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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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해
2022.06.25.
아마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바둑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했던 평범한 어린이, 지헌은 학원이나 과외 대신 학교의 바둑영재반 수업을 택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학년이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동갑의 남자친구는 딱 한 명이었다.
유수일. 얼굴이 희고 곱상하게 생긴 외모에, 활달하고 똑똑한 친구였다.
지헌은 수일과 꽤 친해졌다. 바둑영재반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자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수일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거실은 지헌이 혼자 쓰는 화장실만 한 아주 작은 집이었다.
왠지 어색해하는 지헌에게 수일은 바둑판을 보여주었다. 바둑판에는 누군가의 사인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이거 봐봐.”
“이게 뭐야?”
“이강호 9단 사인이잖아. 너 몰라?”
수일이 그 당시 세계 랭킹 1위, 한국을 바둑 강국으로 만든 프로바둑기사의 이름을 말했다.
“이강호 9단 사인이 이거야?”
“응! 우리 엄마가 대국장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받아온 사인이야.”
수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가 대국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사인을 받아왔다고? 지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헌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건 이제 우리 집 가보야. 엄마가 그랬어.”
“왜 남의 사인이 너희 집 가보야?”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니까.”
“…….”
“나도 이강호 9단 같은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가 될 거거든.”
수일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당당히 꿈을 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부럽기도 했다.
“너는? 너도 바둑기사가 될 거야?”
수일이 물었다.
“응. 나도 그러고 싶다.”
지헌은 가볍게 끄덕였다. 사실 꿈 같은 건 없었지만, 친구의 모습이 좋아 보여 그렇게 말했다.
***
지헌은 20여 년 전의 추억 한 토막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때 꽤 친했지만 엄마 때문에 함께 놀지 못하게 된 친구.
그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바둑기사가 되진 않은 것 같은데.
“이 바둑판? 경찰 아저씨가 준 거야. 이사 선물로.”
바둑판이 어디서 났느냐는 지헌의 질문에 예나가 대답했다.
“그 옆집에 살았다는 경찰 아저씨?”
“응! 아빠, 이건 보통 바둑판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우승을 많이 한 바둑기사님이 사인한 바둑판이야.”
예나가 이전에 배일이 말해준 대로 아빠에게 설명했다.
“경찰 아저씨가 엄청 귀중한 걸 줬네?”
“응! 맞아.”
지헌은 다시 한번 바둑판의 사인을 더듬어 보았다. 바둑판에는 덩그러니 사인만 있을 뿐 날짜까지 적혀 있진 않았다. 언제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사인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어린 시절의 친구를 떠올리는 자신이 우스워 지헌은 헛웃음을 지었다.
최고의 자리를 거머쥐었던 프로바둑기사의 단순한 흔적 중 하나일 것이다. 활동하는 동안 수천, 수만의 사인을 했을 테니 그저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
늦은 밤, 본가로 향하는 은엽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함대근 대표였다.
“네. 대표님.”
[기다리실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대근의 목소리가 꽤 밝았다. 은비와의 맞선 자리가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괜찮으셨습니까? 우리 은비가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는지요.”
[실수라뇨. 아주 예쁘고 참한 모습만 보여주셨죠.]
은엽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저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고 싶네요.]
“은비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네요.”
[채은비 씨 반응도 괜찮았나요?]
“그럼요. 좋았습니다.”
아직 은비에게 연락해보지 않았지만 은엽은 유연하게 거짓말했다.
[아, 직접 뵐 때는 그렇게 보이진 않아서요.]
“제 동생이 수줍음이 많은 편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대근은 진심으로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은엽은 대근에게 이후의 수순을 일깨워 주었다.
“내일 즈음 은비한테 직접 연락하시면 어떨까요? 데이트 일정을 다시 잡으시는 걸 권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맞선 자리도 간신히 시간을 낸 거라서요. 스케줄이 꽉 차 있긴 한데……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야죠. 한 번 보고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하.]
웃음 포인트를 알 수 없는 대근의 호탕한 웃음에 은엽도 덩달아 웃음소리를 냈다.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인연이 계속 잘 이어지면 연말에는 변호사님이 제 매부가 되겠네요.]
“말씀만으로도 기분 좋네요. 저도 두 분 응원하겠습니다.”
은엽은 점잖게 덕담을 전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쳤을 때쯤 본가에 닿았다. 은엽은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
“아버지.”
“그래.”
채은엽과 채은비의 부친 채서복은 대법원에서 9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임 대법관이었다.
2년 전 대법원장에 욕심을 보였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적절한 시기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는 올해 임기를 남겨두고 퇴임 후,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은엽은 그런 아버지를 지지했다.
“대법원장이 곧 사임할 것 같다. 암이라고 하더구나.”
“……그렇습니까?”
“대법원장이 청와대에 나를 추천하겠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뜻밖의 소식에 은엽은 골몰하게 되었다.
대법관은 도덕성과 청렴성이 요구되는 자리이기에 그간 채서복은 민간의 인지도를 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재광 회장이 필요했다.
세련 그룹의 정재광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덕망 있는 대기업 회장이었고 이런 사람의 자제와 연애결혼으로 딸을 결혼시키는 것은 서복의 자랑이 될 터였다. 그 기세로 정계에 진출하려 했었다.
“내년 총선을 포기해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정재광 회장과도 갈라섰으니.”
서복은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생각을 마친 은엽이 의견을 전했다.
“정계로 진출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만, 대법원장 자리가 인지도를 얻기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대법원장이 인지도는 무슨.”
서복이 픽, 코웃음 쳤다. 대법원장은 한국의 의전 서열로 세 번째 자리다. 대통령과 국회의장 다음으로 높은 의전을 받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민간인들에게는 일개 장관, 일개 국회의원이 훨씬 더 인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시기 나름이죠. 인사청문회에서 민간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발언을 많이 준비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은엽의 아이디어에 서복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대법원장으로 몇 년 활약하시고, 국회의원 그딴 거 하실 필요 없이, 공천받으셔서 바로 청와대로 진출하시죠. 물론 대법원장 임기도 다 채우실 필요 없을 테고요.”
은엽의 화끈한 응원에 서복은 허허허 웃었다. 그리만 된다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적당히 웃은 서복이 딸의 안부를 물었다.
“은비는.”
“오늘 대근물산의 함대근 사장을 만났습니다. 함대근이 은비를 마음에 들어하고요.”
“함대근. 호전적이지만 예의는 지킬 줄 아는 놈이지. 은비는 뭐라고 하고?”
“싫어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잘 설득해봐. 다 그 애한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네.”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많이 가진 만큼 행복해지는 건 사실이지.”
서복의 지론에 은엽은 크게 끄덕였다. 은엽은 늘, 자신보다 더 부유한 이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왔다. 최고의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곳간 사정이 좋지 않아 좌절했던 적이 많았던지라 서복에게 깊이 공감했다.
사실 재벌 2세들은 돈만 많은 멍청이들인데.
은엽은 머리도 좋고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자신과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법원장이 되면, 나는 더 청렴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너도 답답할 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명예를 추구하십시오. 자금 조달은 제게 다 맡기시고요.”
은엽은 든든하게 대답했다. 은비를 빨리 결혼시켜야 할 명분이 생겼다.
*
“다녀왔습니다.”
정오는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나가 달려와 반겼다.
“엄마아!”
“예나 공주!”
예나를 안아 들었을 때 국순과 지헌도 다가왔다. 오늘 새로 맞이하게 된 풍경이었다.
“저녁 먹었어?”
늘 국순이 먼저 물어오던 것을 오늘은 지헌이 물었다.
“응.”
“누구랑?”
이어진 질문의 양상은 달랐지만.
오늘 새로 온 곽동재 차장과 함께 저녁을 먹은 터라 정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 인형 터졌어. 꿰매줘.”
그런 정오의 난감한 상황을 알아차린 것처럼, 예나가 급하게 요청했다.
“아, 인형이 터졌어? 엄마가 꿰매줄게. 가자!”
정오는 냉큼 예나와 손을 잡고 예나의 방으로 향했다.
예나가 얘기한 인형은 정오가 호주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캥거루 인형이었다.
“새끼 캥거루는 어디 있어?”
“코알라랑 같이 있어.”
“인형 터진 것들 다 가져와. 다 꿰매줄 테니까.”
엄마의 분부에 따라 예나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사를 하며 가져온 인형 중엔 터진 것이 더러 있었다. 정오는 한땀 한땀 바느질하여 인형들을 성형했다.
예나는 잘 꿰맨 캥거루 인형의 주머니에 새끼 캥거루 인형을 넣었다 뺐다 하며 정오에게 말했다.
“엄마, 도빈이 동생 생긴대. 그럼 도빈이는 동생이 두 명이야.”
“좋아 보여? 어때?”
“도빈이는 동생 돌보는 거 힘들대. 근데 나는 조금 부러웠어.”
“왜 부러웠어?”
“동생이 있으면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예나도 예나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응.”
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동생 생기면 예나가 잘해줄 거야?”
“응. 예나가 많이 예뻐해줄 거야.”
“엄마가 동생만 챙기면 서운하지 않겠어?”
“엄마가 예나도 챙겨주면 되잖아.”
“그래도. 그래도 예나가 사랑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잖아.”
엄마의 가정에 예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동생 사랑해줘도 괜찮아.”
“…….”
“하지만 예나 사랑을 나눠주면 안 돼.”
“…….”
“동생도 사랑해주고, 예나도 많이많이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니까.
예나의 욕심 어린, 진솔한 대답이 정오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곧 결혼 발표를 하게 될 것 같다. 그 여파가 클지 작을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전에 예나를 챙겨야 했다. 아직 숙제를 끝내지 못했다.
지헌이 방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오는 지헌에게 잠시 눈짓을 하고는 말을 꺼냈다.
“예나야, 이제 예나 이름을 바꿔야 해. 이제 예나는 이예나가 아니라, 정예나가 될 거야.”
뜻밖의 화제에 예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정지헌이니까, 우리 예나도 정예나가 되는 거야. 도빈이가 아빠 성을 따라서 박도빈인 것처럼.”
“…….”
“이해하지?”
예나는 경찰 아저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이 바뀐다는 건 이런 뜻이었나 보다, 깨닫게 되었다.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응. 다 그렇게 해. 그리고 예나 동생이 태어나면, 예나 동생도 그렇게 될 거야.”
“엄마가 이예나 엄마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이는 금방 울멍울멍했다.
“내가 정예나 해도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당연하지.”
왠지 불안해 보이는 질문에 정오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이예나’로 살았던 7년을 금방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가 밖에서 돌아와 손을 씻지 않았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잠도 안 자고 깔깔댈 때, 정오는 이따금 버릇처럼 ‘이예나’ 하고 부르게 될 것이다.
예나 또한 그럴 것이다. 누군가 ‘이예나’ 하고 불렀을 때 문득 대답하거나 아니면 흠칫 돌아볼 것이다.
“엄마는 계속 우리 예나 옆에 있을 거야. 예나가 있어 달라는 대로, 예나가 원한다면 평생. 엄마는 영원히 예나 옆에 있을 거야.”
정오는 반짝거리는 눈을 비비는 딸을 가까이 끌어당겨 꼭 안았다.
“엄마는 너한테서 떨어질 수가 없어.”
예쁜 내 사랑.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운명이었거든.”
나의 천사. 너를 영원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