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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엿 맛 (128/183)


128. 엿 맛
2022.07.20.


다음 날 아침.

함대근은 낯선 집 침대 위에서 홀로 눈을 떴다.


“여기가…….”

눈을 끔뻑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가 있으니 호텔은 아닌 것 같고, 스폰서를 해주는 파트너의 집도 아니었다. 화장실에선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청혼을 하고 술을 마시긴 했는데…….”

어제, 대근은 은비에게 청혼했다. 무의미한 만남은 하고 싶지 않아 일찍 반지를 내밀었다. 은비는 처음엔 놀란 듯 망설였으나 고마워하며 그 자리에서 반지를 꼈다.

은비와의 결혼은 대근에게도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대근은 은비의 외모나 나이뿐 아니라 집안까지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자산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100분의 1이나 될까 말까 한 궁핍한 집안이지만 자신이 갖지 못한 걸 갖고 있었다.

은비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법조인이며, 장인어른이 될 채서복은 대법원장 얘기까지 나오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런 집안과 혼인하는 것은 무척 명예로운 일이 될 터였다.

은비의 승낙으로 기분이 좋아진 대근은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그래도 웬만해선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마시진 않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 옆 협탁 위, 잘 개어진 자신의 옷으로 손을 뻗었을 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은비가 나왔다.


“일어나셨어요? 속 안 좋으시죠. 꿀물 드세요.”

은비가 식탁에 올려놓은 컵을 들고 대근에게로 다가왔다. 은비가 건네는 꿀물을 받아마신 대근이 이전의 태도와는 달리 어수룩하게 물었다.


“은비 씨, 근데 왜 제가 여기서…….”

“이제 결혼할 거니까 신부가 어떻게 사는지 확인해봐야 한다면서요.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시고선.”

은비의 웃음을 머금은 대답에 대근은 끄응 신음 소리를 내며 제 이마를 감쌌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감사하고요.”

“뭘요. 얼른 씻고 아침 드세요. 오늘 바쁘시다면서요.”

“근데 은비 씨, 제가 어제 일이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우리 한 번만 더…….”

“어? 잠깐만요. 친구한테 전화가 왔었네요. 저 전화 좀 할게요.”

은비는 유연하게 대근의 청을 피해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

함대근으로부터 청혼을 받았고 인사불성으로 취하게 하여 집에 데려오는 데까지도 성공했다. 대근 또한 자신이 은비와 밤을 보냈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제 잠잠히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나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거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거야. 원정출산 핑계를 대고 결혼식 후에는 바로 미국으로 떠나면 돼. 그러면 이 남자에게서도 벗어나 편안히 지낼 수 있겠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의지에 불타게 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고 나니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

*

승규는 밤새 사진 폴더를 뒤적거려 사진을 찾아 진서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도빈이 탯줄 자를 때 사진이고, 이게 처음 씻고 나온 사진.”

컴퓨터 모니터에 시뻘건 고구마가 우거지상을 하고서 울고 있는 사진과, 시뻘건 고구마가 잘 씻고 나와 무념무상의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 번갈아 돌아갔다.


“둘 다 그냥 원숭이네.”

그래도 우리를 닮은 구석이 좀 보이는 것 같아, 라고 대답하려던 승규에게 진서가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봐봐. 좀 다른 거 같지 않아? 이 사이에 애가 바뀐 거 아니야?”

씻기 전과 씻은 후의 사진이 달라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진서의 표정은 몹시도 진지했다.


“잘 생각해봐. 병원에서 바뀌었을지도 몰라. 이 병원, 엄청 큰 병원이잖아.”

“…….”

“자기 어렸을 때 도빈이처럼 천방지축이었어? 동생 머리 막 자르고, 조형물에다가 가루약 뿌리고 그랬어?”

“아니. 난 안 그랬지. 엄청 착하고 순했지.”

“그래! 나도 안 그랬어!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딱 그만하고. 엄마도 나는 거저 컸다고 그러셨다고.”

영구머리 도윤이 저 멀리서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을 텐데, 이제 한숨이 먼저 나왔다. 아니,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았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한스러워하며, 진서는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갓난아기 때의 도빈의 모습이 한 컷 한 컷 지나갔다.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사랑스러움이 있었다.


“사진 참…… 많이도 찍었다.”

첫 아이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언제나 아이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고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몇 년 전의 추억을 그리며 멍하니 사진을 훑던 진서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진서가 급히 승규를 불렀다.


“여보, 이거 봐.”

“응? 왜?”

도윤의 밤톨 앞머리를 마사지하며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주문처럼 외고 있던 승규가 다가왔다.


“이것 좀 봐.”

“어머니 가게 사진? 이게 왜?”

모니터 화면에 진서의 어머니가 백일을 갓 지난 도빈을 안고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오래전 진서의 부모님이 화양동 시장에서 ‘진서꽃집’을 운영하던 시절. 그 꽃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가게 밖을 보라고.”

“오!”

사진을 가까이서 확인한 승규도 탄성을 자아냈다. 아기띠를 하고 걸어가는 정오가 보였다. 아마도 정오가 안고 있는 아이는 예나일 것이다.

진서꽃집과 국순백반이 가까이 있었기에, 정오 또한 그 길을 많이 지나다녔던 것이다.


“아빠, 왜? 뭐 봐?”

승규와 진서의 반응에 호기심이 생긴 도빈도 달려왔다. 승규는 도빈을 안아 들고는 모니터화면 속의 예나를 짚으며 물었다.


“도빈아, 이게 누군지 알겠어?”

“몰라. 누군데?”

“예나잖아.”

“와아.”

도빈은 정오의 품에 폭 파묻혀 코를 빼꼼 내밀고 있는 작은 아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예나는 애기 때도 이쁘다!”

사랑을 한다면 박도빈처럼.

예나가 영구머리를 하고서 나타나도 도빈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일 것이다.

도빈의 탄식에 승규와 진서는 픽 웃고 말았다.


“엄마, 우리 예나 또 찾아보자!”

“그래. 한번 찾아봐.”

오늘은 하루 종일 옛날 사진에서 예나 찾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아 진서는 흔쾌히 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 순간 사진이 넘어갔다.


“어어?”

컴퓨터 앞을 떠나려던 진서는 다시 모니터 화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전과 똑같이 진서의 엄마가 도빈을 안고 있는 사진이었고 가게 밖의 상황만 달라졌다. 아기띠를 한 정오가 사라진 그 자리에 또 진서가 아는 얼굴이 보였다.

경찰복이 아니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훤칠한 남자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권배일 경사였다. 그 또한 정오가 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국순은 오랜만에 정오와 함께 쇼핑을 나섰다.

내일 점심, 딸이 재광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 지헌의 이복형, 정지태도 함께한다고 하니 국순 또한 신경이 쓰였다. 딸에게 예쁜 옷을 해 입히고 싶었다.

깔끔한 블라우스를 정오의 옷에 대 보는 국순의 눈빛은 진지하고 예리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정오가 입술을 내밀고서 말했다.


“엄마도 가지.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사부인도 없는데 가서 뭐해.”

듣자 하니 장영미 여사는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영미가 여행을 떠난 틈을 타 재광이 아이들을 부른 건지, 재광이 아이들을 초대한다고 하여 영미가 여행을 떠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영미가 있든 없든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현명한 사위 지헌이 있으니 큰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가 생겨도 지헌이 모두 해결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새 국순은 사위가 든든해졌다.


“사부인께서 아들을 정말 잘 키웠어.”

지헌에 대한 무한한 호감은 사부인에 대한 칭찬으로 옮겨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사실 사부인이 고마워지네.”

“엄마.”

장영미 여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정오는 국순의 평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좋은 면을 봐주려고 노력하는 엄마의 성품은 존경했다.

나도 언젠가 엄마처럼, 내가 원망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해주는 아량을 갖게 될까.


“내가 엄마 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헌 씨의 어머니를 지금보다 훨씬 더 원망하고 미워했을 거야.”

엄마와 딸 사이는 운명이다. 엄마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엄마가 앞서가면, 그 길이 옳은 길이다 생각하게 된다.


“나는 절대 엄마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겠지만, 내가 예나한테는 엄마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오가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

그리고 시간이 금세 흘러 다음 날.

흰색 원피스를 입은 예나와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정오는 꼭 닮은 모습이었다. 국순은 정오의 옷매무새를 훑어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쫄지 말고 체하지 말고 밥 잘 먹고 와.”

“응. 다녀올게.”

정오는 국순에게 인사하고 지헌, 예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지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예나에게 인사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를 부르던 정오는 고개를 돌려 지헌을 바라보곤 놀리듯 물었다.


“오빠 지금 긴장했어?”

“아니.”

“긴장한 것 같은데?”

“…….”

“형이랑 1년 만에 만나는 거라고 했지? 불편한 사이라서 그래?”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지헌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지헌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한테는 네가 생각하는 화목함 같은 건 없어. 특히 형까지 온다면 식사 자리에서도 일 얘기만 나올 게 뻔하고.”

“…….”

“그러니까 너무 마음 상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어떤 면에서 긴장한 건 사실이었다.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한 가족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부디 오늘이 잘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헌은 조용히 차를 몰았다.

커다란 대문을 지나 건물에 이르는 동안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예나의 입이 벌어졌다. 공원에서만 보던 분수대가 집 안에 있다니! 아파트도 아닌데 정원이 있다니!


 


“아빠도 여기서 살았어?”

“그랬지.”

“몇 살 때까지 살았어?”

“열아홉 살.”

“우와!”

“좋아? 집 마음에 들어?”

“응! 궁전 같아.”

예나의 탄성과 함께, 차는 궁궐 같은 이층집 앞에서 멈추었다. 건물 앞에 재광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들 와라!”

재광은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헌은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분이란 걸 처음 알았다.


“예나야!”

가장 먼저 예나의 이름을 부른 재광에게 예나가 야무지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저는 정예나예요.”

“그래! 나는 네 할아버지, 정재광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광은 예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예나와 눈을 맞추고서 말했다. 재광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 정오도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그래그래! 잘 왔다. 얼른 들어가자.”

정오를 따라 인사하려고 입을 벌렸던 지헌은 주춤하다가 인사할 기회를 놓쳤다. 정오가 이를 눈치채고 조금 웃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기다란 복도를 지나 다이닝룸으로 이동했다. 지헌이 이전에 이야기해준 것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그럼에도 놀랄 수밖에 없는 규모의 집이었다.


‘내가 정지헌에 대해 몰랐으니 사귀었지,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겠구나.’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겠구나.

문득 그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긴장감으로 어깨가 무지근하게 굳어갔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흘러가는 사이에 발걸음은 다이닝룸에 닿았다.

네 사람이 자리에 앉으니 직원이 물을 따라주었다. 집 안에서 레스토랑 같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형은요?”

“올 때가 됐는데. 네가 연락해봐.”

“올 때가 됐으면 오겠죠.”

지헌과 재광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예나가 정오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물맛이 신기해.”

“…….”

“물에서 엿 맛이 나.”

정오는 지헌과 재광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느라 예나의 말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예나가 소리를 높였다.


“엄마! 물이 엿 같다고오!”

정오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나야.”

정오는 엄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고, 예나는 못마땅한 듯 찌푸렸고, 재광은 뒤늦게 알아듣고서 껄껄 웃었다.


“그래, 맞아! 보리차에서 엿 맛이 나는구나.”

지헌과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무표정이었던 재광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엿의 재료가 보리지. 엿은 엿기름으로 만드는 건데 엿기름은 보리에서 나온단다.”

재광은 예나에게 또박또박 물맛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아주 똑똑하다더니 절대 미각까지 갖추고 있어! 역시 세련식품 정재광의 손녀야!”

재광은 예나가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주절대도 껄껄껄 웃으며 의미를 부여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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