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어릴 때 이름이네요 (126/183)


126. 어릴 때 이름이네요
2022.07.13.


표지애. 27세. 무직.

한때 취직 준비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지금은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적당한 콘셉트를 찾기 전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배우고 계속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사는 젊은이다.

예나는 아르바이트 와중에 만난 아이였다.


“……동영상 제작물을 만든다고 했어요. 이미 아이 부모님하고도 얘기가 됐고, 같이 지켜볼 거라고. 아이가 유괴범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강하게 뿌리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절대 장난처럼 연기하면 안 되고 실제처럼 해야 한다고 했어요.”

표지애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날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저도 동영상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이라 좋은 주제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낯선 사람을 얼마나 잘 따라가는지, 얼마나 의심이 없는지 일깨워주는 콘텐츠잖아요. 모두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리얼하게 연기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의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죠. 학원 앞에서 아이를 잃어버려서 난리가 났습니다. 모르셨어요?”

순경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여자애랑 헤어져서 촬영장소를 떠나는 와중에 남자애가 ‘이예나!’ 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를 듣긴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시나리오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까?”

“당일에는 몰랐죠. 며칠 지나서, 연출 감독하고 연락이 두절되고 나서야 조금 이상하다 싶었죠. 그래도 보수를 현금으로 받긴 했으니까 문제 삼진 않았고요.”

“연출 감독을 직접 만나긴 했습니까?”

“그럼요. 당일에 현장에 있었죠. 아이의 눈에 띄지 않게 아주 멀리 떨어져서 우리 쪽으로 카메라를 비추고 있었어요.”

“연출 감독 연락처 좀 알려 주시죠.”

“근데, 말씀드렸듯이 이 번호는 없어졌어요…….”

표지애는 자신 없이 대답하며 휴대폰으로 검색한 연락처를 순경에게 내밀었다. 표지애의 휴대폰 화면에는 ‘연출 감독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이름이 안 쓰여있네요.”

“네. 이름은 잊어버렸고, 이메일이랑 폰으로 연락했어요.”

순경은 표지애가 내민 연락처로 직접 전화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표지애의 말대로 없는 전화번호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순경이 말했다.


“없는 번호라고 나오네요. 하지만 통화를 나눈 기록은 있겠죠?”

“제가 메신저로만 대화를 주고받아서…….”

“그럼 그 메신저 기록을 확인하면 되겠네요.”

“아니, 제가 그사이에 휴대폰을 바꿔서요…….”

도무지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는 진술이었다.


“하지만 그 연출 감독이 처음에 저한테 보낸 이메일은 남아 있어요!”

표지애는 다시 휴대폰을 끌어가 이메일함을 열었다. 오랫동안 이메일함을 뒤적거린 그녀는 이메일 하나를 찾아내 내밀었다.


“이게 그 사람의 이메일 주소예요.”

5월 12일에 발송된 이메일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작자는 영세 콘텐츠 제작사의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5월 13일에 촬영하는 동영상 제작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며 시간이 가능한지 물었다.


“10분 정도만 리얼하게 연기하면 20만 원을 벌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해요. 그리고 취지가 정말 좋잖아요.”

이메일을 차근차근 두 번 읽어본 순경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모든 상황이 설정일 뿐이라고 착각하여 유괴극을 벌였다니…….


“그런데 오늘은 왜 바둑대회 감독관을 하다가 도중에 떠나셨죠? 아이와 아이 아버님의 말로는 표지애 씨가 아이를 발견하고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던데요.”

“그날이라 너무 배가 아팠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거예요. 아이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고요.”

표지애는 이런 얘기까지 꺼내게 되어 무척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럼 자택 앞에서는 범행에 대해 왜 부정하셨습니까.”

“저는 범행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경찰들은 범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억울하잖아요!”

“…….”

“정말 억울해요. 좋은 취지로 연기를 했을 뿐이지, 고의가 아니라고요…….”

표지애의 호소에 순경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퇴근한 승규는 진서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후다닥 달려간 승규를 맞이한 건 소파에 지쳐 누워 있는 진서와, 그 앞에 앉아 조용히 TV를 보는 도빈과 도윤.


“애들 좀 봐봐.”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남편에게 진서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뚱뒤뚱 달려왔다.


“아빠!”

역시, 승규 또한 도윤의 모습을 보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인형처럼 깔끔한 앞머리 라인의 예쁜 공주님은 어디 가고, 영구가 다가오는가.


“너, 머리 다 어디 갔어.”

하나뿐인 예쁜 딸의, 쥐 파먹은 앞머리를 확인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빠가 잘라줬어.”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도윤이 해죽해죽 웃으며 실토했다.


“박도빈 이리 와!”

승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TV 앞에 앉아 눈치를 보던 도빈이 승규의 엄명에 쭈뼛쭈뼛 움직였다.


“박도빈, 너 왜 그랬어.”

“도윤이 머리가 더워 보여서.”

“그래서, 덥지 않게 머리를 잘라줬다?”

“응. 도윤이는 마음에 든댔어.”

“박도윤, 머리 마음에 들어?”

“응!”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는 그저 해맑게 대답했다.

진서가 벽을 보고 누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승규에게 말했다.


“얘기 계속 들어봐. 뭐라고 하나.”

“무슨 얘기를 계속?”

“도윤이 머리는 연습이었대.”

진서의 이야기에 한숨을 쉰 승규가 도빈에게 다시 물었다.


“미용사가 되고 싶어서 도윤이 머리로 연습했어?”

“잘 연습해서 예나 앞머리도 잘라주려고 그랬어.”

진실은 그런 것이었다. 승규가 다시 소리쳤다.


“야!”

“안 했잖아!”

도빈도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


“왜 하지도 않았는데 화를 내!”

“어쨌든 네 동생 머리는 이래놨잖아!”

승규는 도빈이 예나의 앞머리를 까까머리로 만든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어쩌면 지헌이 자신에게 죽음의 결투를 신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 동생한테만 그런 짓을 벌인 걸 하늘에 감사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야, 알았어?”

승규는 도빈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따끔하게 일렀다.


“남의 머리카락 건드리면 안 돼. 알았어? 네 머리카락도 물론!”

도빈은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쭈욱 내밀고는 자그마하게 대답했다.


“응.”

승규가 도빈을 타이른 후에야 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여보, 애들 데리고 외식할까?”

승규가 진서를 쫓아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서가 뒤돌아 승규를 불렀다.


“여보.”

“응.”

“도빈이 태어날 때 자기가 탯줄 잘랐지?”

뜬금없는 진서의 질문에 승규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멍하게 대답했다.


“그랬지.”

“잘 기억해봐. 그때 그 얼굴이 저 얼굴 맞아?”

“……맞을 텐데. 왜?”

“잘 생각해봐. 어디서 바뀌었는지도 모르잖아.”

“…….”

“그때 찍은 사진 있어?”

“……어딘가 있겠지?”

“찾아봐. 확인해야겠어. 내 아들 아닐지도 몰라.”

승규는 멀어지는 진서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용은 농담 같은데 표정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어서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

표지애가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지헌과 정오는 회사로 돌아가 일과를 마쳤다. 오후 7시가 넘어 경찰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표지애가 떠난 후였다.

외부에 있다가 저녁때 돌아온 배일이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형법에 따라서 미성년자약취유인죄가 될 거고요. 피의자의 유인으로 피해자가 움직였기 때문에 미수가 아니라 기수라고 봐야겠네요. 그리고 피의자가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사주한 자와 공동정범으로 처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성년자약취유인죄가 성립되는데, 구금되진 않나요?”

“도주 우려는 없다고 판단해서 돌려보냈습니다.”

“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미 여행가방도 다 싸 놓았다던데요.”

정오는 지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근거 삼아 다시 물었다. 정오의 질문에 배일이 유연하게 대답했다.


“가벼운 국내 여행이라고 합니다. 연락처도 있고, 계속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놓은 터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일 범죄의 사례를 보더라도 피해가 미미할 때는 불구속으로 수사를 진행했는데, 이 경우는 동일 범죄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약한 편이라서요.”

어쨌든 아이는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고, 다친 데도 없으니 피해자 측도 노여움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의중이 엿보였다.

배일의 대답을 들은 정오는 지헌을 바라보았다. 낮에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지금 또한 그랬다. 어쩌면 지헌이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의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피의자에게 범행을 사주한 사람을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잡을지는 까마득하지만…… 뭐 방법이 있겠죠. 경찰을 믿어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결국 정오는 배일의 설명에 끄덕여주고 말았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이삿날 선물을 건네던 그 사람이 맞나 싶게 아주 사무적인 모습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깍듯한 태도이기도 했다.

정오는 배일에게 인사하고 지헌과 함께 경찰서를 떠났다. 늘 자신과 걸음을 맞추던 지헌이 오늘따라 더딘 움직임을 보이자 정오는 잠시 기다렸다가 지헌과 걸음을 맞추었다.

잠시 후, 차에 오른 지헌이 시동을 켜려다가 나지막이 정오를 불렀다.


“정오야.”

“응?”

“너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얼굴 떠올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정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중학교까지 같이 올라간 친구들이 몇 명 있어. 그 친구들은 잘 떠오르지.”

“아니.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후로는 못 만난 친구.”

“그런 친구 자체가 없는 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안 나.”

지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정오는 역시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파트에 도착한 후, 지헌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정오를 먼저 집으로 올려보냈다.

답답했다. 이 꽉 막힌 속을 풀지 않으면 며칠간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 같았다.

자그마치 24년 전의 기억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권배일 경사는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잠시 어울려 지냈던 친구와 닮았다.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바둑판의 사인…….

지헌은 고민 끝에 김진구에 대한 뒷조사를 맡긴 카운슬러에게 연락했다.


[네. 고객님.]

“경찰 한 명 신상 좀 파악할 수 있을까요? 다른 건 필요 없고, 이름이 바뀐 기록이 있는지, 그것만 알아봐 주시면 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빠르면 한두 시간이면 됩니다.]

지헌의 요청에 카운슬러는 흔쾌히 대답했다. 지헌은 카운슬러에게 권배일의 이름과 소속을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초조할 정도로 길었던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답변이 왔다.

*

지헌은 곧장 광진경찰서로 향했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라 배일이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있다면, 그래서 만날 수 있다면 오늘 만나야겠단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하지만 형사과 앞에서 지헌은 주춤했다.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추는 것이 옳은가, 폐가 되지 않을까.

지헌이 망설이는 사이에 형사과의 출입문이 열렸다.


“누구 찾으세요?”

문을 열고 나온 경찰 한 명이 지헌을 보고 물었다.


“네. ……권배일 경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정지헌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용건을 밝혔다.


“잠깐만요.”

다시 안으로 들어간 경찰이 배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배일이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배일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몇 걸음 앞에서, 출입문 밖을 바라본 배일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배일은 지헌을 알아보고서도 굼뜨게 움직였다. 마치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차고 있는 사람처럼.

이윽고 문이 열렸다.


“경사님.”

“네, 예나 아버님. 무슨 일로…….”

“혹시 유수일이라고 아십니까?”

그를 형식적으로 대하는 배일에게, 지헌은 성격대로 곧장 물었다.

흠칫하며 배일의 두 눈동자가 균형을 잃은 듯이 흔들렸다. 그 반응이 지헌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미 배일의 오래전 이름을 전해 들었기에 더는 확인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친구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친구가 모른다고 한다면, 자신 또한 그 이름을 더는 입 밖으로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길게 정적이 흘렀다. 배일의 대답은 아주 늦게 돌아왔다.


“제 어릴 때 이름이네요.”

긴장하여 굳어 있던 지헌의 표정이 깊은 탄식과 함께 풀어졌다. 두 눈에 얇은 눈물막이 생긴 지헌이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수일아.”

“…….”

“나 기억 안 나? ○○초등학교 바둑영재반.”

배일에게는 지헌과 같은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많은 고민과 생각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한참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나.”

“…….”

“안녕 지헌아. 오랜만이다.”

아주 건조한 대답. 하지만 지헌은 배일의 실금 같은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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