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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경찰서로 (124/183)


124. 경찰서로
2022.07.06.


낮 12시. 정오.

같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지헌은 정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언제부턴가 정오도 휴대폰 진동이 울리면 ‘아, 12시가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일상이었는제, 지헌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은 건 오랜만이었다.

정오는 슬슬 예나와 지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도 그냥 같이 갈걸 그랬나.’

아니지. 둘 다 빠지면 너무 눈치 보이지. 바둑대회일 뿐인데.

정오는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결혼 발표를 하게 되면…….’

지헌은 결혼식도 하고 신혼여행도 가자고 했다. 하지만 같은 본부에서 두 사람이나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건 너무 타격이 크지 않을까.


‘내가 다른 본부로 옮기는 게 나으려나?’

예나의 바둑대회로 시작한 걱정이 멀리 흘러갔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정오에게 고은주 대리가 물었다.


“뭐 하세요? 점심 드시러 가셔야죠?”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무슨 생각인데요?”

“혼인 사실을 공식화해도 된대요.”

일 얘기겠거니 생각하여 물었던 은주의 표정이 뚱해졌다. 은주는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난리 나겠네요.”

“그러니까요. 한 번에 터트릴 것인가, 아니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공식화할 것인가 선택하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판단이 안 서네요.”

“뭐 그런 걱정을 하세요.”

은주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대리님 옆에 남자 세 명만 있으면 이사님이 알아서 공표하실 텐데요, 뭐.”

“…….”

“이사님이 뻥 하고 터트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고, 일이 터진 다음에 대리님은 이사님을 타박하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걸로 한 20년은 우려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산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은주의 해결책에 정오는 웃고 말았다.

고은주와 정지헌. 서로는 서로를 마뜩잖게 생각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정오는 은주와도 재미나게 잘 지냈다. 이따금 충동적이어서 사이다를 터트려주는 면까지 고은주와 정지헌은 꽤 비슷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랑 잘 맞나 봐.

정오가 은주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고 대리님, 그거 아세요? 대리님이랑 정지헌 씨랑 은근히 성격 비슷한 거.”

“이 대리님, 지금 저랑 싸우자는 거예요?”

역시, 정오의 이야기에 은주는 발끈했다.


“아뇨. 좋은 얘기예요. 두 사람의 빠른 판단력과 이성적인 면이 비슷하단 얘기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고 대리님을 좋아한단 얘기예요.”

“그런 고백은 조금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요. 이사님이 어디 이성적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거기다가 기 세죠, 까탈스럽죠.”

정지헌 이사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결점을 몇 가지 열거하던 고은주 대리는 말을 멈추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지헌과 이정오 대리는 부부 사이인데, 자신이 아내의 귀에 대고 남편의 결점을 지적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요. 대리님이 이사님이랑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제가 이사님을 더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은주는 곧장 험담을 수습했다. 정작 정오는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몰래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지헌의 연락이라고 생각하여 냉큼 확인했는데, 뜻밖에도 예나였다.

정오는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나 공주! 대회 끝났어?”

하지만 예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정오의 표정은 어둡게 굳어갔다.


[엄마. 그 아줌마 봤어. 예나 이상한 데로 데려갔던 아줌마.]

아이는 놀랐을 텐데도 제법 똘똘하게 소식을 전했다. 덕분에 정오는 예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서.”

[여기 대회에서.]

“대회장 안에서?”

[응.]

“이예나.”

[응.]

“대회장이랬지? 주변에 사람 많지?”

[응.]

“떨지 마. 괜찮아.”

일단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녀 또한 심장이 파득파득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자신에게 연락을 했다는 건 눈앞에 지헌이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래도 곧장 지헌이 쫓아오긴 하겠지만 그사이에 여자를 놓칠 수도 있다. 아이를 보호해야 하고, 여자를 붙잡아야 한다.


“사진 찍어. 그러고 소리쳐!”

사진 찍어. 소리쳐. 둘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예나야. 넌 지금 엄마한테 전화도 했잖아. 그러니 할 수 있어!


“엄마! 하고 외쳐!”

다급한 당부. 전화는 대답도 없이 끊겼다.

하아, 하아, 하아.

정오는 100미터 달리기를 질주한 듯 숨이 벅찼다.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끊자마자 심장을 부여잡고 거칠게 호흡하는 정오를 보고서 은주가 놀라 물었다.


“예나가. 예나가. 예나가!”

“가요, 가요, 가요!”

“…….”

“얼른 가요. 얼른!”

‘예나가’라는 말의 반복으로 사태를 짐작한 은주가 바로 택시를 잡아주었다. 택시가 곧장 두 사람 앞에 섰다. 은주는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얼른 가서 해결하고 오세요.”

“고 대리님 고마워요. 갔다 올게요.”

정오는 은주의 행동력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차에 올랐다.


 

*

예나가 기권 선언을 하는 듯 손을 번쩍 들어 보이자마자 지헌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대국장 출입문을 향해 뛰었다.

잠겨 있지 않은 출입문까지는 꽤 돌아가야 했다. 간신히 열린 출입문을 찾아 안으로 진입했을 때, 콱 하며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상아색 옷을 입은 여자였다.


“죄송…….”

그사이에 대국장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아!”

분명히 예나 목소리였다. 지헌은 여자에게 사과를 하다가 말고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남자 감독관 한 명이 급히 다가와 여기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듯 막았지만 지헌은 가뿐히 뿌리쳤다.

지헌이 내내 지켜보던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 예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도 모두 대국을 하다 말고 예나를 쳐다보았다.


“예나야!”

“아빠아!”

지헌은 급히 뛰어가 예나를 안아 들었다.


“예나 많이 놀랐어?”

“아빠, 저기!”

아이를 달래주려 물었는데, 아이는 아빠한테 안기자마자 출입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 나간 아줌마가 나 데려갔던 아줌마야. 학원 앞에서 이상한 데로 데려갔던 아줌마!”

지헌은 흠칫 뒤돌아보았다.

그럼 아까 어깨를 스쳤던 그 여자가?


“잠깐만 여기 있어봐.”

지헌은 예나를 자리에 내려놓고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경기장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예나에게로 돌아온 지헌은 예나를 데리고 진행석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방금 전에 출입문 밖으로 나간 감독관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가까이 있던 총 책임 감독관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예나의 큰 소리와 대국장을 들락날락하는 지헌의 행동에 책임 감독관은 참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오늘 행사 감독을 맡은 감독관에 대해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독관 중에 수상한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그러는데요.”

“어떤 수상한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 딸이 언젠가 유괴당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를 끌고 가려던 여자와 오늘 본 감독관이 닮았다고 해서요.”

“아이가 그렇게 얘기했다는 말씀이시죠?”

감독관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 예나가 사진 찍었어.”

예나는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습이 아주 자그마하게 보였지만 식별이 가능한 사진이었다.


“이렇게 방금 전에 대국장을 빠져나간 사람입니다. 곳곳에 카메라도 많은데 CCTV 녹화본을 보게 해주시면 특정하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요. 아니면 현재 이탈한 사람 명단이라도…….”

“지금은 행사 진행 중이라 어렵습니다. 대회 끝나고 다시 방문해주시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지헌의 말허리를 끊으며 책임 감독관이 말했다.

*

대회장 앞에 택시가 도착했다. 정오는 마침 대회장을 나서는 지헌과 대회장 앞에서 재회했다.


“엄마아!”

“예나야!”

예나가 달려왔다. 정오는 예나를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응. 엄마, 근데 그 아줌마 못 잡았어.”

정오가 지헌을 바라보니 지헌이 대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예나 말로는 감독관으로 대회장에 와 있던 여자였어. 나랑도 지나치듯이 스친 것 같고.”

“스쳤다고?”

“내가 대회장 안으로 들어갈 때 대회장을 빠져나가던 여자였어.”

“…….”

“여자는 대회장 감독을 하다 말고 떠났어. 이탈자 명단이라도 알고 싶어서 감독관한테 사정을 얘기했는데 대회가 끝나고 다시 오라네. 하지만 협조해줄지는 잘 모르겠어. 일단 책임 감독관 연락처는 받아놓은 상태야.”

“엄마. 예나가 사진 찍었어.”

지헌의 설명이 길게 이어지자 예나가 끼어들었다. 예나는 순발력 있게 찍은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을 찍으라고 단호하게 얘기했지만, 정말로 아이가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하니 그 찰나를 담은 것이 더욱 신통하게 여겨졌다.


“우선 이거 가지고 경찰서에 가자. 경찰에 얘기해놓으면 맡아서 수사해줄 거야. 어쨌든 여기 보이는 여자 사진이 이전에 받은 동영상이랑 비슷하니까.”

정오와 지헌, 예나는 함께 경찰서로 이동했다. 경찰서로 향하며 정오가 배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배일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어 개인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배일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경사님, 안녕하세요. 예나 엄마 이정오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수화기 저편에서 예의 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느린 대답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예나 유괴 미수 범인 말인데요.”

정오가 화제를 꺼내니 배일의 반응은 좀 전보다 더욱 느려졌다.


[네. 말씀하시죠.]

“오늘 예나가 바둑대회를 갔다가 그 여자를 봤다고 하네요. 사진도 한 장 찍었고요. 경찰의 도움이 있으면 신원을 파악하기 수월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그럼, 경찰서로 와주셨으면 하는데. 시간 가능하십니까?]

“네. 지금 가고 있어요.”

[네. 서로 오셔서 형사과 생활범죄수사팀 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몇 분 정도 걸리십니까?]

“지금 출발했으니 20분은 걸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정오가 전화를 끊은 후 지헌이 물었다.


“바둑판이랑 동전파스 선물했다던 그 경찰?”

“응.”

“이름이 뭐야?”

“권배일. 권배일 경사님이야.”

세 사람은 배일에게 말했던 대로 딱 20분 후에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서 건물 앞에 배일이 나와 있었다.


“경사님, 나와 계셨네요.”

차에서 내린 정오가 배일을 보며 인사했다.

정오의 인사에 지헌도 배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기골이 좋은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경찰이라기에 우락부락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아주 훤칠하고 곱상한 미남이었다.

의외라 놀라웠지만 그보다도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지헌은 머리가 무지근했다.

이윽고, 가까이 마주 선 네 사람.


“예나야 안녕.”

“아저씨 안녕하세요.”

배일이 예나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예나가 인사한 후 지헌도 배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예나 아빠 정지헌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배일은 지헌이 먼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권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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