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나를 놓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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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나를 놓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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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나를 놓지 말아요
2022.06.22.
여보.
내 이 말을 꼭 듣고 말리라.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보라고 한번 불러주면 확 잡아먹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
그런 눈을 하고서 보란 듯이 언죽번죽 뻔뻔하게 미소 짓고 있으니, 정오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 건지 해주지 말아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못 하겠어?”
“……왠지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아.”
“안 하면 여기서 못 나갈 텐데?”
팔짱을 낀 지헌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선전포고 같았다.
밖에는 윤애라 비서가 있어서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정오는 차마 그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가만히 노려보았다. 지헌이 사악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오를 달랬다.
“여보, 일해야지.”
“…….”
“안 나가고 싶어? 그럼 계속 여기…….”
“여보.”
“…….”
“됐지?”
정오는 결국 ‘옛다 여보’ 하며, 그가 원하는 말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역시,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입술을 길게 늘이며 다가온 지헌은 정오의 두 손에 단단히 손깍지를 끼우고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대로 해봐. 잘 못 들었어.”
“들은 것 같은데?”
“아니야. 못 들었어.”
“여보.”
쿨하게 다시 대답을 내놓기 무섭게 더운 숨이 입안으로 훅 끼쳐 들었다. 그녀가 버둥거릴 거라 짐작하는 듯 맞잡은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벗어날 순 없는 거였다.
그녀가 체념한 듯 어깨에 힘을 빼고서야 맞잡았던 한쪽 손도 풀렸다. 자유로워진 손이 그녀의 등 줄기를 쭈욱 훑으며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정오는 흠칫 놀라며 반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마주한 건, 당장 예나 동생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눈빛.
“조퇴할까?”
그가 위풍당당하게 물었다. 아니 출근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조퇴를.
“아니면 외근? 땡땡이칠까?”
정오의 당황한 눈동자가 사방을 헤맸다. 어젯밤에 그런 얘기를 꺼낸 그녀의 잘못이 컸다. 부채질만 해도 활활 타오르는 불씨에 선풍기를 들이댄 것이다.
“오빠, 진심으로 일을 열심히 해야 해. 이젠 오빠를 욕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오빠가 못 하면 아내인 나도 같이 욕을 먹어. 정지헌 원래 바보였는데 결혼하더니 더 바보가 됐다고. 그건 들키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그녀는 진심으로 다그쳤다. 그녀의 충고가 우스워 지헌은 웃음이 났다.
이정오를 놀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일이다. 정말로 일은 팽개치고 그녀와 함께 내내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단 생각이 가득했지만 농땡이를 칠 수 없는 월요일이었다.
“우리 결혼 발표는 언제 할까?”
지헌은 욕망을 적당히 충족시킨 후에야 용건을 꺼내놓았다. 다른 곳으로 튀어버린 화제에 정오가 멍하니 물었다.
“응?”
“우리 혼인신고 했다고 알려야지. 어쩌면 기사도 나올 거야.”
“기사가 나오면…… 예나 얘기도 나올 수 있겠네?”
“그건 어떻게든 막아볼게.”
정오는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끄덕였다.
“우선 예나한테 얘기할게.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발표하면 될 것 같아.”
“그래. 그러자. 그리고 또 하나.”
“응.”
“아버지가 예나를 보고 싶어 하셔. 우리가 본가에 가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초대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어떻게 뵈든 상관없어. 본가에서 어머니랑 같이 뵈어도 괜찮고.”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정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도리어 지헌이 놀라 물었다.
“진심이야?”
“응. 난 지난번에 어머니 만나서 하고 싶은 말 다 했는걸. 게다가 7년 전 통화의 진상까지 밝혀졌으니 나한테 더는 뭐라고 못 하실 거야.”
정오의 대답에 지헌의 시름이 깊어졌다. 정오는 지헌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절연한 사이라 더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정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괴로울 터였다. 정오는 영미가 원망스럽긴 하지만 자신이 모자지간을 끊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시간이 흘러 오후 6시.
은비는 맞선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은비보다 일찍 나와 은비를 반겼다.
“채은비 씨.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대근물산 대표, 함대근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살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은엽의 사무실에서 봤을 때는 흰머리가 꽤 보였는데, 그새 염색을 한 건지 희끗한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비는 그다지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남자는 은엽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크게 헤벌쭉 웃었다. 웃을 때마다 번쩍거리는 금니가 눈에 띄었다.
“채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잠깐 뵈었죠.”
“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말 미인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카피라이터라고 들었는데, 채은비 씨가 만든 광고 중에 제가 알고 있는 광고도 있을까요?”
대근은 일찌감치 지루한 기색을 보이는 은비에게 지치지 않고 계속 말을 붙이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은비는 마지못해 계속 대답하게 되었다.
“카피라이터 분이라 그런가. 말씀도 정말 예쁘게 하시는군요.”
“하지만 지금은 잠시 일을 쉬고 있어요. 이직 준비 중이라서요.”
“이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시죠?”
“네?”
“결혼을 하게 되면 나가서 일을 하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
“아니, 집에서 애들 키우고 살림만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누군가의 심부름꾼 같은 광고회사의 일이 싫고 지겨웠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힘들었던 만큼 좋은 성과를 냈을 때는 더없이 뿌듯했다.
사실 은비 또한 결혼하면 굳이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지헌이 남편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정지헌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은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는 정지헌이 아니었다.
권배일. 그냥 회사원이었던 남자. 그 남자와 결혼한다면 나는 평생 일을 해야겠지. 그러니 그 남자와 헤어져 함대근과 맞선을 보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왜 이토록 세상이 무너진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
일찍 퇴근한 지헌은 아침의 약속대로 예나와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어린이집이 오늘부터 여름방학이라 육아를 위해 휴가를 낸 승규도 도빈과 함께 따라나섰다.
오래전 지헌은 예나의 자전거를 구입하며 도빈에게도 자전거를 선물했다. 도빈은 그새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혀서 아빠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잘 타는 어린이가 되었다.
혼자서 운동장을 크게 누비는 도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예나는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부러운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별개. 자전거에 오른 예나는 지헌에게 단단히 일렀다.
“아빠, 놓지 마.”
“응.”
“놓으면 안 돼.”
“알았어.”
지헌은 예나의 자전거 뒤를 붙잡고 쫓아가며 굳게 대답했다. 예나는 지헌의 도움을 받아 차츰 앞으로 나아갔다.
제힘으로 중심을 잡아 전진하는 자전거가 신기하면서도 아빠가 손을 놓을까 불안하여 이따금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팔 힘이 약한 탓에 돌아볼 때마다 손잡이가 휘청거렸다.
“예나야. 뒤에 보지 말고,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야지.”
“알았어. 아빠, 잘 잡고 있지?”
“그럼. 아빠가 잡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밟아.”
“아빠 뒤에 있는 거 맞지?”
“당연하지.”
“아빠 꼭 붙들고 있어야 해!”
거듭 확인하며, 예나는 아빠의 대답에 기운을 얻어 차츰 속도를 높였다. 발구름이 빨라질수록 신기하게도 중심이 잘 잡혔다. 이제 예나는 휘청거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빠 놓지 마!”
“알았어.”
“아빠!”
“응.”
“아빠.”
“…….”
“아빠, 대답해야지!”
“우리 딸 잘 타는데?”
이럴 수가.
뒤에서 붙잡고 있는 줄만 알았던 아빠가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토록 의지하는 아빠인데, 아빠의 얼굴을 옆에서 확인하자마자 예나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아빠의 두 손은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았다.
“으아아아!”
깨달은 순간 중심이 흐트러졌다. 핸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엄마아아!”
아빠에게 배신당한 예나는 엄마를 외치며 쓰러졌다. 물론 그 옆에서 달리던 지헌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예나와 자전거는 지헌의 위로 넘어졌다.
헬멧에 무릎 보호대에 아빠 쿠션. 엄청난 보호를 받아 정강이가 조금 까졌을 뿐 예나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지헌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물었다.
“예나 괜찮아?”
하지만 예나는 씩씩거렸다.
“다쳤어? 아빠가 미…….”
“아빠 미워!”
아빠가 아이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예나는 다리를 뒤로 빼며 소리쳤다. 눈에는 찔끔 눈물이 매달렸다.
“내가 놓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가 알았다고 했잖아!”
정강이 상처의 아픔보다도 배신감이 컸다.
“이제 아빠 말은 안 믿어!”
예나가 단단히 삐치는 바람에 더는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지헌이 회유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새삼 저 고집은 누굴 닮은 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는 아빠와 거리를 두고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다가 도빈이 지칠 때쯤 일어났다.
“너는 왜 자전거 안 타?”
“나 넘어지는 거 못 봤어?”
“넘어졌어? 못 봤는데.”
“엄청 크게 넘어졌어. 여기도 다쳤다고.”
예나가 상처를 들이밀자 도빈이 그 앞에 앉아 ‘호’ 하고 불어주었다. 친구가 상처를 불어준다고 해서 따끔한 것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따뜻한 온기가 쌓이는 것 같긴 했다.
“근데 왜 넘어졌어?”
“아빠가 나한테 거짓말했어. 뒤에서 꼭 붙잡고 있다고 하고선 하나도 안 잡고 있었어.”
“우리 아빠도 그랬어.”
도빈이 자전거를 처음 타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도빈의 가슴에는 예나와의 끈끈한 유대감이 차올랐다.
“왜 아빠들은 자전거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먼저 가르치지? 우리한테는 거짓말 못 하게 하면서.”
“…….”
“예나야. 나는 그런 아빠가 되지 않을 거야.”
그 와중에도 도빈은 자신의 진심을 어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빠의 거짓말에 삐친 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예나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지헌은 예나의 눈치를 보며 자전거를 끌고서 조용히 뒤따랐다.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우리 강아지 왔어?”
“응.”
국순에게 대답한 예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예나의 표정이 걱정스러워 국순이 지헌에게 물었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제가 자전거를 가르쳐주려다가…… 손을 놔가지고…….”
지헌에게서 간략한 정황을 전해 들은 국순은 웃음을 터트렸다.
“에구. 우리 예나가 삐치면 오래 가는데, 이를 어쩌나. 우리 예나 아범은 다친 데 없고?”
“조금 까졌는데, 어머니, 혹시 구급상자 어디 뒀는지 아세요?”
지헌이 팔꿈치를 보이며 물었다. 예나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다친 것은 뒤늦게 알았다. 지헌의 팔꿈치를 확인한 국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아이고, 이를 어째. 팔꿈치에 구멍이 뚫렸네. 아직도 피가 나잖아. 안 아팠어?”
“네. 괜찮습니다.”
“여기 있어봐. 약 가져올 테니까.”
국순이 냉큼 일어났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예나도 방문을 열었다. 아빠에게 당했다는 배신감에 화가 나서, 아빠가 다쳤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예나는 아빠가 치료를 받는 걸 몰래 지켜보았다. 저만큼 다쳤으면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는 아빠가 신기했다. 신기한 만큼 뒤늦게 미안해졌다.
예나는 조용히 방으로 가서 바둑판과 바둑알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아빠가 다친 걸 발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바둑으로 화해해보기로 했다.
자신이 테이블 위에 놓아두면 아빠는 금방 알아볼 것이다. 예나의 화가 풀렸다는걸.
역시나 지헌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바둑판과 바둑알을 보곤 피식 웃었다.
“예나, 아빠랑 바둑 둘까?”
거실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던 예나가 대답 없이 쪼르르 다가갔다. 지헌은 바둑판 위에 놓아둔 바둑알통을 옆으로 치우고 바둑판을 펼쳤다. 아이의 야무진 행동력을 칭찬해주고 싶어 입을 벌렸으나 이내 다물었다.
펼쳐진 나무 바둑판 위에 큼지막하게 프로 바둑 기사의 사인이 박혀 있었다. 지헌도 잘 아는, 20여 년 전 한국을 넘어 세계 1위였던 바둑기사의 사인이었다.
지헌도 오래전 친구의 집에서 이 바둑기사의 사인을 봤던 적이 있었다. 흐릿하게나마 분명히 남아 있는 추억이 그의 눈가를 간질였다. 지헌은 먹먹히 손끝을 움직여 사인을 매만지며 물었다.
“예나야, 이거 어디서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