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친자확인검사2022.03.05.
예나는 지헌의 무릎에 앉아 밥을 먹었다. 젓가락질까지 배운 아이가 손은 까딱 않고 제 아빠가 먹이를 가져오면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는 게 귀여워서 정오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행복한 식사시간이었다. 점심 식사 후, 지헌이 예나에게 말했다.
“예나야. 아빠가 할 말이 있어.”
“응.”
“우리 다시 병원에 갈 거야.”
오늘의 일정. 친자확인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헌이 모두 알아보았고 그런 이유로 아침에 더욱 바빴던 것이었다.
“이번 병원은 예나가 아파서 가는 건 아니고, 검사를 해야 해서 가는 건데, 예나가 아빠 딸이라고, 도장 쾅 찍는 검사를 하는 거야.”
“어떻게?”
지헌의 설명에 예나가 물었다. 표정이 경직돼 있었다. 예나가 아빠 딸이라는 검사. 그 말에 다시 긴장한 것이다.
“예나 피를 조금 뽑고, 아빠 피를 조금 뽑아서 검사를 하면 돼.”
“어떻게?”
예나가 고개를 돌려 그 옆에 앉은 정오에게 물었다.
“엄마, 피를 뽑아서 어떻게 예나가 아빠 딸이라고 말해? 피는 다 빨간색인데.”
계속 아빠와 얘기하던 딸이 그 어려운 걸 엄마에게 질문했다. 정오의 안색이 붉어졌다. 몰라. 엄마는 몰라. 엄마는 뼛속까지 문과생이야……. 혈액 검사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머리가 숨죽여 통곡했다. 그사이에 예나는 표적을 바꾸었다.
“피를 뽑으면 도장을 찍을 수 있어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빠를 부려먹던 딸이 잠시 정신을 차리고 아빠에게 존댓말로 물었다. 아이는 존댓말과 반말의 혼재만큼이나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야 했다. 지헌은 제 엄지손가락을 예나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아빠 손가락에 지문 보여?”
“응. 나도 지문 있어!”
“그렇지. 이 손가락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 알아?”
“응. 어린이집에서 배웠어.”
“그래. 그래서 예나가 길을 잃고 주소까지 잊어버렸더라도 경찰서에 이 지문을 등록해놓으면 예나는 집을 찾을 수 있어. 지문이 집까지 오는 지도가 되는 거야.”
지문에 대해 설명한 지헌은 휴대폰 검색으로 혈액의 1000배율 동영상을 찾아 예나에게 보여주었다. 적혈구와 백혈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동영상이었다.
“우리 몸에도 그런 게 있는데, 봐봐. 이건 빨간색 피를 현미경으로 1000배 확대해서 본 거야.”
예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으. 징그러워.”
“징그럽기만 해?”
“개구리알 같잖아.”
“그래. 그냥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빨갛게만 보이는 피에 사실은 이런 개구리알처럼 생긴 애들이 있지? 이걸 더 확대해서 보면 우리 피에 새겨진 설계도, 지도가 보여. 손가락 지문 같은 지도가 우리 피에도 있는 거야.”
지헌은 지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예나는 정말 모두 알아듣는 것처럼 집중하여 지헌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피검사는 그 지도를 찾는 검사야. 아빠랑 예나는 그 지도가 아주 비슷하거든. 그건 예나가 아빠 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럼 우리는 피에 있는 지도가 닮았어?”
“응. 닮았어.”
아빠의 확신에 찬 대답에 예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예나는 좀 전엔 징그럽다며 보기를 마다했던 혈액 동영상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피에 있는 지도라니!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것, 수천 배 확대해야 볼 수 있는 내 안의 지도까지 아빠를 닮았다니! 너무나 근사한 이야기였다. 일곱 살 꼬마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엄마, 나 빨리 검사하러 갈래.”
* 정오는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지헌과 함께 검사의학과를 찾았다. 꽤 규모가 큰 건강검진센터의 한편에 자리한 연구실이었다. 정오는 예나의 친자확인검사 동의서를 작성하고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지헌이 먼저 채혈했다. 지헌의 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자 예나의 표정도 단단히 굳었다.
“이제 예나 차례야. 할 수 있지? 잘 참으면 엄마가 이따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예나가 많이 긴장한 것 같아 정오는 아이스크림으로 아이를 달래고서 예나를 제 무릎에 앉혔다. 예나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완강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가느다란 예방접종 주삿바늘도 정색을 하는 아이가 몸의 저항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버텨내는 것이 대견했다. 이윽고 아이의 팔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지헌은 예나의 다른 한쪽 손을 잡아주었고 정오는 눈을 꼭 감은 아이를 안아 다독였다. 채혈을 하는 동안 예나는 괴로운 듯 끙끙댔다.
“다 됐습니다.”
주삿바늘을 뺀 간호사가 말했다.
“엄마아아.”
채혈하는 동안 숨도 못 쉬고 있던 예나가 주삿바늘이 빠지자마자 엄마에게 안겼다.
“잘했어. 우리 애기. 잘했어.”
정오는 두려운 순간을 잘 이겨낸 딸을 칭찬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예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버렸다. 지헌은 예나를 업어다가 방에 눕혀주었다. 아이를 4층까지 업고 올라가는 일. 정오는 언젠가부터 몹시 버거워하던 일을 지헌은 오늘 두 번이나 뚝딱 해냈다. 아이를 눕히고 거실로 나온 지헌에게 정오가 고마움을 전했다.
“예나 옮겨줘서 고마워.”
“뭘.”
“아까 피검사에 대해 설명해준 것도 고마워.”
“뭘.”
“그래도 둘이 머리를 합치니 하나보다 낫다.”
“정오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뭘, 뭘, 하며 가뿐히 대답해오던 지헌이 정색하며 정오에게 대꾸했다.
“그건 우리 둘이 머리를 합친 게 아니라 내가 다 얘기한 거야. 피검사를 설명하는 데 너의 머리는 없었고 내 머리가 다 설명한 거라고.”
음. 맞는 말이지만 무척 기분이 거시기하네? 지헌에게 고마워했던 좀 전의 따뜻한 마음이 짜게 식었다. 덩달아 정오의 표정도 떫어졌다.
“이렇게 꼭 남의 공에 숟가락 얹으려는 사람이 있다니까.”
“뭐어? 숟가락? 수욷가락?”
결국 한마디 더 보탠 지헌의 도발에 정오의 눈이 희번덕 뜨였다.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지금 숟가락 타령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애를 키웠으니 망정이지. 오빠가 우리 예나를 키웠으면 나는 어디 가서 예나가 내 딸이라는 말도 못 꺼내겠다.”
“발끈하시긴.”
정오를 시원하게 놀려먹은 지헌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사이에 예나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정오의 드높아진 목소리에 깨어난 것이다.
“엄마, 아빠랑 싸워?”
“아니야. 싸우긴! 엄마랑 아빠랑 그냥 얘기하는 거야.”
정오가 급하게 수습했지만 예나의 뚱한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예나가 지헌에게 당부했다.
“아빠, 엄마랑 싸우지 마.”
지헌의 표정은 아주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아빠는 안 싸워. 엄마가 너무 예뻐서 아빠는 화가 하나도 안 나.”
그 능청에 정오는 더욱 기가 막혔다.
* 어제, 그리고 오늘, 은엽은 지헌을 주시했다.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지헌은 친자확인검사를 하지 않았다. 예나가 입원한 김에 검사를 진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엽의 생각이 더 앞서간 모양이었다. 병원에도 친자확인검사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은엽은 좌시할 수 없었다. 지헌의 동선, 지헌의 연락내용을 계속 추적했다. 다행히 꽤 걸려들었다. 정지헌은 전문기관에서 친자확인검사를 받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알게 된 사실에 은엽은 희열을 맛보았다.
‘다른 데서 친자확인검사를 하겠다는 거지? 그래도 머리를 쓰려고는 하네.’
자신을 피해서, 무언가를 피해서 비밀리에. 그 조마조마한 속내를 알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지헌이 예약한 전문기관의 공략 가능한 직원을 찾아낸 은엽은 직원에게 잽싸게 접촉하여 솔깃한 제안을 했다.
“배우자한테 약점이 잡혀서 이혼하기 힘드시죠? 제가 깔끔하게 해결해드리죠. 저의 경력을 보시면 신뢰가 가실 겁니다.”
돈 몇 푼보다 상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상담이 훨씬 잘 먹히는 법이다. 은엽은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여 속 시원한 약속의 말을 들려주었다. 직원은 먹이를 덥석 물었다.
“친자확인검사 하나만 막아주시면 됩니다. 내 조카가 연구소에 갈 겁니다. 간단한 건강검진을 해주겠다고 말해두었어요. 내 조카의 혈액과 의뢰인의 혈액을 바꿔치기해주세요. 절대 친자가 나올 수 없도록. 의뢰인의 이름이 정지헌일 수도 있고 이예나일 수도 있고 이정오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지헌과 세트로 검사를 하는 혈액을 바꿔주시면 됩니다.”
은엽은 이전에 조작했던 검사와 이번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 동일인을 투입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유전자 염기서열 정보가 이전의 결괏값과 같다면 정지헌 또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은엽의 부탁에 따라 직원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혹여나 뜻밖의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른 직원의 과실로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조치까지 완벽하게 해놓았다. 어제오늘, 계속 초조해하며 바쁘게 뛰어다닌 은엽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처음 검사가 잘못되었단 얘길 들었을 땐 해프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 장영미도 검사결과를 신뢰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지헌의 주장을 믿어보려고 노력하겠지. 하지만 두 번째 검사결과 역시 불일치로 나온다면? 그리고 유전자값은 변함없다면? 한 번 잘못되면 의심이지만, 두 번 잘못되면 확신이 되거든. 그럼 이정오는 영락없는 사기꾼이 된다. 일을 무사히 마무리 지은 은엽은 은비의 집을 찾았다. 며칠째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폐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 은비는 오빠를 환영하지 못했다. 무언가 오빠가 반가운 결과물을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뒤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팔자 좋다?”
“오빠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해?”
“그렇다고 회사도 안 나가?”
“언제는 오빠가 가지 말라며! 그리고 거기가 지금 나한테 얼마나 지옥 같은지 알아?”
은비는 은엽에게 앙칼지게 따졌다.
“이직할 거야. 정지헌 만나면 안부나 전해. 네가 내 동생 인생 다 망쳐놨다고.”
쓰게 웃은 은엽이 표정을 굳히고서 말했다.
“잘 들어. 채은비.”
“…….”
“오늘 정지헌이 이예나의 친자확인검사를 할 거고, 결과는 친자 가능성 없음으로 나올 거야.”
“가능성 없음?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은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비는 그 눈빛만으로 오빠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은비는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조작했어?”
“넌 가서 정지헌이랑 장 여사님이나 위로해주면 돼. 모든 걸 다 이해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알겠어?”
은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은비의 눈엔 오빠 또한 정지헌만큼이나 섬뜩했다. 은비는 은엽이 가는 방향이 늪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늪.
“……가끔 보면 나보다도 오빠가 더 정지헌한테 집착하는 것 같아.”
“다 너한테 투자한 게 있으니 그런 거잖아.”
“…….”
“투자한 만큼은 회수를 해야지.”
은엽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후가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