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드디어 만났네2022.03.09.
정오는 약속대로 예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지헌은 함께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정오와 예나만 내려주고는 떠나버렸다. 어제저녁부터 계속 같이 있었는데, 아빠가 옆에 있다가 사라져버리니 예나는 또 새삼 서운해졌다.
“엄마, 아빠는 아이스크림 먹으러 안 와?”
“아빠는 할 일이 있거든. 지금 아빠의 아버지랑 얘기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예나의 할아버지.”
“예나의 할아버지도 있어?”
“응. 신기하지?”
정오의 설레는 이야기에도 예나는 미소 짓지 못했다. 솔직히 떨렸다.
“근데 엄마. 검사결과가 아니라고 나오면 어떡해? 예나가 아빠 딸이 아니라고 나오면? 그럼 할아버지도 예나 할아버지 아니지?”
아이의 걱정에 정오는 예나의 몸을 당겨 끌어안았다. 아이가 여태 불안해하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예나가 아빠 딸이라고 나오는 건, 콩 심은 데 콩이 나오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오는 거랑 똑같은 거야.”
“콩이랑 팥이 안 나올 수도 있잖아.”
“왜 콩이랑 팥이 안 나와? 콩이랑 팥을 심었는데?”
“씨앗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까지 생기려면 물도 있어야 하고 햇빛도 있어야 하고 흙도 좋아야 하고 벌레도 잘 막아야 한댔어. 선생님이.”
“아유. 똑똑한 내 딸.”
그렇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지. 엄청난 관심과 엄청난 사랑이 필요하지. 정오는 흐뭇하게 찬탄하며 예나를 더 꼭 안아주었다. 아이스크림 통을 다 비웠을 때 즈음 정오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예나야, 이제 아빠한테 가자.”
* 지헌은 아버지 재광, 어머니 영미에게도 친자확인검사를 받으러 갔단 사실을 알렸다. 어느 시설을 이용했는지,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까지 알리니 제시간이 되어 부모님이 찾아왔다.
“어머니도 오셨네요.”
영미까지 올 거라 생각하지 못한 지헌이 다가가 알은체했다. 영미는 흥, 세게 콧방귀 뀌었다. 지금처럼 아들이 미웠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들이 미워도 절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검사결과는 영미에게도 중요했다. 아이가 친자라면 친자인 대로, 친자가 아니라면 아닌 대로 큰일이었다.
“그래. 결과는 나왔니?”
“시간이 되었네요. 다녀오겠습니다.”
영미의 물음에 시간을 확인해본 지헌이 저벅저벅 연구소 사무실로 떠났다. 재광의 옆을 지키던 수행비서가 지헌과 함께 떠났다. 조용해진 사이에 영미가 재광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쩐 일이에요?”
집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든 양반이, 아들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아이 때문에 시간을 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 언짢았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재광은 영미의 잔소리가 두려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다행히 지헌이 금방 돌아와 두 사람의 대화도 여기에서 끊겼다.
“결과는?”
영미가 득달같이 다가가 지헌이 손에 든 결과지를 빼앗았다. 결과지에는 이전과 똑같이 ‘친자 가능성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결과를 확인한 영미의 눈이 번뜩였다.
“유전자 불일치로 나왔어요. 친자가 아니라고.”
“이것 봐라. 내가 뭐랬니!”
처음 결과가 잘못됐다 주장했을 때는 가득 의심하면서도 그래도 아들이니 믿어보자 싶었지만 두 번째 결과까지 친자 가능성이 없다고 나오니 분통이 터졌다.
“애랑 애 엄마는 어디 있어! 겁나서 도망간 거 아니야? 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냐고!”
영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헌과 재광은 언짢은 표정이었다. 지헌이 재광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착잡하구나.”
재광의 떨떠름한 반응에 영미는 더욱 기가 막혔다.
“착잡해요? 이게 그저 착잡할 뿐이야? 나는 속이 터져. 지헌이가 그 모녀한테 놀아난 것만 생각하면.”
“지헌이 엄마.”
“널 이용해먹고! 나랑 네 아빠만 이렇게 헛걸음하게 하고! 엄마 이거 그냥 못 넘어간다. 사기죄로 고소할 거야, 이것들.”
“이봐, 여보. 지헌이 엄마!”
흥분한 영미를 다그치느라 재광 또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미가 재광을 바라보았다. 재광이 말했다.
“그건 내 검사였어.”
“뭐, ……뭐?”
“나랑 지헌이의 유전자 검사였다고.”
재광의 고백에 영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나와 지헌이의 친자확인검사가 그렇게 나온 거야. 지헌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나온 거라고.”
“무슨, 그게 무슨…….”
영미는 재광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멍해졌다. 재광이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신 아들이 아니면 얘가 누구 아들인데!”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이정오가 사기꾼이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지. 왜 생사람을 잡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목을 걸어. 내 목을 걸 수 있다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물이 솟구쳤다. 영미는 체면도 내팽개치고 재광에게 따졌다.
“내가 우리 지헌이 나이만큼 당신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래? 뭐? 무슨 검사를 해?”
“그러니까 말이야, 이 사람아.”
재광이 침착하게 영미를 다독였다.
“내가 당신을 못 믿겠나? 내가 지헌이를 의심하겠어?”
“…….”
“당신이 지헌이 말을 믿질 않으니 얘가 이런 검사까지 한 거 아니야.”
재광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영미의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당신이 따로 의뢰한 친자확인검사도, 지금 나랑 지헌이의 친자확인검사도 잘못된 거야. 어떤 놈이 피를 바꿔치기했는지 결과를 조작했는지 하여튼 검사가 오염됐다고.”
“누, 누가?”
“모르지. 이제 샅샅이 뒤져봐야겠지. 어떤 몹쓸 놈이 그랬는지.”
영미의 입이 허탈하게 벌어졌다. 지헌은 그런 영미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채은엽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연구소를 찾았다.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척하면서 여러 정보를 흘렸다. 은엽에게까지 정보가 잘 흘러가도록. 역시나 어떤 루트를 통했는지 몰라도 은엽은 이번에도 검사결과 조작에 성공했다. 이번엔 녀석이 성공하여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자신의 친자검사결과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납득할 테니.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어머니. 영미는 자신을 속인 지헌이 괘씸하다는 듯 노려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두 손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괘념치는 마. 우리 지헌이가 검사를 익명으로 한 번 더 했어. 지헌아, 다른 검사결과는 어떻게 나왔지?”
재광이 지헌에게 물었다. 재광에게는 좀 전보다 더욱 떨리는 순간이었다. 지헌은 추가로 재광의 수행비서에게 검사를 부탁했다. 재광과 지헌과 예나, 세 명의 모발을 가지고 익명으로 친자검사를 의뢰한 것이다. 지헌은 재광의 수행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건네받아 열어보았다.
“이건 제대로 나왔네요.”
이번에도 영미가 결과지를 빼앗아 들었다. 결과지의 첫 페이지에 쓰인 ‘친자 가능성 = 99.999%’라고 굵게 쓰인 글씨에 영미는 헛숨을 짙게 토해냈다. 영미는 억지 부리듯 따졌다.
“이걸, 이걸 믿어? 이 결과 역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래서 3대에 걸친 검사를 했죠. 검사는 아버지의 수행비서님께서 감독하셨고.”
재광의 수행비서는 재광과 20년 이상 함께해온 이였다.
“이 결과지엔 저도 아버지의 친자, 예나도 제 친자라고 나오네요.”
지헌은 허술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의 검사까지 추가하여 결과의 신빙성을 높였다.
“제가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라고 나온 결과지, 제가 아버지의 친자라고 나온 결과지. 어떤 걸 믿으시겠어요, 어머니?”
어딘가에서 채은엽이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채은엽, 너는 두 번째 검사에 올인했겠지. 두 번째 검사에도 친자가 아니란 결과가 나온다면 내가 포기할 거라고 속단했겠지. 너는 간과한 거야. 너만큼이나, 아니, 너보다 내가 훨씬 더 집요하단걸. 네가 나의 친자확인검사 몇 개를 망치든 나는 몇 번이고 새로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이야. 재광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고, 영미는 분을 이기지 못한 얼굴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재광이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지헌아, 다른 쪽은 결과가 나왔다니?”
“나왔네요.”
지헌이 고개를 돌려 연구소 출입문을 바라보고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오와 예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헌을 발견한 예나가 총총총 달려왔다.
“아빠아!”
지헌은 다가온 예나를 단번에 들어 안았다. 뒤이어 쫓아온 정오가 서류봉투에서 결과지를 꺼내 지헌에게 건넸다.
“친자확인검사 결과예요.”
이번에는 다른 기관에서 진행한 예나와 지헌의 피검사 시험성적서였다. 이 역시 같은 결과. - 의뢰인 A(정지헌)님과 의뢰인 B(이예나)님은 생물학적 친자관계임을 99.999% 인정합니다. 지헌은 결과지를 재광에게 넘겨주었다. 영미는 이번엔 차마 결과지를 낚아채지 못하고 흘깃, 곁눈질로 결과를 확인했다. 또렷하게 붉은 글씨로 인쇄된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앞엔 이정오. 7년 만에 마주한 그 아이는 7년 전의 그 순하고 아둔해 보이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바라보는 정오의 모습에 영미는 오금이 저려왔다. 정오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사님.”
“뭐?”
“…….”
“안녕할 것 같니?”
아이를 만들어와서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7년 내내 입도 벙긋 안 하다가 이제 와서? 내 아들이 결혼 적령기에 이른 지금에 와서? 손톱이 피부 속을 파고들만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영미는 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건물을 떠났다. 이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재광이 사과했다.
“실례를 했네. 우리 집사람이 조금 예민해요.”
정오는 동요하지 않은 표정으로 재광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편히 불러요.”
“…….”
“드디어 만났네.”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네. 재광이 악수를 청했다. 정오는 머뭇거리다가 재광이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재광의 미소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정지헌은 어머니보단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구나.
“그동안 힘든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재광은 짧게 사과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오를 향해 오래 시선이 머물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간 재광이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제 아빠에게 안겨 제 아빠만 보느라 할아버지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아이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안녕. 예나야. 할아버지다!”
재광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예나가 고개를 돌려 재광을 바라보았다. 지헌이 안고 있던 예나를 내려놓았다. 재광은 무릎을 굽혀 예나와 눈을 맞추며 예나의 손을 고이 잡았다.
“할아버지야. 내가 너의 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