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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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이름
2022.07.16.
지헌은 밖으로 나가자는 배일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경찰서 건물 뒤 계단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자꾸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의자가 없는 데서도 털썩털썩. 흙바닥에도 털썩털썩. 옷이 더러워진다는 걱정 없이, 친구와 노는 것이 마냥 좋아서 계속 놀 수만 있다면 밤도 새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한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은 선명하지만, 사이가 멀어진 후 친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교실이 죽 늘어선 복도에서 간혹 마주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어색한 마주침도 사라졌다. 전학을 갔다는 소식은 뒤늦게야 들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왜 이름이 바뀌었니. 어떻게 경찰이 되었니.
많은 것들이 궁금했지만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한 지헌을 배려하듯, 배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모 댁에 양자로 가게 됐어.”
“그런데, 이름까지 바뀌었네.”
“이모부 집안의 항렬자 문제 때문에. 이모부가 ‘수’ 자 돌림이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쓸 수 없게 됐어.”
“…….”
“어머니 한 사람 나를 떠난 것뿐인데 그렇게 인생이 달라지더라.”
지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슬픔과 상실의 크기를 그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이름이 익숙해. 그 이름으로 살았던 건 잠깐 꾼 꿈이었던 것 같고.”
정작 배일은 오래전에 잠깐 알던 사람을 얘기하듯 덤덤한 말투였다.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그 여백마다 빈집처럼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구나.
“지금은 어떻게 지내?”
“보이는 대로야. 경찰이고, 혼자 살고.”
“네가 경찰이 될 줄은 몰랐어.”
“그럼 내가 바둑기사라도 될 줄 알았어?”
배일이 지그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농담 같은 물음이 새의 울음처럼 먹먹했다.
“너는 이번에 결혼한 거지? 축하한다. 예나처럼 야무진 딸이 생긴 것도 축하하고.”
“기억상실증이었어.”
지헌도 오래전 친구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듯, 묻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어쩌면 정오를 따로 알고 있었던 배일에게, 매정한 아빠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정오를 찾지 않은 건 아니고, 기억을 잃어서 모든 걸 잃어버렸었던 거야.”
“이제 기억은 다 돌아왔고?”
“아니. 그저 과거를 추적해서 정오랑 예나를 발견했을 뿐이야. 계속 기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긴 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배일이 한참 후에 물었다.
“기억을 잃어서 어땠어?”
“공허했지. 7년 동안은 인생이 재미가 없었던 것 같아.”
“…….”
“정말 신기한 게, 7년 전의 기억은 잃었는데, 어렸을 적 기억은 더 또렷이 떠오르더라.”
“…….”
“널 만나려고 그랬나 봐.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지헌의 진지한 목소리에 배일의 눈이 커졌다. 배일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세월을 거슬러 그때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헌에게는 아픈 확신이었다. 친구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게 있다면 미안해.”
“……넌 잘못한 게 없지.”
“어머니가 너한테 상처 준 것도 대신 사과할게.”
이윽고 배일은 고개를 내렸다. 차마 지헌을 쳐다볼 수도 없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이제 와 듣는 사과는 무의미하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지헌은 무거운 이야기를 바로 접고 화제를 돌렸다.
“언제 시간 돼? 우리 집에 초대할게. 정오랑 예나한테도 소개하고…….”
“아, 미안하다.”
“…….”
“나는 이제 곧 떠나. 지방으로 발령 신청했거든.”
“언제 떠나는데?”
“빠르면 다음 주에. 날짜는 아직 안 나왔어.”
“…….”
“예나 사건 끝까지 챙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안해.”
지헌이 어떻게든 이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제안했으나 배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쨌든 알아봐 줘서 고마워.”
친구의 정제된 미소에 지헌은 다시 또 먹먹해졌다.
*
일이 있다고 하고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정오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예나를 잃어버렸던 그날, 정오는 예나의 어린이집 가방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흘려 그린 듯한 세련그룹의 로고와 함께 의미심장한 문장이 적혀 있었던 쪽지였다.
- 외모는 엄마, 성격은 아빠. 반씩 닮은 아이네요.
오늘 정오는 배일에게 쪽지 원본을 넘겨주었다. 누군가는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이 엄마라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표지애라는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연출감독이라는 사람이 범인일 터였다.
하지만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일까? 모두 꾸며낸 말은 아닐까?
어쨌든 정오와 지헌의 관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누군가가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지헌 씨 어머니도 아닐 테고, 채은비도 아닐 테고…… 채은엽?’
정오는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만약 채은엽이 범인이라면 그냥 겁만 주고 끝냈을 것 같진 않았다. 채은엽은 더 악랄한 짓을 했을 것이다.
혹시 제삼자는 아닐까.
‘그러고 보니 지헌 씨 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정지헌의 이복형, 세련식품의 대표이사 사장 정지태. 아버지 정재광의 뒤를 이어 세련그룹을 책임질 인재. 지헌과는 달리 일에 빠져 사는 인물…….
아무래도 이복형제니만큼 서로 갈등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지헌에게 아이까지 있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면 견제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아니지. 우리 집이 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정오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을 때, 입술을 오리처럼 삐쭉 내민 예나가 다가왔다.
“엄마, 나는 삐쳤어.”
“왜?”
“아빠가 안 와서.”
“아빠한테 삐쳤어?”
“응. 아빠는 예나가 기다리는 걸 잊어버렸나 봐.”
예나는 심통이 난 얼굴로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예나에게는 오늘 벅찬 일이 있었고 평생의 바둑친구 아빠와 아직 회포를 풀지 못했다.
그래도 아빠도 바쁘겠지 생각하며 내내 묵묵히 기다렸는데 10시가 다 되어가니 울컥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정오는 그런 예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끌어안아 다독였다.
“그러게. 아빠가 왜 안 오지?”
그 순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품에 안겨 위로받던 예나는 금세 엄마를 뿌리치고서 현관 쪽으로 달려나갔다. 심통 난 얼굴은 풀지 않았다. 아빠한테 화가 났다며 따질 요량이었던 것이다.
“아빠 나쁘……!”
“예나야, 이게 뭐지?”
하지만 예나는 아빠의 손에 들려 있는 봉지를 보고는 곧장 표정을 바꾸었다. 아이스스낵 몇 통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소리에 예나의 눈이 빛났다.
“아빠 땡큐!”
예나는 날름 지헌의 손에 들린 봉지를 낚아채 갔다. 정오가 부랴부랴 현관으로 나왔을 땐 이미 예나가 아이스스낵의 포장을 뜯어버린 후였다.
정오는 지헌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 밤에 아이스크림을 사 오면 어떡해.”
“그냥 얼음이야 얼음.”
지헌의 대꾸에 예나도 한몫 거들었다.
“맞아. 그냥 얼음! 과일맛 나는 얼음!”
양 볼에 얼음을 그득 넣고서 오물오물 소리치는 아이가 귀엽긴 했다.
“그래도 한 번에 몇 개씩 사 오지 마. 얘는 한자리에서 다 먹는단 말이야. 오늘 못 먹게 하면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몰래 다 먹는다고.”
“알았어.”
정오의 핀잔에 지헌이 답했다. 길게 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경찰서를 나설 때만 해도 어두웠던 표정이 이제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았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정오가 먼저 묻기 전에 지헌이 말을 꺼냈다.
“정오야.”
“응.”
“나, 24년 전 친구를 만났어.”
“아까 말한 게 그거야?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정오는 제 일처럼 반기며 물었다.
“누구야? 오늘 대회에서 만났어? 감독관이야? 아니면 경찰?”
“바둑기사가 될 줄 알았던 친구인데 경찰이 됐어.”
“오늘 경찰서에서 만난 거야?”
“권배일 경사야.”
흥분하여 높아져 있던 목소리가 돌연 가라앉았다.
“……어?”
“권배일 경사가 내 친구였다고.”
“처음엔 몰라봤잖아. 뒤늦게 기억이 난 거야?”
“이름이 달라졌거든. 예전에는 유수일이란 이름이었어.”
유수일. 언젠가 정오도 지헌에게 들은 적 있었던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지헌의 바둑영재반 친구. 엄마가 갈라놓아 어울리지 못했던 똑똑한 친구.
그때 지헌에게 들었던 유수일이라는 친구에 대한 묘사와 현재 권배일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 정오도 놀랍기만 했다.
“이름이 달라졌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모 댁에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서 이름을 바꿨대.”
인생이 달라진 만큼 이름도 달라졌다. 얼마나 아픈 시간들이었을까.
“표정은 어땠어?”
“덤덤해 보였어.”
“……오빠 기분은 어때?”
“그냥, 이상했어.”
그때의 기분을 전하는 지헌 또한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오는 그 말끝의 공백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소중했던 이를 만난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더 클 때의 그 마음. 정오도 잘 아는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지. 소중한 걸 되찾아도, 그때로 돌아갈 순 없어.”
“…….”
“그냥 지금 최선을 다해서 사는 수밖에 없어.”
지헌의 말에 정오도 조용히 끄덕였다. 그사이에 저 멀리 떠났던 예나가 돌아왔다. 한 손에는 아이스스낵 통을 들고서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은 예나가 돌연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빠 여기 앉아봐.”
지헌은 분부대로 바닥에 앉았다. 서 있는 예나와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예나는 지헌의 귀에 대고 말했다.
“ASMR 들려줄게.”
예나는 얼음을 입안 가득 넣고 지헌의 귀에 대고서 와그작와그작 씹어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소리였다. 간지러움과 우스움을 참기 어려운지 지헌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풉풉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예나 장난 그만 치고 얼른 이 닦고 자야지.”
“응.”
한참 동안 아빠를 픽픽 웃게 한 예나 공주는 엄마의 잔소리에 재빨리 얼음통을 비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밤이 늦은 시각이라 예나는 금방 잠들었다.
예나를 재운 후 거실로 나온 지헌은 돌연 한쪽 발을 들고 고개를 기울인 채 뜀뛰기를 했다. 지헌의 우스운 행동에 웃음을 터트린 정오가 물었다.
“그게 뭐야. 왜 그래?”
“아까 예나가 ASMR 들려줄 때, 귀에 얼음이 들어갔거든.”
영문도 모르고 웃기만 했던 정오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아직 안 빠진 것 같아.”
“얼음이 귀에 들어가면 바로 얘기를 해야지!”
“원래 그런 건 줄 알았지.”
아, 이 맹추.
정지헌은 딸바보가 아니라 그냥 바보야 바보.
아빠는 귀에 얼음이 들어가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정지헌은 이보다 최선을 다해 살 수는 없다 싶도록, 너무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얼음이 녹았으면 점성이 좀 생겼을 텐데. 괜찮을까?”
“응. 깊이 들어가진 않았어. 씻고 오면 빠질 거야.”
정오의 뒤늦은 걱정에 지헌이 가뿐하게 대답하고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헌이 씻는 사이에 식탁 위에 놓아둔 지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전화는 그대로 흘려보냈으나 또다시 전화벨이 울려 정오는 휴대폰 앞까지 쫓아갔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내가 대신 받아도 되겠지.
정오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님.”
[우리 새아가구나.]
“네. 지금 지헌 씨는 화장실에 있어서요. 안녕하셨어요.”
[그래. 그래그래.]
정오가 반갑게 여겨주니 저편에서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헌 씨 씻고 나오면 바로 전화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새아가가 지헌이한테 전해도 된다.]
“네, 아버님. 그럼 제가 전할게요. 무슨 일이신데요?”
[일요일에 시간 괜찮으면 여기 놀러 와도 좋을 것 같은데.]
지헌의 가족들을 본가로 초대하고 싶단 연락이었다. 정오가 대답을 하기 전에 지헌이 다가왔다. ‘아버님’이라는 말이 들려오자마자 냉큼 달려온 것이었다. 지헌이 정오가 들고 있던 전휴대폰을 가져갔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응. 그래. 지헌아. 일요일에 네 가족들 데리고 집에 오지 않으련?]
재광의 제안에 지헌은 정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요일이면 내일모레.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정오가 곤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쉬이 대답하지 않는 지헌에게 재광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네 형도 널 보러 오겠다는데 말이야.]
“형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