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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바둑대회 (122/183)


122. 바둑대회
2022.06.29.


정오와 지헌과 예나는 함께 구청에 가 인지신고를 했다. 두 사람이 이미 혼인신고를 한 사이였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예나의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었다.

예나는 제 이름이 쓰인 가족관계증명서를 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낯설 테지만 아이들은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바꾸고, 아이의 어린이집과 학원에 사실을 알리고, 아이의 바둑대회 원서를 다시 접수하고, 바삐 보낸 하루하루가 흘러 어느덧 목요일 아침.

곁에서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지헌에게 정오가 선언했다.


“내일 나는 휴가 낼 거야.”

“왜?”

“우리 예나 바둑대회 따라가야지.”

바로 내일. 예나가 바둑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물론 학원 원장이 아이들을 인솔하지만 예나는 아직 많이 어려 보호자가 필요했다.

정오의 대답에 지헌이 말했다.


“그럼 같이 가자.”

“오빠는 출근해. 우리가 딴 회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 다 빠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조만간 다 밝힐 텐데 뭐.”

“우리가 혼인신고 했다고 밝히면 더 심하게 말 나올 수도 있어. 애 바둑대회 나간다고 부모가 동시에 휴가 냈다고. 애가 아픈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정오에게 거부당한 지헌은 정오를 뚱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가고 싶다. 예나 바둑대회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하지만 정오는 지헌의 그 못마땅한 표정을 보고서도 모른척했다.


“게다가 오빠는 회사의 중책이잖아. 일해야지. 일 게을리하면 안 돼.”

“내 생각엔 네가 더 중책인 거 같은데?”

“물론 능력이야 내가 더 뛰어나지만, 직위로 오빠를 이길 수는 없지. 오빠는 회사 가.”

정오는 자신이 예나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지헌은 팔짱을 끼고서 정오를 노려보았다.


“오빠가 예나를 여자 화장실에 데려갈 수 있겠어, 나처럼 섬세하게 챙길 수 있겠어? 당연히 내가 데려가야지. 딸은 엄마야.”

“무슨 소리야, 딸은 아빠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소리를 들은 예나가 방 가까이로 다가와 기웃거렸다.


“자꾸 우기지 말고.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책임감도 없이 어디 회사를 농땡이 치려고. 딸 핑계 대지 말고 출근이나 해.”

“그럼 우리 딸이 선택해. 엄마야, 아빠야.”

기어이 지헌은 그 선택을 예나에게 맡겼다. 예나를 방 안으로 데려온 지헌은 예나의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넘겨주며 정오와 맞섰다.


“바둑의 바 자도 모르는 엄마야, 아니면 우리 예나의 영원한 바둑친구가 되어줄 아빠야.”

“바둑의 바 자는 알아!”

정오가 발끈했다.


“그래. 아는 거라곤 ‘바둑’이라는 두 글자뿐인 엄마야, 아니면 우리 예나랑 언제든 대국을 할 수 있는 아빠야?”

“예나공주. 엄마랑 가자. 다른 친구들 다 엄마랑 올 텐데 우리 예나만 아빠랑 가면 좀 그렇잖아.”

정오도 예나를 회유했다. 예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엄마 아빠 사이를 고심하며 오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정오에게 양해를 구했다.


“엄마, 내일은 아빠랑 갈게.”

그렇지! 지헌은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든든히 흔들어 보였고, 정오는 충격에 빠져 입을 벌렸다.

내 딸이 나를 버리다니.


“……왜?”

“바둑대회니까. 그림대회라면 엄마랑 가겠지만, 이건 바둑대회잖아.”

“허. 그림대회? 그림대회 나갈 생각이나 있고?”

정오가 예나에게 따지고 들자 지헌이 예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등 뒤로 감추었다.


“어허. 그림대회든 바둑대회든 우리 예나가 나간다고 하면 나가는 거야. 그렇지, 예나공주?”

“응.”

아빠가 받아주니 좋다고 웃는 딸을 원망할 수는 없어 정오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

또 하루가 지나 바둑대회 날 아침이 밝았다.

지헌과 정오와 예나는 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지헌은 정오를 먼저 회사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예나, 대회 잘 다녀와!”

“응!”

“져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재미나게 해. 알겠지?”

“응!”

“휴대폰 꼭 목에 걸고 다니고. 무슨 일 생기면 아빠한테 꼭 얘기하고. 알겠지?”

딸을 쫓아가지 못하는 엄마의 아쉬운 마음이 목소리에 가득 담겼다. 정오는 좀처럼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문손잡이를 꼭 잡고서 지헌에게도 당부했다.


“예나 잃어버리지 말고 절대 눈 떼면 안 돼.”

“걱정 마.”

“아. 분하다. 내가 가야 하는 건데.”

“그러게 같이 못 가서 아쉽네. 마음 풀어.”

흥.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왠지 놀리는 듯한 지헌의 말투에 정오는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 안녕!”

그런 엄마의 속도 모르고 아이는 해맑게 인사했다.

지헌과 예나는 일찌감치 대회장에 도착했다.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지헌도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배우긴 했지만 대회장에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예나를 잡은 손에 꽈악 힘이 실렸다. 예나보다 자신이 더 긴장한 것 같아 우습기도 했다.

이윽고 약속한 장소에서 학원 원장과 만났다. 예나가 먼저 알아보고서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나야, 안녕! 예나 아버님께서 나오셨네요!”

“선생님, 우리 아빠 바둑 되게 잘해요.”

원장의 인사에 예나가 자랑했다.


“아, 바둑을 잘하시는군요.”

“그냥 할 줄만 압니다.”

지헌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바둑대회는 저학년부와 고학년부로 나뉘어 운영되며 토너먼트식이었다. 일곱 살인 예나는 저학년부로 등록되었다. 일곱 살 어린이 자체가 많지 않아 예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를 만날 확률이 높을 터였다.

원장이 아이들에게 명찰 목걸이를 나눠주었다. 예나는 ‘정예나’라는 이름이 쓰인 명찰을 받았다. 지헌은 예나의 명찰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래도 주최 측에서 첫 번째 대국은 동갑 선수를 만날 수 있도록 대진표를 짰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네요.”

“어쨌든 경기에서 계속 이기다 보면 아홉 살 열 살도 만날 수 있겠지만, 예나가 워낙 잘해서요. 잘할 겁니다. 좋은 경험이 될 거고요.”

원장이 지헌에게 대회에 대해 소개해주며 예나를 칭찬했다.

시간이 흘러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대회 진행하겠습니다. 보호자 분들은 관중석에서 대기해주시고 대회 참가 어린이들은 대회장으로 들어가서 조별로 서주세요.”

예나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


“예나야, 집에서 아빠랑 하듯이 재미나게 시합하고 와. 아빠는 아까 앉았던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응. 이기고 올게!”

예나는 우렁차게, 꽤 믿음직스럽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예나 혼자 가는 길. D조 예나는 지도교사의 안내에 따라 D조 팻말 앞에 서 있다가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줄지어 서 있는 테이블 위에 각각 바둑판과 바둑알이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근처의 아이들 키가 얼추 비슷했다.

예나는 또래의 친구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바둑을 즐기는 같은 나이의 친구들을 만났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휴대폰 가지고 있는 어린이들은 휴대폰 전원을 꺼서 제출해주세요. 휴대폰은 대회장에서 퇴장할 때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다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예나는 목에 걸고 있던 휴대폰을 감독관에게 제출했다. 감독관은 예나의 휴대폰에 이름을 써서 봉투에 담았다.

이제 대회 시작.


“인사하고 순서를 정합니다.”

예나의 맞은편에 앉은 아이는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남자아이였다. 남자아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 나는 강새별이야.”

“나는…… 정예나.”

“너 몇 살이야?”

“일곱 살.”

“와. 진짜? 나도 일곱 살인데.”

예나는 남자아이의 인사를 잘 받아치는 재주는 없었다.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여섯 집 반을 내주고 시작하는 흑돌을 잡게 된 예나는 처음부터 긴장했다. 하지만 긴장했다고 해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시합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예나는 첫 번째 상대를 가볍게 이겼다.


“와! 너 진짜 잘한다. 네가 1등 하겠어.”

마냥 경쟁상대라고 생각했던 남자아이는 첫 번째 시합에서 졌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예나를 칭찬해주었다. 그제야 예나도 웃을 수 있었다.


“고마워. 너랑 대국해서 재미있었어.”

예나는 학원에서 배운 대로 남자아이에게 인사했다.

대국 후에 뒤돌아 등 뒤를 보았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아빠가 보였다. 지헌이 휴대폰만 보고 있어 예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극성 아빠 지헌이 멀리 있는 예나를 제대로 보려고 휴대폰을 100배 줌으로 설정하고서 녹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지헌은 휴대폰 화면으로 예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예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빙긋 웃어주었다.

예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시합까지 가뿐하게 이겼다. 이윽고 C조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세 번의 시합을 연달아 이기니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는 즐기면서 대국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예나의 앞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너도 대회 나왔어?”

네 번째 상대는 홍재인이었다.

예전에 예나의 바둑학원을 다녔던, 홍수인의 오빠 홍재인. 나이 어린 예나에게, 아빠한테 전화해보라며 다그쳤던 그 남자아이.

하지만 예나가 놀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선생님, 선수 바꿔주시면 안 돼요?”

“무슨 일인데요?”

“얘 일곱 살이에요. 일곱 살짜리랑 무슨 시합을 해요.”

“홍재인 어린이. 나이를 보지 말고 실력을 봐야죠. 정예나 어린이도 우리 홍재인 어린이처럼 앞서서 세 명을 이기고 여기 앉아 있는 거예요.”

재인이 감독관에게 불평하니 감독관이 따끔한 말로 재인을 설득했다.

재인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예나를 얕잡아보았다.


“그래도 보나 마나 수준 차이 확 날 텐데.”

하지만 예나는 재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귀가 멍멍했다.


“너 근데 이름이 왜 정예나야? 이예나가 아니고?”

“…….”

“그 학원은 선수가 진짜 없나 보다. 널 내보낸 거 보면.”

“…….”

“내가 한번 겨뤄줄게.”

“…….”

“그래도 지면서 배우는 거야. 바둑은.”

재인이 한껏 빈정거리는데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재인은 자신 때문에 예나가 겁먹었다고 생각하여 피식 비웃었다. 재인이 순서를 막무가내로 정하여 흑돌을 잡게 되었는데도 예나는 가만히 있었다.

예나의 시선은 재인의 등 너머 A조 앞. 어느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바둑학원 앞에서 만났던 여자. 모자를 푹 눌러 쓰고서 막무가내로 자신의 손을 잡았던, 낯선 길에 자신을 홀로 버려두고 떠났던 여자. 분명히 그 여자였다. 그 여자가 바둑대회 감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인이 먼저 바둑판 중앙에 돌을 올렸다.


“뭐해. 빨리해야지.”

재인이 멍하니 있는 예나에게 재촉했다. 바둑알 통에서 돌을 꺼내는 예나의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심장이 이 대회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듯이 달음박질쳤다.

안 돼!

빨리. 어서! 시합에 집중해야 하는데!

의지와는 달리 눈물이 차올라 눈앞을 방해했다.

겨우겨우 집은 바둑알이 아무렇게나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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