보느라 잠을 많이 못 잔 탓에 눈이 자꾸 피로해졌다. 지헌은 잠시 업무를 내려놓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똑똑. 잠시의 쉴 틈도 없이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51158455201.jpg“네.”

지헌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서 대답했다. 문이 열렸다. 아직 남아 있는 직원들이 보고할 거리를 가지고 문을 두드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채은엽이었다. 지헌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오전에 지헌은 은엽의 법무법인과 맺은 자문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정식으로 통보했다. 꽤 큰 로펌이라 맥스기획 하나 정도야 편하게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은엽이 직접 찾아와 조금 놀랐다. 은엽이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지헌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이 물었다.

16551158455206.jpg“지헌아, 너 괜찮은 거야? 안색이 안 좋은데.”

16551158455201.jpg“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지헌은 능청스럽게 안부를 묻는 은엽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16551158455201.jpg“계약 때문에 온 거야? 그렇다면 헛걸음일 텐데.”

일어날까 말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은 저벅저벅 걸어 문 앞에 섰다.

16551158455201.jpg“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어. 절차대로 처리해줬으면 좋겠고, 출입증도 반납하고 가도록 해.”

굳세게 문손잡이를 잡은 지헌이 잠시 손을 놓았다.

16551158455201.jpg“그리고 혹시, 네 동생은 연락이 되나?”

다시 만나기 힘들 테니, 직접 찾아온 김에 일러둘 것을 일러두어야 했다.

16551158455201.jpg“무단결근한 지 한참 됐고 제대로 인수인계도 안 했어. 그래서 그 팀이 지금 굉장히 곤란한 상태야. 동생 만나면 말 좀 전해줘. 회사를 그만두고 싶으면 제대로 정리하고 그만두라고.”

16551158455206.jpg“하아. 지헌아, 생각해봐. 지금 내 동생이 뭐 때문에 그러겠나.”

은엽은 답답하단 듯이 헛웃음과 함께 대답을 이어갔다.

16551158455206.jpg“내 동생 입장에선 너무 기가 막히지 않겠어? 4년 동안 너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결혼을 해도 늦었단 말이 나올 마당에 남친이라는 사람은 뻔뻔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으니 말이야. 출근이 문제가 아니야. 내 동생이 지금 살고 싶겠니?”

16551158455201.jpg“넌 채은비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잘 알지 않아? 오히려 채은비가 낭설을 뿌리고 다니는 바람에 내가 곤란해졌다는 얘기까지 했을 텐데. 내가.”

16551158455206.jpg“낭설은 아니지. 너와 은비는 서로 합의 하에 연인관계를 맺었으니까.”

은엽의 자극적인 말들에 지헌의 눈썹이 휘었다.

16551158455206.jpg“나는 일방적으로 네 말만 듣고 내 동생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동생 말을 들어보니 너무 기가 막히더라고.”

16551158455201.jpg“…….”

16551158455206.jpg“내 동생을 4년 동안 여자친구로 이용해먹은 거, 그건 착취였어, 지헌아.”

집무실을 방문하기 전, 은엽은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짰다. 뻔뻔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기. 은엽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괘씸한 자식. 넌 절대 우리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정지헌.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무력을 행사할 수는 없어 눈만 번뜩이고 있는 지헌의 얼굴이 우습게 여겨졌다. 어젯밤에 대체 뭘 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는 것 또한 좋은 징후였다.

16551158455206.jpg“그리고 장 여사님이 말씀하시던데. 이정오가 네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한다며.”

16551158455201.jpg“…….”

16551158455206.jpg“지헌아, 너 정말 그 이정오란 여자를 제대로 안다고 생각해? 그 아이가 진짜로 네 딸이라고 생각해? 그걸 어떻게 장담해?”

지헌의 냉소에도 은엽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16551158455206.jpg“7년 전에 내가 너랑 얼마나 친했는데. 넌 이정오 같은 여자 좋아할 사람이 아니야. 이정오가 너한테 어떤 기억을 억지로 주입했는지 모르겠지만, 넌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고.”

은엽은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서 호소했다.

16551158455206.jpg“네 기억이 잘못된 거야, 지헌아. 제발 정신 차려!”

네 기억을 의심해라. 네 판단을 믿지 마. 네 자신을 믿지 마, 정지헌.

1655115848371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