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우주라도 구하셨나2022.03.26.
지헌의 살벌한 눈빛과 맞선 수인 엄마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재인아, 수인아, 집에 가자.”
끝내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더 이상 우리 애들 이 학원 못 보내요. 학원비 돌려주세요.”
대신 학원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되었다.
“선생님, 우리 재인이 바둑 대회 준비했던 거 아시죠? 바둑 대회에서 수상하면 학원 홍보도 많이 될 텐데, 안타깝네요. 이런 식으로 장사하시면 학원 문 닫을 수도 있어요.”
양손으로 재인과 수인의 손을 꽉 잡은 수인 엄마는 끝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아름답지 않은 퇴장이었다. 원장도 굳이 수인의 엄마를 붙잡아보려 애쓰진 않았다.
“결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수인의 엄마가 떠난 후, 지헌이 원장에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인의 엄마는 오래전부터 재인을 특별지도 해주지 않으면 경쟁 학원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인물이었다. 그들이 떠나니 원장도 한편으로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진서가 학원에 도착했다. 진서는 지헌을 알아보고서 밝게 환영했다.
“오늘은 지헌 씨가 예나 데리러 오셨네요!”
“네. 안녕하십니까.”
진서에게 공손하게 화답한 지헌은 학원 선생님들에게도 인사하고 예나, 도빈과 함께 학원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며 도빈이 진서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엄마, 오늘 홍수인이라는 애 엄마랑 바둑 삼촌이랑 싸웠다. 근데 바둑 삼촌이 예나 아빠라고 했어.”
“도빈아. 바둑 삼촌이 예나 아빠 맞아.”
진서가 도빈에게 말해주었다. 도빈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왜?”
“왜가 어디 있어. 예나 아빠니까 예나 아빠지.”
“왜?”
예나와 지헌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도빈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예나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빠를 잃어버렸었는데 찾은 거야.”
“우와! 진짜?”
“응. 우리는 피에 똑같은 지도도 있어. 그렇지, 아빠.”
“왜애?”
예나가 고개를 바짝 들고 지헌에게 말을 거는 사이에도 도빈은 불쑥 끼어들었다. ‘왜’의 굴레에 갇혀버린 도빈에게 예나가 정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도빈아, 우리 아빠가 우리 아빠인 건 콩 심은 데에서 콩이 나오고 팥 심은 데에서 팥이 나오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게 뭐야? 바둑 삼촌을 콩처럼 심었다는 뜻이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도빈이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도빈을 납득시키는 데는 시간이 오래 필요할 것 같았다.
*
- 오늘 탈모예방 샴푸 회의 이후에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오가 보낸 문자메시지에 제작 2팀의 성미란 팀장, 박영광 차장은 회의실에 남게 되었다. 이윽고 고은주 대리도 회의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정오가 소집한 자리인데 정오는 회의 직후 급하게 사라져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미란이 은주에게 물었다.
“이정오 대리는?”
“기훈 씨 부르러 갔어요.”
“이정오 대리가 말할 게 있다면서. 대체 뭘까?”
팀원들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 미란은 목소리를 일부러 밝게 하며 물었다. 은주가 뚱하게 대답했다.
“팀장님도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팀장님 촉이 제일 좋잖아요.”
아, 고은주 대리도 눈치채고 있었구나. 미란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는 척해줘야 말하는 사람도 말할 맛이 나지 않겠어?”
“꼭 말할 맛 나게 해줘야 할까요? 기훈 씨가 저렇게 다 죽어가는데?”
“그래도 축하할 것은 축하해야 하지 않겠어?”
“몹시 싫습니다.”
미란이 분위기를 붕 띄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은주는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커플이라고 도장 쾅 찍고 인정받는 분위기 싫습니다. 저는 정지헌 이사 너무 싫고, 솔직히 이 대리님한테 붙지 말았으면 좋겠고, 우리 프레시한 기훈 씨랑 이 대리님이랑 잘되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네요.”
“그래도 안 되지.”
미란이 열 받은 은주의 눈치를 보며 반박했다.
“온 세상 커플들이 다 헤어져도 그쪽은 건드리면 안 돼.”
“아니 팀장님, 대체 누구 편이세요?”
은주는 열변을 토했다. 남 일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은주 대리가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천사 같은 이정오 대리가 그 사이코한테 넘어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우리 똘똘하고 일 잘하는 송기훈 씨가 저렇게 식음을 전폐하는데 팀장님은 화나지도 않으세요?”
그렇다고 우리가 천륜을 막을 수는 없지. 미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은주의 험한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정오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기훈 씨는?”
“……먼저 퇴근했어요.”
미란의 질문에 정오가 면목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은주는 고개를 돌려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처럼 정오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정오가 입을 열었다.
“다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긴히 미팅을 청한 건요…….”
“다 알고 있습니다. 대리님.”
은주는 정오가 말문을 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툭 끊어냈다. 은주의 차가운 대답에 정오의 눈이 잠시 멀뚱해졌다.
“어, 어떻게요?”
“다들 눈치가 있으니까요.”
“……그럼 제 딸이 정지헌 이사님의 친딸이라는 것도 알고 계세요?”
이번엔 은주의 눈이 멍해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다. 박영광 차장은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아, 그건 모르셨구나. 제가 말씀드리려던 건 그거였어요.”
“잠깐, 잠깐, 잠깐. 뭐, 뭐, 뭐라고요?”
심장에 한기가 찾아왔다. 손끝, 발끝까지 다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니 뭐라고? 이정오 대리의 딸이 누구 딸이라고?
“누가 누구 딸이라고요?”
은주는 제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은주는 예나 사진을 보았다. 공주는 공주를 알아보는 법. 예나의 예쁨과 사랑스러움에 은주는 예나에게서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예나는 고귀한 것에서 태어난 고귀한 존재여야 했다. 그런데, 누구 친딸이라고? 수양딸도 아니고 친딸? 은주와 영광이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상태에도 미란의 표정만은 덤덤했다. 은주는 배신당한 것만 같은 기분으로 미란을 쳐다보며 따져 물었다.
“아까 팀장님 말씀이 그런 뜻이었어요?”
“팀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정오 역시 미란의 반응이 의외라 여기어 물었다. 미란이 머쓱하게 끄덕였다.
“언젠가 이 대리가 얘기한 적 있었잖아. 정 이사님 사고 나기 이전에 알고 지냈다고…….”
사실 정지헌과 이정오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성미란 팀장이었다. 미란은 아주 오래전에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 그래서 그동안 정오를 멍하니 바라보는 날이 많았던 것이었다. 눈치는 챘지만 믿을 수가 없어서, 물어보고 싶어 입이 간지러워서.
“이사님 사고가 7년 전이고 아이가 일곱 살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렇다고 확신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마 물어볼 수 없어서 답답했는데, 오늘 그 비밀을 알게 되어 솔직히 속이 시원한 미란이었다. 흥분한 은주가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동안 영광이 물었다.
“기훈 씨한테도 말한 거야?”
“네.”
“반응이 어땠어?”
“……멍하게 눈 깜빡거리다가 떠났어요.”
“처음부터 기훈 씨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네. 그래서 기훈 씨가 충격받아서 떠났구나.”
두 사람의 교제 소식에, 애 소식까지 들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일 것이다.
“박 차장, 기훈 씨 좀 달래봐.”
“그래야겠네요.”
미란의 당부에 박영광 차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주가 따라나섰다. 미란은 바짝 쫄아 있는 정오를 다독였다.
“이 대리, 걱정 마. 기훈 씨는 천성이 밝은 사람이라 내일이면 또 훅훅 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출근할 거야. 지금은 머리가 좀 멍해서 그래.”
“네. 저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은주는 영광의 바로 옆에 붙어가며 조잘거렸다.
“차장님은 이사님이랑 해외 출장도 다녀오셔놓고 그것도 모르셨어요?”
“그러게 말이야. 아무것도 몰랐어. 무슨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있지?”
“흐아. 내가 이 대리님한테 정 이사님 험담을 그렇게 했는데!”
은주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포효했다.
“진실을 알게 되니 미웠던 사람이 더 미워지네요.”
될 놈은 된다. 이 사실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이 세상에 착한 신은 없나 봐요. 그자는 그 성질머리에 대체 뭘 어떻게 타고나서 이정오 대리로도 모자라 그렇게 예쁜 딸까지 얻은 거죠?”
“…….”
“우주라도 구하셨나.”
은주는 앞으로 지헌을 더욱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 팀원들은 기훈을 달래러 갔고, 오랜만에 사무실엔 정오 혼자 남았다. 엄청난 난리통이었고 그 여파가 오래 갈 것 같기도 하지만 팀원들에게 모두 털어놓고 나니 정오 역시 후련했다. 지금은 이토록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마음 착한 팀원들은 계속 정오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정지헌 씨도 좋아하겠네. 내가 다 털어놓았으니.’
사고는 네가 쳤는데 왜 내가 수습을 해야 하니? 그 사실이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저만치서 자신을 바라보는 지헌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예나를 식당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헌이 집무실로 떠나는 것을 본 정오는 졸래졸래 그 뒤를 쫓아갔다. 지헌도 정오가 쫓아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집무실의 문을 열어두었다. 집무실 안, 문 앞에서 지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지헌이 그녀를 더 끌어갔다. 지헌의 품에 안겨, 정오는 등 뒤에서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낮에는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 일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마음이 풀렸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완벽한 타인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갖춰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중의 하나는 화가 나도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와 다른 당신을 이해하는 것. 앞으로도 무수히 생겨날 갈등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차근차근 해결하고 돌아와 서로를 안아주어야겠지. 팀원들한테 다 얘기했어. 이제 만족해? 너른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해주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랑해.”
녹진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는데도 정오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편안했던 호흡을 멈추었다. 눈동자 위로 빠르게 투명한 구슬이 부풀어 올랐다. 그 반응에 반 발짝 물러나 고개를 내린 지헌이 물었다.
“뭐야,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
“네가 울린 거잖아, 지금!”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갑자기, 뜬금없이,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없이. 주간보고 하듯이, 예나한테 아침인사 하듯이, 이렇게 고백을 내어놓으면 어쩌라는 건데!
“뭐야, 갑자기!”
왜 당신은 이제 와서 내게!
“왜 평생 안 하던 말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느냐고!”
왜 아무런 기색도 없이 그런 말을 해. 이렇게 쉽게. 이렇게 쉽게 말할 걸 왜 이제껏 말하지 않은 건데!
“갑자기 생각나잖아.”
“…….”
“그 말을 아껴서 후회했던 게.”
그가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왜! 너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그의 가슴을 툭툭 때리며 정오의 한스런 분풀이가 이어졌다.
“그 말을! 아껴가지고! 7년이나! 7년이나!”
사랑아. 너 왜 이제 왔느냐고. 7년 전, 그 말 한마디가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그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 그녀 또한 그를 놓았다.
“오빠가 그 말을 안 해서 난 버려졌다고 생각한 거란 말이야.”
당신이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무친 원망이 울컥울컥 이어졌지만 어느새 그녀는 다시 지헌에게 붙들려 부둥부둥 안겨 있었다. 그 또한 웃음으로 무마하지 않는 아픈 호흡을 하고 있었다. 결국 지헌을 때리던 정오의 손바닥도 그의 너른 등에 고이 안착했다.
“앞으로는 자주 해. 주 1회 이상. 알겠어?”
“주 1회 가지고 되겠어?”
“주 1회라도 제대로 하란 말이야.”
정오의 투정에 그제야 지헌이 피익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 아빠가 생긴 후에도 예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학원이 끝나면 할머니의 식당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일과. 왠지 식당에 손님이 별로 없었던 하루였지만 할머니도 손녀딸도 크게 근심하지는 않았다. 올 들어 가장 흐뭇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국순은 이마저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일찍 장사를 마무리했다.
“우리 강아지, 집에 가자!”
집에 가자는 말에 예나는 정말로 강아지처럼 졸랑졸랑 쫓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할머니한테 오늘 학원에서 아빠가 얼마나 멋졌는지 얘기해야지. 집에 가서는 인형 머리를 묶어줘야지, 어제 얼려둔 젤리를 꺼내먹어야지, 도빈이한테 받은 판박이 스티커를 붙이고 자야지, 국순이 문단속을 하는 순간에도 이것저것 할 일들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할머니, 빨리 좀 해. 이러다가 아침이 되겠어.”
“아유. 알았어. 우리 집 대장님.”
손녀의 잔소리를 듣는 동안에도 국순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나만큼이나 국순 또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선 순간, 국순의 미소는 툭 하고 풀려 버렸다. 작은 카메라를 든 여자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국순의 허락 없이 ‘국순백반’ 외관을 찍고 있었다.
“여기가 그, 쓰레기 찌개 끓인 식당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