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아이가 내게 달려올 때 (104/183)


104. 아이가 내게 달려올 때
2022.04.27.


정오의 집 화장실.

화장실은 샤워실이 따로 없고, 온수는 나오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샤워기를 들어 몸을 씻으려는데 몸 이곳저곳이 뻐근했다. 여태 침대 생활을 해왔던지라 잘 때 몸이 배긴 것 같았다.

몸은 뻐근했지만 마음은 지금의 온수만큼이나 뜨끈했다. 지헌은 팔목에 붙은 판박이 스티커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씻었다.

씻고 나오니 집 안에 미역국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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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와서 식사해. 예나 아빠.”

국순이 지헌을 불렀다. 지헌이 대답을 하고 식탁에 앉으니 예나가 지헌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서 나온 정오가 따끔하게 예나를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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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나. 아침엔 네가 알아서 먹어. 엄마도 아빠도 다 바쁜 거 너도 알잖아.”

아빠한테 먹여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엄마에게 속마음을 들킨 예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지헌은 예나의 밥공기에 반찬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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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건 예나가 하고 아빠가 반찬 올려주면 되겠다. 그렇지?”

지헌의 다정한 제안에 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흥. 아침부터 부녀지간 깨가 쏟아진다 이거지?

심통이 난 정오가 국순의 옆에 앉아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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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정오도 반찬 필요한데요.”

서른 살 딸의 애교를 지켜보던 국순이 정오의 밥그릇에 고기 반찬을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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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 많이 먹어, 우리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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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돼지야. 예나는 강아진데 왜 나는 돼지야. 그리고 돼지라고 부르면서 왜 돼지 반찬을 주는데.”

투정을 부리면서도 정오는 우걱우걱 국순이 준 반찬을 잘도 집어삼켰다.

예나는 까르르 웃고는 지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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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 집 별명이 있는데 엄마는 돼지고 예나는 강아지야.”

잘 때 등이 배기고 온수도 한참을 기다려야 나오지만, 엘리베이터도 없고 화장실도 하나뿐인 집이지만, 정오의 집에서 맞이한 첫 아침은 참 좋았다.

어머니께서 직접 차려주신 따뜻한 아침 식사와, 아기새 같은 아이의 노랫소리, 종알거림.

단둘이 있을 때는 보기 힘든, 제 엄마를 향한 정오의 애교와 이런 애교에도 단련이 된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카리스마.

모든 것이 흥미로워 지헌의 눈동자는 내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루빨리 이 환경에 적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나는 지헌보다 훨씬 더 많이 즐거워했다. 식사 후에는 이제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냐며 집 안을 방방 뛰어다니다가 정오에게 몇 번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헌은 예나에게 얼른 같이 살자고 말해두었다.

예나는 어린이집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 지헌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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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따가 저녁때 또 올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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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따가 예나 보러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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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따가 봐.”

손을 흔든 예나가 지헌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헌이 허리를 굽히니 예나가 두 손을 입에 가져다댔다. 귓속말을 하자는 뜻이었다. 지헌이 다리를 굽혀 예나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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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자 보내면 아빠도 문자 보내야 해. 알지?”

그다지 비밀 얘기일 것은 없는 귓속말. 아이의 목소리가 간지러워 지헌은 발가락까지 곱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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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맨날 무슨 비밀 얘기를 하는 거야?”

예나를 보낸 후, 옆에서 부녀의 노닥거림을 내내 지켜만 보고 있던 정오가 물었다. 아빠와 무슨 작당을 하는지 요새 계속 엄마를 피하는 일이 잦아진 딸이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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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밀이지. 왜?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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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안 궁금한데?”

지헌이 놀리듯 물어오자 정오는 자존심을 세우며 지헌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헌은 그런 정오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제의 불안과 달리 한없이 간질간질하고 따뜻하기만 한 아침이었다. 이제 혼자 사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만큼.

지헌은 정오와 함께 출근했다. 회사 앞에서 정오를 먼저 보내고 홀로 회사 출입문을 지나는 사이에 마주친 직원들이 꽤 어색해하는 것이 잘 느껴졌다.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나와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워 가슴이 아픈 처지. 역시 회사에서의 평판보다는 예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기에 회사에서의 껄끄러움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었다.

외려 그의 주변 사람들이 더 그의 안위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승규는 지헌이 출근하자마자 달려와 날카로운 눈썰미로 그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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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랑 옷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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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갈아입으려고.”

지헌이 서랍에서 여분의 셔츠를 꺼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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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옷이 똑같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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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네 집에서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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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제 같이 사는 그날이 한 발 더 가까워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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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지.”

자신이 마침 궁금해하는 쪽으로 지헌이 쉽게 방향을 잡아주어 말을 꺼내기가 쉬워졌다. 승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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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떻게 할 계획이야? 새로 구할 거야, 아니면 네가 사는 집으로 이정오 대리네 살림을 옮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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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지금 사는 동네 근처의 주택을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어머니께서도 식당일을 그만두셔서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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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동네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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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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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옆 단지 아파트도 엄청 잘 나왔어. 내가 오늘 찾아보니까 꼭대기 층 매물도 나왔더라. 거기 옥상층 아파트 엄청 좋아. 네가 거기 얻어가지고 우리 도빈이랑 예나랑 학교 같이 다니고 바둑학원도 같이 다니고 만나서 자주 놀고 주말에는 같이 놀러도 다니고 그럼 정말 좋겠다!”

긍정적인 신호를 감지한 승규는 신이 나서 떠벌떠벌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지헌의 미간은 서서히 좁아졌다.

예나와 도빈이가 같은 학교…….

지금까지는 도빈이를 마냥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나에게 아빠로서 인정을 받고 나니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도빈이는 예나를 좋아한다.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아마도 사랑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도빈이가 예나를 좋아하는 건 말리지 않는데 예나가 도빈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았다.

이 감정은 뭘까. 내 자식을 다른 남자 녀석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아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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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생각해볼게.”

지헌은 대충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못 박아놓는 이성 친구 관계가 딱히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예나에게도 도빈에게도 슬쩍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룬 지헌이 화제를 돌려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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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지난번에 나한테 최면 치료 얘기했었지? 혹시 아는 선생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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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는 선생님은 없는데 알아볼 수는 있어. 아는 정신과 선생님은 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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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럼 알아봐줘. 부탁할게.”

끄덕인 승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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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안했을 때는 뚱한 반응이더니, 마음이 바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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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얘기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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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오 대리 얘기는 잘 듣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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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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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다. 사람 다 됐네, 정지헌.”

지헌도 인정하기에 미소로 화답했다. 승규의 놀림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승규는 이제 막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한 귀여운 동생 보듯 흐뭇하게 지헌을 바라보았다.

셔츠의 소매 단추를 푸는 지헌의 손끝을 따라간 승규의 시선이 그 팔목에 붙은 희한한 그림에 걸렸다. 정지헌과 스티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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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목에 그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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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우리 예나가 오늘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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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지헌은 팔목에 붙은 판박이 스티커를 보여주며 승규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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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됐어. 그만해!”

지헌이 이때다 싶게 말문을 열자마자 승규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귀를 막고서 떠났다.

자기가 먼저 물어놓고서.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지헌은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이후 지헌은 바로 회사를 나섰다.

홀로 운전하여 찾은 곳은 본가. 지헌은 집 앞에서 재광에게 전화했다. 잠시 후 재광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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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회의 들어가야 해. 용건만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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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머니하고는 얘기 좀 나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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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네 엄마가 몸져누웠어.]

몸져눕는 바람에 정오에 대한 얘기는 조금도 꺼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헌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영미에겐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영미 앞으로 알림이 도착할 테니 따로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

알림을 확인한 영미는 상주 직원에게 지헌을 침실로 보내달라고 전달했다.

어제, 영미는 이정오의 기를 꺾어놓을 요량으로 찾아갔다가 예전과는 다른 반응에 크게 노여워하며 돌아왔다. 이후에는 식사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정오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니 억장이 무너져 일부러 더 아픈 척을 했다.

자신이 끙끙 앓고 있는 것을 남편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리고 남편이 지헌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었으면 했다. 두 남자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면 그나마 억울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헌이 찾아왔다는 알림에 기대되기도 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영미는 좀 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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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문을 등지고 누워 있던 영미는 지헌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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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아들.”

그래도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에는 반응을 보여주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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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쁠 텐데 왜 왔어. 회사에 있어야지.”

지헌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영미는 힘겹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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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요.”

그러나, 영미의 애틋한 눈빛과는 달리 그의 눈길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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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찾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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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그새를 못 참고 그걸 다 얘기했니?”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달려왔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기대와는 달랐다.

아들의 입에서는 당연하단 듯이 이정오의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자신의 부탁은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 아들이 애 엄마의 한마디에 잘 찾지도 않는 본가까지 쫓아온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지헌은 그런 엄마의 일그러진 표정에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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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씀드렸었죠. 절대 정오 찾아가지 마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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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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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찾아가시면 다신 어머니 안 보겠다고도 말씀드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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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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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당신이 어떻게 내 인생에 끼어드십니까.

소름 끼칠 만큼 낮은 목소리가 영미의 피부를 베어갈 듯이 날카롭게 울렸다.

영미는 또다시 어제처럼 두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제 아들은 자신을 부하직원 보듯 하찮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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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컸어야 했던 내 아이가 아빠 없이 7년을 살았는데, 내 아이의 엄마가 그토록 고생을 했는데, 어머니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렇게 정오를 괴롭히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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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다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내가 당했다고! 내가 어제 그 애한테 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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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지헌이 살벌하게 영미를 불렀다.

그 싸늘한 말투는 왠지 자신이 오래전 성우를 고용하여 이정오의 통화까지 빼돌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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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이가 제게 달려올 때마다 저는 눈물을 참아야 해요.”

아주 잠깐 동안 아들의 눈동자에 물빛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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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이해 못 하시죠. 아들을 잃어본 적이 없으니.”

그러나 이내 아들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졌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발치에서, 물을 잃은 물고기처럼 파득파득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어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 손으로, 어미의 힘으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아들의 잔인함을. 비쩍 말라 있던 감정의 땅에서 사랑을 싹틔웠을 때의 그 집념을, 맹목을.

지헌은 언제든 어미를 버릴 수 있는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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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더 이상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아요.”

영미의 두 눈에 매달려 있던 굵은 눈물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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