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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최고의 처방 (103/183)


103. 최고의 처방
2022.04.23.


정오는 지헌의 한쪽 팔을 어깨에 척 걸치고서 계단을 올랐다.

몸무게 20kg짜리 딸도 버거워서 계단을 오를 때는 업어주지 않는데, 그 몇 배나 되는 남자를 이끌어 계단을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못 해먹겠다 싶지는 않았다. 왠지 그가, 잘 올라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기도 했다.

어지럽다고 징징거리더니. 그건 다 핑계였나?

혹시, 설마, 보복이라면 넌 진짜 머리가 좋다!

어쨌든 집 밖에서 그에게 했던 매정한 말들을 심히 반성하고 있는 처지라 정오는 투정 없이 걸음을 옮겼다.

헉. 헉.

바람 한 점 없는 건물 안의 좁은 계단에 정오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 찼다. 행동을 통해 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이렇게 힘겨운데도 그를 내팽개치지 않고 열심히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에, 정오는 자신이 정지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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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헌 씨,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정오가 격려하니 그의 몸이 조금 더 가볍게 움직였다.

이윽고 4층.

정오는 현관문 번호키를 꾹꾹 눌렀다.

흐으아아!

산 정상에 오른 산악인의 기분이 이런 것이려나.

문 열리는 소리에 방에서 나온 국순이 정오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는 지헌을 보고서 깜짝 놀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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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그래. 술 마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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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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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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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파서 집엘 못 가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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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면 병원엘 데려가야지…….”

국순이 안절부절못하며 웅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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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그때 지헌이 국순을 불렀다. 축 처진 몸과는 달리 자못 멀쩡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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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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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고 가겠습니다.”

정오와 국순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너무나 당당해서 두 사람의 귀에는 방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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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그래. 예나 아빠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마음 착한 국순은 곧장 승낙했다. 이대로 차를 운전해서 집에 간다고 하면 더욱 걱정스러울 텐데 여기 머물겠다고 먼저 말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순은 제 방문을 열고서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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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여기서 자. 자리 펴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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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방에서 예나랑 같이 자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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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는 굴러다녀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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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거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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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쓰나. 이 방에서 편히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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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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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이거 입으면 돼. 냉장고 바지랑 티셔츠야. 편해.”

얼결에 장모님의 잠자리를 빼앗고 옷까지 빌려 입게 된 지헌이 멍해진 사이에 국순은 이불을 다시 정리해주고는 정오의 방으로 건너갔다.

바로 직전에 기세 좋게 자고 가겠다 통보한 남자가 국순의 융숭한 대접에 죄인의 표정을 지으니 정오도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좀 전에 건물 밖에서 보았던 그의 표정이 가짜였을 리는 없으므로, 따뜻한 케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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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쉬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지헌을 국순의 방에 데려다 놓은 정오는 물통까지 챙겨 이불 머리맡에 두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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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거실에서 자야겠다.’

예나가 자는 방으로 갈까 하다가 정오는 거실에 이불을 폈다. 밤새 지헌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걱정되었다.

공황. 정오가 발견한 지헌의 모습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예나가 자신의 딸이란 걸 알게 된 날에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남에게 하는 짓은 꽤 악독하고 그녀에게도 쉽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가, 잔바람에도 무너질 듯한 불안한 얼굴을 보이니 계속 마음이 쓰여서 정오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집 안의 불이 꺼지고 나서도 정오는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시간쯤 흘렀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손끝이 놀라 먼저 깼다. 정오는 벌떡 일어나 눈을 끔뻑거렸다. 발치에 거대한 남자가 길이 잘 든 대형견처럼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위가 깜깜한 와중에도 국순의 울긋불긋한 바지가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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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주춤 일어나는 지헌의 진지한 모습에 정오는 한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이제 제대로, 평소의 정지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오가 방에 들어가려는 지헌을 불러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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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세요. 정지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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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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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어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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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조금 부끄럽기는 한 듯 그가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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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랬어?”

그의 대답에 안심한 정오가 물었다.

지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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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잘 안 보여서. 시야가 바늘구멍만 해져서…….”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더라고, 땅이 푹 꺼지며 세상이 사라지고 피부를 베어낼 듯한 오한이 찾아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사실대로 말하지 않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단 사실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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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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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 봐.”

정오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어떤 증상인지를 대략 알고 있는 지헌은 편안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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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 금방 괜찮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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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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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진 않고 비슷한 경험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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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는데? 오늘보다 심했어?”

쉽게 대답하진 못했다. 그간의 경험이 잠깐의 불안증이었다면 오늘은 발작에 가까웠다.

그가 대답하지 않으니 정오가 먼저 다른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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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봤어? 병원에서는 뭐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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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고 하지. 좋은 약도 지어주고.”

지헌이 안심시켰음에도 정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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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적어도 나 만날 땐 괜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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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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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그 사고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야?”

아마 그럴 것이다. 수긍한 지헌도 조용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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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치료 같은 건 어때? 받아본 적 있어? 내가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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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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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걱정을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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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

지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정오를 흘겨보았다. 그의 눈길이 바늘이라도 된 듯이 정오는 심장이 따끔했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한테는, 아드님이 이제야 행복해졌다고 그리 당당하게 얘기해놓고서, 다시 그를 불안하게 만들려 했다.

나름대로 그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어서 한 말들에 그가 이토록 충격받을 줄 알았다면 정오 또한 처음부터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오는 입술을 말아 감추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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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말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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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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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날 버리면 안 되지.”

아니. 버린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의 귀에는 그녀의 말이 그런 야박한 뜻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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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밖에 없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잠잠한 그의 고백이 너무나 절박하고 애틋하게 들려서 정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헌은 얇은 유리그릇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고이 넘겨주었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아야 했다. 그가 찾아낸 불안증의 주머니에는 생각보다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다.

사랑해. 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이제 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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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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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오빠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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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한텐 너만 있으면 돼.”

정오의 반박에도 지헌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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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예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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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도 네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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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가 어떻게 내 거야. 예나는 예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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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그런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라, 너를 사랑해.

사랑의 고백은 밤을 새워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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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으면 예나는 따라오겠지. 어머님도 너의 소울메이트니까 같이 올 거고.”

지헌에겐 이정오가 중심이었다. 햇빛을 받아야 꽃을 피울 수 있는 식물처럼 그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야 제 안의 사랑을 누구에게든 나누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오가 그를 의지하는 것 이상으로 지헌은 정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정오도 지헌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미소 지었다. 지헌은 몇 시간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마저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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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만나서 많이 놀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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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로 하나도 안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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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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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고 싶은 말 했어. 사실 나는 어머니가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정오는 지헌에게, 영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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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웬일로 예나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예나는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자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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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왜 여기 있어? 엄마는?”

엄마가 자신을 두고 일하러 나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순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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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좀 있으면 안 돼? 언제까지 엄마랑만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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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영원히 엄마랑 잘 거야!”

바락 소리치며 방문을 열고 나온 예나는 거실에 누워 있는 정오를 발견하고서 정오의 몸을 흔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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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 왜 여기서 잤어어. 예나가 걱정했잖아아.”

예나의 투정 같은 애교에 스르르 녹은 정오가 뜨이지 않는 눈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예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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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할머니 방에서 잤거든. 그래서 오늘은 다들 방을 바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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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더 꼭 끌어안아주려고 했는데, 정오의 대답을 듣자마자 예나는 벌떡 일어나 버렸다. 아빠에게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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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밤에 아팠어. 그러니까 깨우지 마. 좀 더 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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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았어.”

조심스럽게 숨소리로 대답한 예나가 발뒤꿈치로 걸어 국순의 방문을 열었다.

조심스러운 행동을 한다고 조심스러워지는 아이는 아닌데.

정오는 예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지감치 잠든 지헌은 손이 간지러운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서 요정같이 어여쁜 아이가 살그머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아침도 있구나.

이런 아침이 있을 수 있구나.

밤사이 벌어진 일들이 고마워지는 아침이었다.

지헌의 옆에서 꼼지락대던 아이는 고개를 크게 기울여 바닥에 붙여 지헌과 눈높이를 맞추고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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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많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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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안 아파.”

그 고운 질문에 지헌은 미소로 화답하고서 아기 천사를 꼭 안아주었다. 예나는 지헌의 품 안에서 킥킥킥 웃었다. 웃음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 지헌도 결국은 같이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잠시 후 거실로 나온 지헌은 가장 먼저 국순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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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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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예나 아빠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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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분에 괜찮습니다. 어젯밤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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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얼른 씻고 식사해.”

국순이 웃음을 크게 참는 듯하여 조금 쑥스러워졌다. 냉장고 바지를 입은 모습이 많이 우스울까, 머리에 새집을 지었을까 하는 마음에 괜스레 머리를 매만지며 화장실로 향하던 지헌은 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오른쪽 팔목에 판박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예나처럼 앙증맞고 귀여운 아기천사였다.

지헌이 제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화장실에서 정오가 나왔다. 정오 역시 지헌의 팔목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는 픽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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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예나가 좋아하는 판박이 스티커야.”

정오가 뒤편에 서 있는 예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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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나! 아빠한테 장난치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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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치료의 요정이야. 치료의 요정이 아빠를 낫게 해준 거야.”

킥킥킥 웃고 있던 예나 요정이 해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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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제 하나도 안 아프지?”

그 어떤 의사 선생님보다도 훌륭한 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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