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차별과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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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차별과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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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차별과 원망
2022.07.27.
지태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를 제일 의지했던 때가 있었어. 아버지 비서였던 새어머니가 이 집을 제일 많이 드나드셨으니까.”
“…….”
“그렇게 힘들어하시던 아버지가 새어머니의 임신으로 새 장가를 드셨을 때, 사실 나는 나한테 다시 엄마가 생겼다고 좋아했었어.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알았지. 새어머니는 내 친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걸.”
지헌은 묵묵히 지태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이 자신에게 이토록 길게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몰랐지.”
“…….”
“그 후에는 널 내내 질투했을 거야.”
형의 속마음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지태 또한 지헌처럼, 경첩에 녹이 슬어버린 채로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마음의 문을 고치지 못하고서 살아왔던 것이다.
“미안하다. 너도 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을 텐데.”
지헌이 어머니와 절연한 것을 들었는지 지태의 태도는 숙연했다.
“……형한테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는 몰랐어.”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고 말하는 지태는 자못 후련해 보였다.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딸 생긴 것도 늦었지만 축하하고.”
유난스럽지 않은 축하의 말을 전한 지태는 재광과 정오와 예나에게도 인사를 하고 바로 떠났다.
어쩌면 지태는 동생의 새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오래된 앙금을 털어버리고자 바쁜 시간을 내어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지태 덕분에 지헌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지태가 떠난 후에도 재광과 예나의 대국은 계속 이어졌다. 두 번의 대국 모두 예나가 이겼고, 재광은 져서도 껄껄 웃었다.
바둑을 둘 때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며 딱 그때 그 시절의 지헌을 엄하게 타일렀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렸을 때는 그토록 크게 보였던 아버지의 어깨는 이제 자신보다도 작았다.
선물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재광은 엊그제 해외출장을 떠났다가 샀다며 예나에게 색연필 세트를 안겨주었다. 예나는 선물을 받고서 방방 뛰다가 색연필을 들었다.
머리는 크고 몸통과 팔다리는 가느다란 2등신의 무언가가 종이 위에 쓱쓱 그려졌다. 개구리를 의인화한 건가 싶은, 나름 귀여운 그림이었다. 예나는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을 재광에게 가져갔다.
“할아버지, 이거 선물이에요.”
“이게 뭐지?”
“할아버지예요.”
맙소사.
정오는 당장 재광과 예나의 사이로 끼어들어가 그림을 수정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개구리 할아버지의 바지는 제대로 입게 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
“피카소가 여기 있었어!”
그런데 정오의 염려와 달리 재광은 그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손녀딸은 화가가 되겠구나!”
재광은 정말로 피카소의 재림을 확인한 듯이 그림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이제 저 그림은 재광의 회사 집무실 정중앙, 세련 그룹이라는 사명이 붙은 그 위에, 금테두리 액자에 둘러싸여 보관될 고귀한 운명이 되었다.
사탕을 만들고,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할아버지가 선물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집 안과 정원을 구경하고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덧 오후 늦은 시각이 되었다.
국순에게 저녁 식사 이전에 돌아오겠다고 한 터라 이제는 집을 나서야 했다.
가는 길엔 재광이 배웅했다. 반나절을 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재광도 이제 잠시 아들에게로 눈을 돌려 아들과 걸음을 맞추었다.
“그거 아니? 내 인생과 네 인생이 닮았어. 나도 네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줄까, 무등 좀 태워줄까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바쁘다 시간 없다 하며 미루다 보니 때를 다 놓쳤지 뭐냐.”
“…….”
“아빠들은 언제나 후회한단다. 아이는 절대 기다려주지 않거든.”
지헌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아버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또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의 인생이 이해되기도 한다. 어쩌면 할아버지들이 손주를 좋아하는 건 다 같은 이유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자식에게 해주지 못한 많은 것들을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도 이별은 왠지 아쉽다. 재광은 여전히 하트가 그득그득한 눈으로 예나에게 인사했다.
“예나야, 또 놀러와. 사탕 많이 만들어줄 테니까 자주 놀러와. 알았지?”
“네!”
“사탕 많이 먹으면 이 썩어요.”
지헌이 딴죽을 걸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건 괜찮아. 예나, 할아버지 전화번호도 알지? 자주자주 전화하고. 알았지?”
“네!”
“우리 새아가도 같이 와줘서 고맙다.”
“저도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재광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재광은 차가 대문 밖을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지헌은 여전히 많이 어색했다.
정오는 7년 전의 기억을 되짚어 지헌에게 말했다.
“7년 전에 말이야. 오빠가 아버님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어. 과자 공장 운영하신다고. 그래서 난 아버님이 과자 공장 공장장이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영 틀린 말은 아니야. 과자 공장이었던 사업이 이렇게 커진 거니까.”
“생각해보니 그때의 오빠는 그때의 나만큼이나 답답한 사람이었다. 오빠는 나한테 집안 얘기를 제대로 안 했어.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랬겠지만 7년 만에 다시 만나서 오빠의 정체를 알게 되니 당황스럽더라.”
정오가 들려준 이야기에 지헌도 반성했다.
서로에게 한 발짝만 다가간다면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였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재미있었어. 자주 와도 될 것 같아.”
정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소감을 전했다. 정오의 평에 지헌도 미소 지었다.
“아 그리고, 오빠의 형이 그렇게 멋있는 분인지 몰랐어. 실물이 100배 낫더라. 사진발을 그렇게 안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야.”
하지만 정오의 이어진 말에 지헌의 미소는 툭 풀렸다.
“오빠랑 닮았으면서도 느낌이 많이 달라. 그쪽은 좀 더 원숙하달까.”
“원숙한 게 아니라 늙은 거지.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데.”
정오가 형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이 듣기 싫은 듯 지헌이 한껏 툴툴거렸다.
*
“엄마아, 정오 왔어어.”
정오가 크게 부르는 소리에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국순이 현관으로 달려왔다.
“그래. 고생했네. 재미있었어?”
“응. 재미있었는데, 그래도 집이 좋네.”
시댁에서 내내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예나 엄마 이정오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이국순의 애교 많은 딸 이정오가 되었다. 아이처럼 엄마의 품으로 파고드는 딸을 국순은 꼬옥 안아 다독였다.
“우리 강아지는 이게 다 뭐야. 선물 받았어?”
국순은 자신에게 몸을 다 내맡기듯 기대있는 정오를 안은 채로 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나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걸 국순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탕 만들어주셨어. 사탕에 예나 이름도 써 있어! 이거 봐!”
“아이고. 신기하다. 할아버지는 마술을 할 줄 아시나 보네.”
“할머니 이건 마술이 아니고 수제사탕이야.”
예나가 통에서 사탕을 꺼내 국순의 입에 넣어주었다. 국순은 예나가 주는 것을 받아먹고 정오에게 물었다.
“괜찮았어? 별일은 없었고?”
“응. 아주 평화로웠어. 다들 좋은 말씀만 하셨고. 엄마, 근데 집에 맥주 있지?”
“냉장고에 두어 개 있더라.”
주방으로 건너간 국순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선 지헌에게 물었다.
“우리 정 서방도 고생했을 텐데 한잔하려나?”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정오는 다들 식탁 앞으로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국순은 그런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주 평화로웠다고 대답했으나 많이 긴장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맥주를 찾는 걸 보면.
작은 맥주캔을 순식간에 다 비운 정오는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소주까지 꺼냈다. 거사 하나를 잘 치러낸 자신에게 주는 상. 더운 날씨에 기분 좋아 마시는 술이었다.
결국 국순과 지헌도 반주를 한잔씩 하게 되었다. 정오는 술이 잘 들어간다며 계속 빈 잔을 채웠다. 국순이 정오가 소주와 함께 참외만 집어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참외 좀 그만 먹고 딴 것 좀 먹어. 얘는 참외 먹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 정신 못 차리고 또 그걸 다 주워 먹고 있어.”
“엄마! 지금 내 나이가 서른이야. 무슨 열두 살 적 얘기를 서른까지 해.”
“이 밤에 많이 먹어서 좋을 거 없어. 적당히 먹어.”
잔소리를 하고 나서 고개를 돌린 국순은 지헌과 눈이 마주쳤다. 모녀의 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지헌이 마음 쓰였다. 본가에 방문했으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사위가 안쓰러웠다.
“아니, 얘는 우리 집 돼지라 옆에서 안 말려주면 하도 먹어서 그러는 거야. 우리 예나 아빠는 많이 먹어도 돼.”
“어머니.”
“응. 그래. 예나 아빠.”
일부러 따뜻하게 내놓은 대답에 지헌이 돌연 심통을 부리듯 물었다.
“예나는 우리 강아지, 우리 공주님, 정오한테는 우리 돼지. 근데 왜 저만 그냥 정 서방, 예나 아빠입니까?”
“그냥 정 서방 아닌데. 우리 정 서방인데.”
“아무튼 차별이 좀 있으십니다.”
이 녀석이 소주 한 잔 마시고 취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국순은 마음 좋게 사위의 지적을 받아주었다.
“그래. 내가 미안했네. 그럼 우리 사위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어떤 동물이 마음에 드시려나?”
“글쎄요. 병아리?”
“…….”
“토끼? 다람쥐? 사슴?”
……절대 제 입으로 여우라곤 안 하는구나.
작고 사랑스러운 짐승의 이름만 늘어놓는 사위의 뻔뻔한 반응에 국순은 웃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예나를 재우러 들어간 틈에 국순은 지헌에게 조심스럽게 장영미 여사에 대해 물었다.
“아직 어머니랑은 연락 안 하는 거야?”
“제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같은 어머니의 마음이라서 그런가, 지헌의 덤덤한 대답에 국순은 자꾸 마음이 아파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라는 말. 정말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아니야. 너무 사랑해서 이길 수가 없는 거지.”
“…….”
“너무 소중해서 무너뜨릴 수가 없어. 너무 애틋해서 상처를 줄 수가 없어.”
“…….”
“어머니도 그럴 거야, 결국은. 우리 정 서방한테 돌아오게 돼 있어.”
왠지 국순은 확신이 들었다. 오늘 장영미 여사가 집을 지키지 않고 자리를 피한 건 지헌의 새 가족이 제 남편과 만이라도 편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어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지옥을, 아들은 아직 모를 수도 있다.
국순의 의견에 머뭇거리던 지헌이 가만히 물었다.
“어머니께서 제게 용서를 구하시면, 제가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래야지.”
“…….”
“받아줘. 두 팔 벌려서. 어린아이처럼.”
말끔한 조언을 건넨 국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정오가 방에서 나왔다.
“나도 이만 들어갈 테니까 둘이 좋은 시간 보내.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응,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안녕히 주무십시오.”
국순이 손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간 후, 지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의 눈이 고단해 보였다. 얼른 쉬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도 이만 자자.”
“오빤 들어가. 나는 이거 다 마시고 잘래.”
아직 병에 두어 잔 분량이 남아 있었다. 정오는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발그레한 모습도 예뻐서 지헌은 제지하지 못하고 턱을 괴고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을 홀짝이던 정오도 그 마음에 응답하듯 지헌과 똑같은 포즈로 지헌을 응시했다. 새삼 남편이 너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은 눈물을 부르는 법이다. 이 예쁜 걸 나 혼자 독점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남자에게도, 세상의 온갖 것들에도 미안해졌다.
“왜 그래 갑자기.”
지헌이 급히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사진을…….”
“…….”
“사진을 많이 못 찍어서 미안해…….”
“…….”
“예나 사진을, 더 많이 찍었어야 했는데…….”
깜짝 놀라 그녀에게로 바짝 의자를 끌어간 지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보여주었던 예나의 성장 기록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나의 사진을 실컷 보고도, 보지 못한 모습을 아쉬워하는 지헌에게 정오 또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엉뚱한 취중진담까지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
“이정오, 좀 자중해라.”
취한 사람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보석 같은 눈물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너 지금 너무 예뻐. 그거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