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어차피 하는 고생2022.03.02.
기훈이 이끄는 차는 저녁 7시경 병원에 도착했다. 고속도로에선 빨리 달릴 수 있었지만 서울 시내에 들어서는 길이 많이 막혔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이곳저곳에서 교통체증을 겪었다. 그래도 꽤 빨리 온 편이었다. 병원 앞에서 내린 정오가 기훈에게 인사했다.
“기훈 씨, 정말 고마워. 오늘 정말 고생했어.”
“아니에요. 얼른 애기한테 가 보세요.”
기훈이 손짓했다. 정오도 기훈에게 손을 흔들고 바로 돌아서 뛰었다. 국순도, 지헌도 걱정 말라 괜찮다 그녀를 다독였지만 막상 병원에 이르니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오는 답답하게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입원실이 줄지어 있는 6층. 헉헉거리면서도 단숨에 올라온 정오는 호실을 확인하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예나의 병실은 복도의 맨 끝인 것 같았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복도의 끄트머리에 이른 정오의 눈에 국순이 보였다. 국순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의 벽에 기대어 있었다.
“엄마.”
“왔어?”
정오가 왜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국순은 턱짓으로 병실 문을 가리켰다. 병실의 문이 아주 약간 열려 있었다. 국순은 그 문틈으로 병실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헌이 예나를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예나는 지헌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잠든 것 같긴 했지만 간헐적으로 얕은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울고 난 후 호흡이 고르지 못해 잠든 와중에도 히끅거리는 모양이었다. 그 고요한 풍경을 확인한 정오의 눈가에도 이슬이 매달렸다. 받아들여주었다. 아이가 아빠를, 아빠가 아이를.
“이쁘네. 둘 다 참 이쁘네.”
국순이 공기의 일부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 기훈은 정오를 병원까지 태워다 준 후 회사로 복귀했다. 미란과 영광이 촬영장에 있어 오늘 하루 종일 홀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고은주 대리가 물었다.
“이 대리님은?”
“병원에요. 애기가 쓰러졌대요.”
“아. 그래?”
은주는 몇 시간 전에 정지헌 이사가 이후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헐레벌떡 회사를 떠나는 걸 목격했다. ‘병원’이라는 단어도 언뜻 들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다쳤나 보다 생각했는데 이정오 대리의 아이가 쓰러졌던 거였다. 은주는 지헌이 병원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두 사람은 많이 가까운 사이구나. 은주의 반응을 확인한 기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아니야. 나 깜짝 놀랐지.”
“후우. 도로에서 숨이 꽉꽉 조이더라고요. 제가 이 정도였는데 이 대리님은 어땠을까 싶어요.”
기훈은 넋두리하듯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근데 정지헌 이사님이 전화해서 일을 좀 시켰나 봐요. 이 대리님 성격상, 아니 내가 지금 그거 챙기게 생겼냐 애가 쓰러졌다는데, 그렇게 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묵묵히 듣고 있더라고요. 네, 이사님, 네, 이사님, 그러면서.”
“…….”
“전의를 다 잃은 거죠.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요.”
기훈 씨, 그거 아니야……. 이정오와 정지헌, 두 사람의 관계를 인지하고 있는 은주는 기훈이 안타까웠지만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묻은 건 아닌데, 조금 빨개졌네.”
“아, 하하…….”
은주의 말에 기훈은 열이 약간 오른 제 뺨을 어루만졌다. 어찌한단 말인가. 이정오 대리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 순수청년을. 은주는 꿋꿋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 몰라. 난 끝까지 아무 말 하지 않을 거야. 이정오 대리, 님이 뿌린 정은, 님이 수거하시오. * 잠든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병실 앞 복도로 나온 지헌은 정오와 국순에게 앞으로의 수순에 대해 말했다.
“일단 친자 검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 여기서도 할 수 있나? 병원에 온 김에 하면 좋겠는데.”
“이 병원에선 곤란합니다.”
국순의 물음에 지헌이 대답했다.
“아니, 왜?”
“그건…….”
지헌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 친구 중에 채은엽이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이름으로 짐작하셨듯이 채은비의 오빠인데, 저와 채은비를 결혼시키고 싶어서 오래전부터 공을 들이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오늘 병원에 다녀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친자확인검사를 망치려는 게 아닌가 싶고요.”
“아이고, 세상엔 별놈이 다 있네.”
“그러니까, 피가 어디 안 가는 거지. 보통 남매가 아니야.”
국순이 한탄하자 정오가 맞장구를 쳤다. 국순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 눈썹을 추켜 올리며 지헌에게 물었다.
“근데, 결혼은 뭐 혼자 한다던가? 예나 아빠랑 채은비가 뭔가 정분이 있었으니 그 오빠가 그러는 건 아니고?”
“아, 그런 건, 그런 건 아닌데, 사연이 좀 있어서…….”
당황한 지헌이 말을 더듬었다. 국순은 냉큼 지헌의 말허리를 끊으며 손을 휘저었다.
“됐어. 뭐 그럴 수도 있지. 7년이 어디 보통 세월인가. 그렇게 이쁜 애가 친구 동생이면, 나라도 결혼하겠네.”
“아니, 어머니, 그런 게 아니고요.”
“우리 정오만 건실하게 살았지 뭐. 애 키우고 착실하게 일만 하면서.”
“어머니, 저도 건실은 했는데…….”
“아유 됐어, 됐어. 지나간 일은 넣어둬, 괜찮아.”
“아니, 진짜 저는 한 번도, 저 좀 억울…….”
“어휴, 나는 가야겠다. 둘이서 예나 잘 지키고 내일 잘 퇴원시켜.”
지헌의 말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제 한탄만 늘어놓은 국순이 한 걸음 움직였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응. 엄마, 고마워. 얼른 들어가.”
지헌은 너무나도 억울한데 정오는 그런 지헌의 모습이 재미나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인사했다. 지헌이 곧장 국순을 뒤쫓아갔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냥 있어.”
“…….”
“그렇게 눈물 나는 재회를 했는데, 애가 다시 눈 떴을 때 사라져봐. 아빠가 또 거짓말했나 싶지. 난 신경 쓰지 말고 애나 잘 돌봐.”
국순의 말이 옳았다. 지헌은 국순의 조언에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런 지헌을 국순이 흐뭇하게 불렀다.
“예나 아범.”
“네.”
“고생했어. 고마워.”
국순이 떠나고 정오와 지헌, 곤히 잠든 예나만 남은 병실.
“학원에서 예나 친구들이, 예나한테 아빠가 없다고 뭐라고 했다나 봐.”
정오가 지헌에게 오늘 낮에 예나에게 닥쳤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말끝에는 긴 탄식이 이어졌다.
“내가 너무 잘못했어. 예나한테 아빠가 없는 건 창피한 게 아니라고 가르쳤거든.”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살아가기 위해, 이 험난한 세상을 강하게 헤쳐나가기 위해 주입했던 말이 아이에게 상처를 입혔다. 일곱 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세상인데.
“나는 평생 내가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빠를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 못 했지.”
지헌은 자책하는 정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또한 마음이 아팠다. 미앤톡 경쟁 PT 발표 석상에서 정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들은 잔뜩 주고도 주지 못한 것을 굳이 찾아내 마음 아파한다고 했던가. 그녀가 원망스러웠던 시기였는데도 그 말은 참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하나 마냥 멋진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서도 스스로를 부족하게 생각하는 어머니들의 죄책감. 지헌은 그것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는.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때의 너도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거지. 너는 정말 잘했어.”
위로하듯 말했다.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가는 그녀의 가정, 그녀가 키운 아이, 그녀의 커리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지헌은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이정오. 너는 좀 더 칭찬받고 위로받아야 하는데. 마음에 이끌려 그녀에게로 어깨가 기울어졌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에 입술이 오래 머물렀다. 그사이에.
“엄마아.”
칭얼거리며, 예나가 깨어났다.
“어어어! 예나야.”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정오는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갔다. 소아과 전용 좌식 입원실이라 예나의 눈높이에선 바닥에 앉아 있는 지헌이 보이지 않았다. 정오가 먼저 달려가니 예나가 물었다.
“아빠는?”
“아빠 여기 있지.”
지헌도 한걸음에 바짝 다가와 예나에게 얼굴을 보였다.
“나 물.”
“그래. 우리 예나 물, 물.”
“아니이.”
정오가 예나에게 물을 가져다주려고 허둥대자 예나는 지헌을 가리켰다.
“그래. 아빠가 줄게.”
지명을 받은 지헌이 정오가 들고 있던 컵에 물을 따라 예나에게 먹였다. 예나는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기운이 없을 만하긴 했다. 밤 10시가 넘도록 저녁도 먹지 못했으니. 정오가 물컵을 말끔하게 비운 예나에게 물었다.
“우리 공주님 배 안 고파?”
“배고파.”
“뭐 먹고 싶어?”
“컵라면.”
아, 이럴 때마저도 부전여전인가. 집에서는 컵라면을 못 먹게 하니 요 깜찍한 아이는 엄마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야무지게 컵라면을 요구했다. 예나의 기회주의자적 면모에 정오는 체념의 눈빛으로 지헌을 쳐다보았다. * 다음 날 아침. 예나의 회복된 모습을 확인한 담당 의사의 소견에 따라 정오는 퇴원 절차를 밟았다. 정오는 하루 휴가를 내고 예나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지헌 또한 곁에 있기로 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여유롭지는 않았다. 예나와 함께 병원을 떠나는 순간까지 지헌을 찾는 전화가 줄줄이 이어졌다.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본 예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엄마, 아빠는 원래 이렇게 바빠?”
“응. 바쁘지만 그래도 오늘은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어.”
운전석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지헌이 예나에게 말했다.
“예나야. 아빠가 아무리 바빠도 예나 전화는 받을 테니까 아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지헌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예나가 빙긋 웃었다. 지헌은 어제 예나의 휴대폰에 단축번호를 설정하여 제 번호를 저장했다. 엄마는 1번, 할머니는 2번이라 지헌은 0번이 되었다. 예나는 이미 지헌의 전화번호를 외웠지만. 길이 막히지 않아 세 사람이 탄 차는 금방 정오의 집 앞에 닿았다. 지헌이 차를 주차한 후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니 예나는 양팔을 넓게 벌렸다. 도빈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빠는 병원에 갈 때 자신을 번쩍 안아준다는 그 말. 예나가 하는 짓을 보고서 어처구니가 없어 정오의 입은 벌어졌는데, 지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예나에게 물었다.
“아빠가 안아줄까, 업어줄까?”
“업어줘. 코알라처럼.”
지헌이 예나를 향해 등을 내밀었다.
“이예나, 네 발로 걸어가야지.”
“으으응. 싫어어.”
정오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예나는 지헌의 등에 업혔다.
나는 아빠가 병원에서 돌아올 때도 업어준다. 도빈이한테 자랑해야지. 일곱 살 인생의 새 역사를 쓰는 예나의 가슴은 벅차게 부풀었다.
“예나야. 아빠 쓰러지겠다. 네 몸무게를 생각해야지.”
“엄마가 나 깃털처럼 가볍다고 했잖아.”
“그건 그냥 사랑의 힘이지, 20kg짜리 깃털이 어딨어.”
정오는 지헌을 보호하고자 했으나 지헌은 예나를 거뜬히 업고 앞서며 말했다.
“아니야. 우리 예나 정말 깃털처럼 가벼워.”
애 아빠가 이렇게 나오니 정오도 어쩔 수 없었다. 정오는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4층까지 올라 현관문을 열고서도 예나의 응석은 계속되었다. 예나는 지헌의 등에 꼭 매달려 내리지 않은 채로 떼를 썼다.
“신발, 신발. 신발 벗겨줘야지.”
“아. 그래. 신발.”
지헌이 예나의 신발을 벗기니 예나는 화장실을 가리켰다.
“예나 화장실.”
“그래. 화장실.”
화장실 앞에 가서야 예나는 지헌에게 매달린 팔을 풀었다. 예나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 지헌은 국순에게 인사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어이고. 우리 예나 아범 애썼네, 고생했네, 고생했어.”
하지만 국순이 고생한 지헌에게 음료수를 쥐여주려는 순간, 화장실에서 예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예나 손.”
“손? 아, 손.”
눈을 꿈쩍꿈쩍하던 지헌이 바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손 씻는 것까지 제 아빠한테 내맡기는 아이가 우스워 정오와 국순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일곱 살짜리가 하룻밤 사이에 세 살이 됐네. 아빠를 종처럼 부려먹네.
“해달라고 그러는 애나, 그걸 다 받아주는 애 아빠나 참…….”
“언제는 빨리 친해졌으면 좋겠다며.”
정오의 넋두리에 국순이 지적했다. 정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반박했다.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오빠가 안됐다고 그랬지.”
“그냥 안됐다고 그랬어? 너무 안됐다고 그랬지. 너무.”
정오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국순이 그런 정오를 놀렸다.
“왜. 샘나?”
“아니거든?”
정오는 고개를 흔들며 미소 지었다. 정지헌 씨, 예나가 받아주나 안 받아주나 고생하는 건 똑같네. 어차피 고생하는 거, 사랑해주며 고생시키는 게 낫겠지. 실은 예나의 포지션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