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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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폭로
2022.04.09.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은비는 계속 궁리했다.
조작 방송으로 위기에 몰린 BJ 친구가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정지헌을 바람난 남자, 이정오를 그 내연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국순백반을 방문하기 전 연극을 도모하기 위해 은비가 하소연하며 풀어놓았던 이야기가 발목을 잡았다.
이후 BJ는 은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제대로 진실을 밝혀서 이정오를 박살내고 우리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주장이었다. 은비 또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고심하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정지헌이었다.
폭로전의 순기능을 깨달았다. 결근하여 집에 있는 동안 연락 한번 없었던, 제작 1팀 팀원들에게조차 그녀의 안부 한번 물어보지 않았던 정지헌이 직접 연락을 해온 것이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듣는 정지헌의 목소리. 그 담담한 목소리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오빠를 정말로 좋아했었어.
지금도 그래. 오빠가 이정오를 포기하고 내게 온다면 받아줄 각오도 되어 있어. 오빠가 이예나를 데려온다면 이예나까지도 키워줄 수 있어. 오빠의 부모님한테도 헌신할 수 있어.
하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은비는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게. 무슨 일이야?”
[본부의 직원이 무단결근을 한 지 오래돼서 연락했지.]
“…….”
[회사는 다시 안 나올 거야?]
“오빠는 그런 말이 쉽게 나와? 내가 어떻게 거길 다니겠어.”
[어쨌든 정리는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절대 나를 붙잡지 않는구나. 가혹한 용건에 속이 쓰렸다.
[내일은 나와. 네가 연락 없이 결근을 하는 바람에 제작 1팀이 계속 힘들어하고 있어.]
“……그거 말고 할 말 없어?”
[어쨌든 나와. 일은 제대로 정리해야지.]
“…….”
[내일 얘기하자.]
그녀의 질문을 회피한 그가 곧장 용건을 정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묘하게도 무정하면서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또다시 흔들리고야 말지만 이제 그녀 또한 알고 있다. 정지헌을 포기해야 한다. 10년 이상 좋아했던, 4년 이상 공을 들였던 정지헌을.
내가 그토록 원했던 정지헌의 옆에 이정오가 서 있는 상상을 하니 속에선 또다시 천불이 올라왔다.
은비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지금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내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남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다.
남자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정 이사가 내일 회사에 나오래. 나와서 제대로 일 정리하래.”
은비는 어리광부리듯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남자에게 털어놓았다. 남자가 물었다.
[그럼 그대로 다 정리하고 물러날 거야?]
“나야 버티고 싶지. 그런데 어떡해. 방법이 없잖아. 나는 약자라고.”
[그래도 자기한테는 아직 무기가 있잖아.]
“…….”
[정 이사의 연인이었다는 무기.]
남자의 대답에 은비의 머릿속이 맑게 깨었다. BJ도 제 채널에 은비를 피해자라고 설명했다. 아직 회사 사람들은 지헌과 자신이 연인 사이였다가 헤어졌다고 알고 있었다. 정말로, 이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치정 싸움은 선제공격이 중요해. 누가 피해자의 자리를 선점하느냐가 관건이야.]
그렇지. 이대로 곱게 떠나줄 순 없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이정오 또한 정지헌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정오가 망가져야 한다. 수치를 안겨야 한다.
BJ가 한 것처럼 나도 터트려버릴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결심한 은비의 눈이 날렵하게 빛났다.
“그래. 폭탄을 터트려버리겠어.”
*
다음 날. 지헌의 부탁대로 은비는 오랜만에 출근했다.
역시나 은비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연락 없는 부재로 같은 팀을 너무나 고생시킨 탓이었다. 조유리 대리까지도 은비를 언짢게 바라보았다.
“편하셨나 봐요. 살이 좀 오르셨네요.”
그간 계속 집에서만 지냈더니 몸도 퍼지고 할 일이 없어 계속 잠만 잤던 건 사실이다. 가시가 돋친 유리의 말에 은비는 다른 변명을 했다.
“몸이 부은 거야. 조 대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몸이 안 좋거든.”
은비는 품위 있게 사과했다.
“퇴사할 거야. 이렇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나도 억울하고 속상하다.”
그리고 은근슬쩍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자리를 정리한 은비는 안찬섭 팀장에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안 팀장도 은비를 붙잡는 일 없이 결재서류를 만들었다.
“직접 이사님 사인받아서 제출하면 돼.”
내 젊음을 다 바친 회사에서의 마지막이 이런 거라니.
안 팀장의 결재 파일을 받아든 은비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이정오가 보였다.
이정오는 자신이 짐을 챙기고 퇴사 절차를 밟는 동안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제 일에 열심이었다. 간간이 팀원들과 미소를 머금고 얘기하며.
두고 봐. 한 시간 뒤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지.
은비는 속으로 비웃어주고는 지헌을 찾아갔다. 아무 말 없이 결재서류를 내밀자 지헌은 서류를 쓰윽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 이래서 아쉽네.”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안타깝다는 뜻. 하지만 은비의 귀에는 ‘아쉽네’라는 말만 깊이 박혔다. 감정이 여울졌다.
당신의 본가를 드나들며 나도 추억을 많이 쌓았는데. 나는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었는데.
자신과 함께 하는 편한 길을 두고 마녀 같은 이정오에게 홀려버린 지헌을 구해주고도 싶었다.
“오빠는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이정오가 애가 있다는 구실로 오빠 발목을 잡은 거라고!”
은비는 진심을 담아 지헌을 설득했다. 마지막 호소였다.
“이건 다 이정오의 계략이야. 7년 전에 오빠의 아이를 임신해놓고 왜 감췄겠어. 오빠가 원했던 애가 아니었던 거지. 이정오는 몰래 애를 낳아서 나중에 재산이나 상속받을 속셈으로 애를 키운 거라고. 그러고선 지금 찾아온 거야. 오빠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확신하니까! 모르겠어?”
“채은비. 그게 아니야.”
그러나, 그에겐 아무것도 통하질 않았다. 먹먹하도록 점잖은 목소리가 은비의 말을 잘라냈다.
“내가 정오를 찾아낸 거야.”
“…….”
“내 기억이 떠오른 거라고.”
은비의 두 눈동자가 요동쳤다.
“정오는 아무것도 먼저 말해준 게 없어. 오히려 우리의 가짜 연애를 오해해서 더 조심했어. 그랬던 사람을 내가 붙들었던 거야.”
지헌은 계속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헌이 처음으로 들려주는 두 사람의 사연이었다.
“나는 정오한테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어. 그 아이가 내 아이인 줄은 더더욱 알 수 없었고. 거기다가 회사에서 정오한테 아이가 있단 사실을 폭로했던 사람은 너야. 기억하지?”
지헌의 지적에 은비는 눈물을 삼켰다.
“인수인계 잘하고. 컴퓨터 자료정리도 잘하고.”
“…….”
“수고했어.”
말을 마친 지헌이 반듯하게 사인을 한 서류를 은비에게 건넸다.
이제 와 그녀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주는 듯 친절한 눈길이었다. 더 이상 은비를 시리도록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점잖고 차분한 압박이 은비의 가슴을 더욱 옥죄었다.
서류를 가지고 집무실에서 나오는 길에 안찬섭 팀장과 다시 마주쳤다.
“채 과장, 떠나기 전에 담당 자료들 좀 넘겨줘. 기획팀 담당 별로 이메일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인수인계 담당자 확인해서 하나하나 일러둘 말들 일러두고.”
“지금, 오늘 떠나는 사람한테 일을 시키시는 거예요?”
“나도 편하게 보내주고 싶지. 그런데 어쩌겠나. 채 과장이 없는 동안 일에 구멍이 많이 났어. 인수인계를 똑바로 해야 다음 사람이 고생 안 하지.”
은비는 더 실랑이를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래. 오늘은 확실한 피해자가 되어주지.
자리에 앉아 PC를 켰다. 바탕화면에부터 파일이 주욱 쌓여 있었다. 정리를 하려니 오늘 밤을 새워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건별로 인수인계 담당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라니. 회사를 떠나는 마당에 귀찮은 일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은비는 회사 공용폴더에 아예 본인의 PC를 연결해버리고 보내는 메일에 다운로드링크를 삽입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글을 덧붙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정든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애사심이 컸던 만큼 상심도 큽니다. 동료 여러분들께는 저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일일이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자리 정리하면서 아끼던 물품들을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오후 3시에 떠날 예정이니 그전에 자리로 찾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호기심을 부르는 깔끔한 글. 피해자의 입장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착한 글 한 편이 만들어졌다.
이제 알아서들 하시길.
전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른 은비는 가뿐한 마음으로 결재서류를 들고 인사팀을 찾았다. 인사팀에 서류를 접수하고 다시 돌아와 보니, 제작 1팀 주변이 어수선했다.
담당을 맡았던 브랜드들의 인수인계 담당자뿐 아니라 회사생활 내내 별로 친하지 않았던 직원들까지도 모여 있었다. 아끼던 물품을 나눠준다고 하니 좋다고 모인 모양이었다.
‘거지 같은 것들. 이렇게 공짜는 좋아한다니까.’
은비는 속으로 비웃었다. 어쨌든 마지막은 좋은 무대가 될 것 같았다.
“채 과장, 회사 그만둔다며.”
기획팀 팀장이 안타깝다는 듯 먼저 말을 붙였다.
기획팀 팀장 뒤편에서 조시내 대리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과장님. 과장님이 왜…… 과장님이 왜 떠나세요…….”
팀에서 쫓겨난 후에도 자신에게 충성을 보여주는 조시내 대리의 지고지순함에 은비는 진심으로 눈물이 났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은비는 시내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떠나고 싶지 않았어. 계속 내 자리 지키고 싶었어. 조 대리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애사심이 깊었는지…….”
“채은비 과장,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기에…….”
은비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기획팀 부장이 다가와 물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시내 대리가 덩달아 억울해하며 버럭 소리쳤다.
“채 과장님이 왜 그만두는지 모르세요? 자기랑 결혼까지 앞두고 있던 남자가 딴 여자랑 바람이 났는데 어떻게 회사를 다녀요. 그것도 그 여자가 같은 회사에서 활보하고 다니는데!”
이제 곧 조시내 대리도 딴 회사로 떠날 몸이라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은비는 속으로 신이 났다.
그래. 조시내 대리. 더 해. 더 해서 이정오의 이름까지 밝혀줘!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님한테…… 딴 여자가 있어서 채 과장이 헤어진 거라고?”
“모르셨어요? 그 내연녀가 채 과장님 일도 다 빼앗고…….”
조시내 대리가 정오의 자리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가는 사이에, 제작 2팀 송기훈이 불쑥 일어났다.
“채 과장님. 이 자료 뭐예요?”
흐름이 뚝 끊겼다. 은비가 기훈을 노려보았다.
“뭐가요?”
“다운로드 링크 보낸 파일들 중에 이상한 게 있는데요.”
“파일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점검을 하지는 못했어요. 알아서 걸러서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송기훈 씨.”
“아니, 이거 정말 이상한데. 녹음파일인데요, 확인 안 해보셨어요?”
기훈은 제 노트북을 파티션 위로 들어 올려 은비에게 보여주었다. 메일의 다운로드링크를 타고 들어간 폴더엔 ‘정지헌0604’라는 제목의 파일이 있었다. 녹음파일이었다. 기훈이 파일을 클릭했다.
[내가 부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네가 좋아서 한 일을 가지고 왜 내 핑계를 대지? 난 너한테 바란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사귀기로 한 거잖아! 그게 약속이라고! 사귀기로 했으면 그렇게 노력하는 거라고! 그래서 난 이만큼 노력했는데!]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한 은비가 경악했다. 지헌과 자신의 목소리였다.
오래전, 지헌의 집무실에서 싸우듯 나누었던 대화. 정지헌이 두 사람 사이의 가짜 연애를 못박아버린 그 대화.
이게 대체…… 어떻게!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이게…… 왜…….”
은비가 굳어 있는 동안에도 기훈의 컴퓨터에서 적나라한 진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은비. 사귀기로 한 건 4년 전의 소문을 무마하려던 것뿐이었어. 너도 그렇게 얘기했었잖아. 기억나지? 그 이후엔 네가 정리했어야 했어. 헛소문을 만들 게 아니라.]
[…….]
[이제 그만해. 일주일 안에 정리해. 지금까지의 네 허세, 네 허언, 다 눈감아줄 테니까.]
나의 무기. 내가 정지헌의 연인이었다는 무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느새 은비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변해 있었다. 그녀를 조금이나마 안타깝게 바라보던 사람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은주 대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은비에게 물었다.
“과장님…… 언제 이런 걸 녹음하셨어요?”
“내가…… 내가 한 게, 내가 한 게 아니야! 정지헌 이사가 녹음한 거잖아요!”
“아, 녹음파일이 사실이긴 한 거군요.”
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은비가 시뻘건 얼굴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