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엄마의 인생2022.03.30.
지헌은 정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주 오래전 지헌도 어렴풋하게만 떠오르는 바둑영재반 때의 이야기.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머니는 그랬어. 아무렇지도 않게 간섭이나 구속을 하면서 사랑이란 말을 끼워 넣으셨어.”
사랑해 아들. 이게 다 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그저 이용의 수단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줄곧 해온 어머니 곁에선 그의 사랑도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압박이었고 무거웠고 때론 너무나 가식적이라 하찮았다. 그랬던 자신이 이정오에게만은 그 말을 해주지 못해 후회하고 있었다. 아마도 7년 전 그녀를 만나 그가 알고 있던 사랑의 형태도 변했을 것이다. 정말로 사랑이 사랑다워지고 있었는데, 그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리.
“그래서 나는 이 말을 하는 게 사실 너무 오글거려.”
“…….”
“그래도, 사랑해.”
이제 많이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7년 만에 모든 의문이 풀린 정오도 눈물을 쓱 닦고는 지헌을 안아주었다. 국순에게 문제가 생겼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일을 정리할 무렵이었다. 국순의 연락을 받고 지헌과 함께 급히 귀가한 정오는 동영상 사이트를 뒤져 문제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국순 백반에 관한 내용은 짧았다. BJ의 식당 탐방 동영상 맨 끄트머리에 국순의 식당이 나왔다. BJ는 백반 3인분을 시켰고, BJ가 찌개를 훑다가 한 숟가락 떴을 때 쓰레기 조각이 나왔다. 기다란 커피믹스 포장의 반절이었다. 쓰레기를 발견한 두 명의 일행이 조용히 경악하는 것으로 동영상이 끝났다. 동영상을 확인한 국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난 저 커피는 마신 적이 없는데…….”
정오는 문제의 동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BJ의 맞은편에 앉은 지인은 분명히 채은비였다. 채은비가 국순백반에 와서 백반 3인분을 시키고 한 술도 뜨지 않고 떠난 그날. 예나에게 5만 원을 쥐여준 그날이었다. 동영상을 확인한 정오는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그거구나.”
“전말을 알아?”
지헌이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들은 아니지. 우리 식당 CCTV에 녹화돼 있어.”
정오는 따로 저장한 CCTV 동영상을 찾아 지헌과 국순에게 보여주었다. 은비가 국순백반을 찾아온 그날, 정오는 뒤늦게 홀로 식당을 정리하며 CCTV 동영상을 확인했다. 음식이 나온 후 세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찌개에 넣고는 휘저었다. 이것들이 대체 뭘 하는 걸까 정오도 궁금했는데, 가방의 쓰레기를 던져넣은 것이었다. 지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메라가 있는 걸 몰랐나? CCTV 설치했다는 안내판도 붙어 있잖아. 왜 그랬지?”
“세 사람 시선을 봐봐. 카메라를 하나밖에 못 찾은 거야.”
정오는 동영상에 드러난 또 다른 카메라를 가리켰다. 정말로 세 사람의 시선은 흘깃흘깃 반대편 카메라로 향했고 범행을 저지를 땐 아예 그편의 카메라를 등으로 막아섰다. 그 카메라 쪽에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쪽의 카메라만 조심한 덕분에 그 맞은편 카메라에는 이들의 범행이 더욱 제대로 담겼다.
“이런 건 되도록 빨리 수습하는 게 좋아.”
지헌의 의견에 따라 정오는 재빨리 동영상 사이트에 계정을 만들었다. 10만 명 정도의 구독자를 가진 BJ의 동영상을 시청한 사람은 벌써 15만 명을 넘어섰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잘못된 동영상을 감상한 시청자는 더욱 늘어날 터였다. 정오가 박영광 차장에게 연락했다. 정오는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영광은 회사 근처에서 기훈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급히 회사로 달려왔다. 지헌도 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헌과 영광은 CCTV 녹화본을 문제의 동영상과 비교해볼 수 있도록 편집했고 정오가 입장문을 만들었다. 지헌은 입장문에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문구를 추가했다. 편집 작업을 하는 사이에도 문제의 동영상 시청자는 계속 늘어갔다. 뿐만 아니라 문제의 동영상을 확인한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2차 영상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국순백반의 이름을 찾아낸 강성 구독자들이 댓글에 국순백반의 주소를 올려놓았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일 아침이면 싹 다 정리돼 있을 거야.”
정오는 몸을 부르르 떠는 국순을 진정시키고 자정 무렵 동영상과 입장문을 게시했다. 그리고 편집한 동영상 게시물의 주소를 BJ의 동영상 채널 댓글에도 남겨 놓았다. 정오는 밤새 BJ의 채널과 자신의 채널을 모니터링했다. 정오의 동영상이 게시된 지 약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동영상 시청 수가 올라갔다. BJ도 CCTV 녹화분의 존재를 파악했는지, 제 채널에 등록된 정오의 댓글을 삭제해버렸다. 하지만 다른 구독자가 정오의 채널 주소를 다시 올렸고 정오의 동영상도 서서히 퍼져나갔다. 몇 시간 지나니 BJ의 채널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BJ를 겨냥한 독한 댓글들도 줄줄이 이어졌다. - 식당주인이 CCTV 동영상 올렸네요. 근데 여기 올린 동영상과 상당히 달라요. 진실을 밝혀주세요. - 이거 조작이에요. 다들 CCTV 동영상 좀 확인해보고 오세요. - 어그로 끌려고 동영상 조작했나 보네. 미쳤다. 미쳤다. - 이 사기꾼은 대체 뭐지? CCTV 없었으면 멀쩡한 식당 하나 망할 뻔했잖아. 결국 BJ는 구독자들의 강한 질타를 받고 문제의 동영상을 삭제했다. 정오가 CCTV 동영상을 게시한 지 4시간 만에 정리되었다.
* 이윽고 평화로운 아침.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터라 정오는 몸이 노곤했다. 회사 의자에 기대어 느른하게 앉아 졸고 있는 사이에 출근한 기훈이 말을 걸었다.
“대리님.”
“어어. 기훈 씨.”
“괜찮으세요?”
어제는 그토록 나라 잃은 표정이더니, 오늘은 쌩쌩한 얼굴로 나타나 정오의 안부까지 물었다. 밤사이에 기훈은 모두 극복한 듯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응. 괜찮아.”
“저도 그 동영상 확인했어요. 오늘 아침에 다시 확인하려니까 사라졌던데, 그 미친놈이 알아서 정리한 거죠?”
“응. 그 동영상은 정리됐는데, 이후로 2차 편집본들이 생겨서 하나하나 접촉해보고 있어. 게시물 내려주는 사람도 있고 사과글 올리는 사람도 있는데 제일 많은 건 우리 CCTV 영상까지 편집해서 올리는 사람들이야.”
“일이 커지겠네요.”
“나야 괜찮은데 엄마가 걱정이야.”
정오의 대답에 기훈은 제 일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정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훈 씨는 컨디션 괜찮아?”
“아, 저야 뭐.”
정오의 질문에 기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대리님 사연은 정말 해외토픽감이에요.”
“일찍 말 못 해서 미안해. 기훈 씨.”
“아니에요. 너무 놀라워서 머리가 멍했는데 밤사이에 괜찮아졌어요.”
“…….”
“사실 밤에 회사에 다시 들렀었거든요. 차장님이랑 이사님이랑 그 CCTV 동영상 편집하는 거 지켜봤는데, 이사님 눈빛에 압도됐어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자의 눈빛. 그걸 확인한 순간 기훈은 깨달았다.
“이사님 좋은 분 맞는 것 같아요.”
자신은 절대 정지헌을 이길 수 없을 거란걸. * 비교적 큰 사고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정오는 어김 없이 야근을 하고 밤 9시경 퇴근했다. 예나에게 할머니가 오늘도 식당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일찍 예나가 잠든 밤. 국순의 방에 찾아들어 간 정오가 국순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좀 쉬지 그랬어.”
“오늘은 일 안 했어. 그냥 정리하러 간 거야.”
“…….”
“가게 내놨어.”
국순의 대답에 정오의 심장이 철렁했다.
“……왜?”
“왜긴 왜야. 이제 그럴 때가 됐다 싶은 거지.”
나 때문에 또, 채은비 때문에 또 우리 엄마가 희생하는구나 생각하니 울컥 설움이 밀려왔다. 정오는 눈물을 참고서 국순을 설득했다.
“그 동영상 때문에 그래? 엄마, 그건 이제 다 수습됐어. 괜찮을 거야.”
그런데 국순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미소를 머금고서 바라보았다.
“너는 엄마가 계속 일하는 게 좋아?”
“…….”
“그게 좋다면 계속하고.”
엄마의 물음에 정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머리를 한 대 툭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일하는 게 좋아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오에게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살라고 가르친 엄마였다. 자신이 일을 좋아하기에 엄마도 그럴 거라고 속단했다. 딸의 속 좁은 생각이었다. 정오는 투정 부리듯 따졌다.
“내 의견을 왜 물어. 엄마가 좋은 게 먼저지.”
“엄마는 항상 네 의견이 제일 중요해.”
“…….”
“널 키우려고,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와서는 우리 예나를 키우려고 시작한 일이었어. 그런데 이제 예나 아빠도 만났으니 나도 정리해야지.”
며칠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이의 아빠를 찾고, 재벌가의 자제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손녀딸이 쓰러지고, 자신은 뜬금없는 모함에 몰리고.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국순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계속 식당일을 고집하는 건 답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으로 딸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장 한편의 식당에서 이런저런 구설에 올라 딸을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젊었을 적에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 옛날에는 요리 잘하는 게 별것도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요리연구가, 요리 전문 BJ, 뭐 그런 직업도 있더라. 엄마 나이 또래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요리 멋있게 하고 사람들이 감탄하고 그러는 거 보면 나도 너무 부럽고 좋아 보이고 그래.”
“…….”
“엄마가 지금 시작해서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 딸은, 엄마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엄마한테는 그게 제일 필요하니까.”
오래 고민하여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지금은 그저 말뿐이지만, 이 인생의 변곡점이 어쩌면 자신을 더 큰 행복의 길로 이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예나 맨날 식당으로 출퇴근하는 게 안쓰럽고 미안했는데 좋지 뭐. 이제 집에서 밥 해 먹여가면서 예나 봐줄게.”
“아니야. 엄마.”
“…….”
“내가 잘못했어. 예나 신경 안 써도 돼. 엄마 인생을 살아야지.”
엄마는 시종일관 미소 지으며 얘기했는데,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또 이 아일 울렸다는 생각에 국순의 가슴 안쪽에도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내가 나만 생각했어. 평생 나만 호강하고 살았는데. 이제라도 엄마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우고 유학도 가고.”
“…….”
“좋은 남자 있으면 연애도 하고, 나도 소개시켜주고, 결혼도 하고. 엄마도 그래야지.”
“좋은 얘기 하면서 왜 울어.”
으으흑. 국순은 제 무릎 앞에 엎드려 그녀의 바짓자락에 눈물을 닦는 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가 엄마를 어디 멀리 보내고 싶어도 엄마는 이제 멀리 못 가. 네 안에 엄마 인생이 다 들어있어서.”
이윽고 허리를 굽힌 국순은 더 길게 손을 뻗어 정오의 엉덩이를 퉁퉁 두들겼다. 젊었을 적, 자신이 딱 지금의 정오만 했을 때, 한없이 사랑스러웠던 어린아이 정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이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너를 키우며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너를 통해 언제나 살아갈 힘을 얻었지. 사랑해. 사랑한다. 나의 예쁜 딸. 귀한 너에게 주기에 내 사랑은 너무나 볼품없지만, 그래도 너무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