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네가 없으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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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네가 없으면 난
2022.04.20.
도빈과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승규는 짧은 문장을 불러 주었다.
“동생이 좋아요, 써봐.”
“동! 생……! 이…….”
도빈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빠의 말씀을 공책에 받아적었다.
그러나 첫음절이 우렁찼던 도빈의 목소리는 차츰 작아졌다. 몇 분 기다린 끝에 승규가 확인한 글자는 도빈의 목소리처럼 용두사미였다. ‘동생이 조와요’라는 글씨에 승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와요가 아니라 좋아요라고 써야지.”
승규의 피드백에 도빈은 모음 하나를 거두어들여 ‘동생이 조아요’라는 글자를 완성했다. 승규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좋’이라고 ‘좋’! 조에다가 히읗 받침!”
예나는 ‘좋’을 그렇게 잘 쓰는데, 열여섯 글자짜리 문장을 혼자 쓰는데, 우리 아들은 왜 여섯 글자도 제대로 못 쓸까.
아빠의 욕망을 읽을 수 없는 도빈은 뜬금없는 받아쓰기 지도가 답답할 뿐이었다.
“아빠. 나 이거 하기 싫어.”
“조금만 더 해보자. 다 너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야.”
승규의 설득에 도빈이 경악스럽게 바라보았다.
“글씨가 어떻게 피가 돼?”
“아니, 너한테 도움이 되는 거라고. 하나만 더 해. 바다가 육지라면 좋겠다, 써봐.”
“육지가 뭐야?”
“땅. 땅을 육지라고 해.”
“그럼 바다가 땅이라면 좋겠다고?”
“그래. 얼른 써봐. 바다가 육지라면.”
“나는 바다가 육지라면 안 좋을 거 같은데, 그걸 왜 써?”
“지금은 받아쓰기 시간이잖아!”
“아하, 바다쓰기 시간에는 바다를 쓰는 거구나!”
“어후, 그래. 얼른 써.”
이상한 논리에 끄덕인 도빈이 다시 연필을 들었다. 이름난 서예가보다 더 진중한 표정으로 열 글자의 문장을 한 땀 한 땀 10분에 걸쳐 썼다. 그러나 결과는 ‘바다가 육지라면 조캣다’ 였다.
“금방 가르쳐 줬잖아! 좋! 조에다가 히읗 받침!”
도빈이 승규의 잔소리에 따라 글씨를 고쳤다. 그러나 단번에 수정되지는 않았다.
“이것도 고쳐야지. 캣이 아니고 겠이야. 게에다가 쌍시옷 받침. 쌍시옷이 뭔지는 알지?”
“아빠, 쌍시옷은 있는데 왜 쌍니은은 없어?”
“왜 없긴. 세종대왕님이 만들지 않았으니까 없지.”
“그럼 아빠가 만들어. 내가 대왕님이라고 불러줄게.”
“말장난하지 말고 얼른 쓰기나 해.”
“아빠, 나 너무 하기 싫어.”
받아쓰기 마지막 문장을 목전에 두고 아들 녀석이 나자빠져 버렸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니 둘째 도윤은 체리를 먹고서 씨를 뱉은 손을 이불에 쓱쓱 문대고 있었다.
“박도윤!”
승규는 재빨리 도윤을 안아 들었다. 이미 하얀 이불엔 가을 단풍이 붉게 번져 있었다.
애는 일을 저지르지.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애가 아니지.
승규는 쓰게 한탄했다. 이를 어쩐다나. 우리 진서 씨가 오늘 갈아놓은 새 이불이었는데.
아빠가 흥분한 것을 알아본 도윤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빠 미안해.”
어린 도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승규는 빠르게 체념하며 도윤을 타일렀다.
“그건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지.”
“그렇지.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면 안 되고 이불한테 해야지.”
도빈이 아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승규는 웃음만 나올 뿐.
승규는 두 아이를 세워놓고 훈계를 시작했다.
“박도빈, 박도윤, 잘 들어봐. 미안하다고 말해도 되는 경우가 있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이불에 과일물 묻힌 건 잘한 거야, 잘못한 거야.”
“도윤이가 그런 건데? 내가 그런 게 아니고.”
“아무튼 말이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이불에 과일물 묻히면 되겠어, 안 되겠어.”
“근데. 선생님이 그러는데 신사임당은 과일물로 그림을 그렸대.”
“그건 신사임당 얘기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도빈의 엉뚱함과 맹랑함에 승규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도윤의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하고 안방으로 돌아온 진서가 승규의 꼴을 보고는 픽 웃었다.
“애 잠깐 보는 걸 그렇게 힘들어해서 앞으로 어쩔 거야.”
“엄마아, 살려주세요오.”
받아쓰기가 너무 힘들었던 도빈이 진서에게 달려갔다. 승규는 그 모습을 힘 빠진 얼굴로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나갔다.
세상에서 육아가 제일 힘들다. 아이들은 말썽만 피우는 데다가 말로 타일러도 이해를 못 하는데, 이제 셋째까지 생겼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서 한숨을 푸욱 내쉰 승규에게 진서가 다가왔다.
“많이 힘들었어?”
“아니야. 괜찮아.”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데.”
“아니, 아니야. 물이 너무 시원해서 그랬어.”
승규가 핑계를 대었지만 진서는 남편의 속마음을 금방 읽었다.
“내가 왜 그렇게 예나를 좋아하는지 알겠지? 지헌 씨 신혼집은 어떻게 할 거래? 얘기 들은 거 없어?”
“글쎄. 지헌이 지금 집도 엄청 넓어서. 그쪽으로 가지 않을까?”
“정오 씨 어머님이 너무 높은 데는 부담스러워하신다는데?”
“아, 그래? 몰랐네.”
별 관심 없는 듯 뚱하니 대답하는 승규에게 진서는 욕망을 내비쳤다.
“우리 동네 근처로 이사 오면 너무 좋을 텐데. 가까우면 오가기도 좋고, 나중에 도빈이랑 예나랑 초등학교도 같이 다니면 너무 좋겠다. 안 그래?”
“오. 그러네?”
“좀 물어봐. 새집은 어느 동네에 구할지. 그리고 우리 동네 좋다고 좀 꼬셔봐. 응?”
*
영미가 정오를 찾아갔단 사실을 알게 된 지헌과 재광은 곧장 정오네 집으로 향했다.
재광은 이동하는 내내 지헌에게 잔소리했다.
“빨리 좀 가. 우리 김 기사가 따라오다가 뒤에서 하품하겠네.”
“그러게 저 혼자 간다니까요.”
“네 엄마를 내가 데려와야 할 거 아니냐. 아니 세게 좀 밟아봐. 내가 운전해도 그것보단 낫겠다.”
재광의 닦달에 지헌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래도 아버지의 야단스러움 덕분에 예상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그리고 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정오를 발견했다.
“정오야.”
지헌이 내린 후 재광도 차에서 내렸다.
멀거니 서 있던 정오는 뒤늦게 재광을 알아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래요. 그래요.”
“여긴 무슨 일로…….”
“예나가 문자를 보냈어. 어머니가 여기 오셨다고.”
말끝을 흐린 정오의 질문에 지헌이 답했다.
“아, 이미 가셨는데.”
어리숙한 대답을 내놓은 정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지헌뿐 아니라 재광까지. 다들 큰일이 난 것처럼 쫓아오니 자신이 얼마나 당돌한 짓을 했는가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장영미 여사의 자존심을 꽉 눌러버렸다…….
정오는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때도 얘기했듯이 우리 지헌이 엄마가 조금 예민해요. 너무 상처 주는 말을 했다면…….”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저는 괜찮은데…… 제가 여사님께 상처를 드리게 된 것 같아요.”
정오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재광이 먼저 사과하려 하자 정오는 바로 부정했다. 정오의 진지한 표정에 재광의 눈이 조금 커졌다.
“죄송합니다. 얼른 여사님한테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요. 그래야겠네.”
정오의 말뜻을 제대로 파악한 재광이 부랴부랴 뒤따라온 차를 타고 떠났다.
정오는 지헌에게도 말했다.
“오빠도 가 봐.”
“아니야. 난 여기 있어야지. 예나한테 아홉 시에 간다고도 했고.”
지헌의 대답에 정오는 천천히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앞서서 계단을 오르는 정오에게 지헌이 물었다.
“괜찮아?”
“…….”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마음에 담아두지 마.”
“응. 알겠어.”
건조하게 대답한 정오가 성큼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아!”
문 열리는 소리에 예나가 방에서 달려 나왔다. 지헌이 예나를 가뿐히 안았다.
“예나 오늘 하루 재미있게 보냈어?”
“응!”
집 안에서 내내 서성거리며 정오를 기다리던 국순도 현관으로 달려왔다. 지헌과 정오를 번갈아 보던 국순이 물었다.
“어머니는…… 만났어?”
“아뇨. 이미 가셨다고 해서 못 만났습니다.”
지헌의 대답을 듣는 동안에도 국순의 눈길은 정오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 시간 사이에 기운이 쏙 빠진 듯한 딸의 얼굴에 국순이 몰래 탄식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지헌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헌은 지헌대로 눈치를 보게 됐다. 이 실례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낼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생각하는 사이에 예나가 지헌에게 안긴 채로 발을 동동 구르며 채근했다.
“아빠, 예나 이 닦아야 해.”
“그래.”
지헌이 예나를 내려놓으려 하니 예나가 더 꽉 매달렸다.
“예나야. 네가 혼자 이 닦을 수 있잖아.”
“아닌데. 예나는 혼자 못 닦아.”
정오가 예나에게 따끔하게 말했지만 예나는 가볍게 받아쳤다. 결국 지헌은 예나를 안고 화장실로 갔다.
아이의 이를 닦아주고 얼굴과 손발을 씻겨주고, 괴물이 나오는 동화책을 세 권쯤 읽어주고 나서야 아이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들 때까지 토닥이다가 예나를 방에 곱게 눕힌 지헌은 국순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정오도 함께 내려왔다. 계단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밝지 않은 정오의 뒷모습에 지헌은 마음이 쓰였다.
“정오야.”
“어머니께서 오빠한테 무슨 말씀 하셨어? 예나에 대해.”
정오를 불러세운 지헌에게, 정오가 먼저 질문했다.
“……예나를 키워주겠다고 하셨어.”
“…….”
“그래서 그런 얘기 하지 마시라고 했어.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지헌이 바짝 마른 입술로 솔직하게 털어놓자 정오의 목소리는 한층 더 건조해졌다.
“아까 어머니랑 많이 안 좋았어. 싸운 것도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쏘아댔어. 나도 한이 많았거든.”
“…….”
“오빠, 나는 예나를 지킬 거야. 내 1순위는 예나야.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단단한 목소리에는 틈이 없었다. 지헌은 그저 정오의 장엄한 눈빛만 마주하고서 서 있었다.
“오빠 어머니와 계속 맞서야 한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오빠는 그러지 않아도 돼.”
“…….”
“오빠가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에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오빠의 선택을 존중해. 의무감 때문에 험한 길을 갈 필요는 없어. 우리가 가족이 되지 못하더라도 예나는 오빠를 아빠라고 부를 거야.”
정오의 이야기에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네가 없으면 난 어쩌라고.
그녀의 염려를 부정하고 싶은데 가슴속만 타는 듯 뜨겁고 벅찰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갈게. 잘 가.”
그사이에 그녀가 감정 없이 돌아섰다. 쫓아가 붙잡아야 하는데 누군가 반대편에서 제게 목줄을 채워 잡고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며 몸을 힘겹게 움직였다.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눈앞의 세상이 점이 되어 닫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너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준 게 아니었었나.
돌아섰던 정오는 이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헌에게 냉정하게 말한 것은, 그 또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길 바라서였다. 영미에게는 ‘아드님의 새 가족’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정오는 영미와 잘 지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실이 그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지헌에게는 아픔이 될 수 있다.
그는 정오가 영미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을 것이다. 지금은 제 선택이 옳다고 확신하며 어머니와 거리를 두더라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 정오가 모자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원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오는 꼭 가족이 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모두를 흔들지 않는 대안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왠지 지헌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상심했을 수도 있겠지만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뒤돌아선 정오는 다시 지헌에게 다가갔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그가 애처로워 보였다.
“왜 그러고 있어. 집에 가야지. 안 갈 거야?”
골목 저편에서 차 한 대가 불빛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이쪽으로 오려는 것 같기도 했고 돌아서 반대편으로 떠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골목 한가운데에 서 있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정오는 좀 전에 했던 말을 거두어들였다.
“너무 심하게 말했다면 미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이제 그만 가.”
냉정하게 말하기보단 차분히 이해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그는 반응이 없었다.
정오는 바짝 다가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의 몸에서 겨울밤 눈밭에 던져진 짐승 같은 잔떨림이 느껴졌다.
“이봐요. 정지헌 씨.”
슬며시 놀란 정오가 고개를 기울여 지헌의 얼굴을 살폈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고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정오는 두 손을 올려 힘주어 지헌의 뺨을 감싸고서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끝에 뜨거운 액체가 닿았다. 그제야 정오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로등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먹색이 짙게 번진 눈동자엔 새까만 두려움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오빠.”
그의 뺨을 타고 희미한 빛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호흡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