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31/183)


131.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22.07.30.


지헌은 얼마 전 정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7년 전의 정지헌은 그녀가 술 마시는 걸 싫어했더랬다. 정오는 지헌이 그랬던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이유만은 알 것 같았다.

이정오가 너무 예뻤다.

취한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가 잘 알고 있는데도 스멀스멀 욕구가 올라왔다. 지금도 이러니 사귀던 초반에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사진을 사방에서 찍었어야 했는데. 동영상도 많이 찍었어야 했는데…….”

정오는 자중하란 지헌의 충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예나의 이야기만 하며 후회의 눈물을 거듭 떨구었다. 맑은 눈물이 맺힌 영롱한 눈동자가 그 무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지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헌은 홀린 듯이 고개를 내렸다.

과일을 계속 집어 먹은 데다 예나의 사탕은 또 얼마나 빼앗아 먹었는지, 그녀의 숨결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울다가 붙들린 그녀가 주정을 멈출 수가 없는 듯 그의 입술 안에서도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하아, 입술을 떼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지헌이 못다 푼 탄식과 함께 정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린 물기가 색을 머금은 붓끝처럼, 그의 가슴을 도화지로 만들어놓고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나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나, 양심과 욕망 사이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지헌이 정오를 불렀다.


“여보.”

“응.”

“…….”

“왜. 여보.”

붉어진 눈을 반쯤 뜨고서, 정오 또한 화답하듯 그를 불렀다. 그가 경험했던 숨결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고뇌하느라 굳어 있던 지헌의 입술 사이로 다시 한숨이 터졌다.

그녀의 눈빛, 손길, 목소리.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정지헌은 이정오의 모든 것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드르르르.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정오는 알람을 끄려 손을 뻗었다가 흠칫 놀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내 옷 어디 갔어? 나 왜 이러고 있어?

안방이 아니라 안방의 옆방에서 곤히 잠들었다가 일어난 것이다. 잠옷까지 다 벗어버리고서.

아이와 한방을 썼던 7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으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제보다 더욱 심하게 과음을 했던 날에도 아침에는 아이의 옆에서 단정하게 눈을 떴다. 절대 그녀가 스스로 자연의 모습이 되었을 리는 없었다.

다행히 옷가지들은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옷을 갠 방식이 아주 신선했기에 정오는 누가 한 짓인지를 금세 알아챘다. 정오는 옷을 재빨리 챙겨입고서 방을 나섰다. 주방에서 국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사위는 두부를 썰어보랬더니 깍두기를 만들어놨어?”

“어머님이 1.5cm라고 하셨잖아요.”

“한쪽으로만 1.5cm로 썰면 되지 앞뒤양옆을 다 그래놨네.”

“그래도 제가 정오보다는 낫죠?”

“그걸 말이라고 해?”

이국순 여사는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말끝마다 웃음이 넘쳤다. 정오가 가까이 가서 보니 장모와 사위가 사이좋게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커플처럼 맞춘 앞치마에 정오는 왠지 눈이 시렸다.


 


“일어났어?”

국순과 말을 주고받던 지헌이 정오를 먼저 알아보고 물었다.


“오빠 회사 갈 준비해야지.”

“아이고, 그래. 얼른 준비해야지. 우리 이사님께서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면 쓰나.”

정오의 채근에 국순도 말을 보탰다. 결국 지헌은 앞치마를 벗고 주방에서 나왔다. 정오가 그런 지헌의 손을 끌어당겨 빈방으로 건너가 물었다.


“밤에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일?”

“아니, 내가 옷도 없이 자고 있길래.”

“많이 더웠나 보네.”

“허. 내가 모를 줄 알아?”

정오가 발끈해도 지헌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너무나 얄밉지만 길게 실랑이를 할 새는 없었다. 정오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경고했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

“또 그러면 똑같이 만들어버릴 거야. 안 봐줘.”

“음, 그게 더 괜찮겠는데?”

협박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찰싹! 결국 지헌은 정오에게 팔뚝을 얻어맞았다.


“아야. 아프다. 여보.”

지헌이 입술을 내밀고서 눈꼬리를 내렸지만 정오는 받아주지 않았다.


“7년 동안 오빠한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왠지 7년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변태를 보는 것 같은데?”

“지금 엄청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나 아무 짓도 안 했다. 정말로. 그리고.”

“…….”

“그걸 가지고 그런 반응이라면, 앞으로 우리의 부부생활은 참 놀랍고 신비하겠네.”

……신비할 건 대체 뭔데.

어처구니없어 한숨을 토해낸 정오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나 앞으로 술 안 마실 거다!”

“그래. 바라던 바다. 마시지 마.”

정오의 다짐에 지헌은 냉큼 자신의 소망을 얹었다.

이정오, 내가 얼마나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인지 넌 모를 거다. 평생.

*

집안의 평화로움과 확실하게 대비되는 하루.

바둑대회의 동행인으로 예나가 아빠를 선택해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근하는 바람에 처리하지 못한 일들은 월요일 아침부터 지헌을 괴롭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대법원장의 사임, 그리고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

청와대에서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한 판사는 이변 없이 채서복이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임명동의안이 회부되면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채서복 판사는 대법관이 되면서 인사청문회를 거쳐본 사람이라 별탈 없이 대법원장이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입안이 텁텁했다. 이제 채은엽 일가와는 연락하지 않고, 부모님도 왕래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채서복이 대법원장이 된다면, 왠지 세련그룹에 위해가 가해질 것만 같은 느낌.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던 채서복이 국회의원과 결탁하여 그룹에 압력을 가할 것 같은 무거운 예감이 스쳤다.

어쨌든 지헌의 하루에 채은엽이 깊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오후에는 최면상담센터를 방문했다.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상담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헌님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오늘은 배우자분이 같이 안 오셨네요.”

의사는 오랜만에 방문한 지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네. 일이 바쁘기도 하고, 오늘은 최면 말고 일반 상담을 했으면 해서요.”

“그게 좋겠네요. 최면 치료는 거부감을 덜게 되면 다시 시작하죠. 최근에는 기분이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새 가족들도 너무 좋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소속감을 느끼고 있고요. 오늘 아침엔 장모님 요리하시는 걸 보조했는데, 별로 한 건 없지만 요리가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요리는 처음 하는 것이고요?”

“아뇨. 7년 전엔 아내한테 요리를 해준 적이 있다고 하네요. 저는 기억나지 않지만.”

“…….”

“기억하려고 애써서 요리를 한 건 아닌데 그냥 즐거웠어요.”

대답하는 지헌의 입가에 오늘 아침과 같은 미소가 생겨났다.


“일요일엔 형을 만나서 그간 묵혀 있던 감정들을 정리했습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형의 고충을 알았고,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다는 것도 알았어요.”

의사도 한층 편안해진 지헌의 모습을 살폈다. 이전과 달리 지헌의 눈빛에는 불안의 기색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24년 전 친구를 만났습니다. 최근에 생각이 많이 나는 친구였어요.”

“왜 생각이 많이 났나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의사는 오랫동안 끄덕였다. 일반 최면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억압된 자아를 풀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헌에게는 안정된 생활보다 더 큰 치료는 없을 터였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지금 지헌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더 훌륭한 치료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기억을 되찾고자 하시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나요? 마음만 안정되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집착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내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

“내가 잊어버린 시간을 혼자 기억하고 있으면 외로울 것 같아서. 무언가 하나라도 기억해내고 싶어요.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네요.”

지헌의 진지한 대답에 의사는 미소 지었다.


“정지헌 씨는 정말 건강한 사랑을 하고 있네요.”

의사에게도 의지가 생겼다.


“그래요. 같이 열심히 해보죠. 무언가 하나라도, 소중한 것을 다시 꺼낼 수 있을 겁니다.”

 

*

은비는 처음으로 병원에 갔다. 제대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결혼은 안 했는데, 조만간 남편하고 같이 올 거예요.”

진료를 보기 전에 은비가 의사에게 먼저 말했다. 잘못된 임신을 한 미혼모를 보는 듯한 의사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였다.

의사는 건조하게 끄덕이고는 진찰대로 안내했다. 은비는 처음으로 아이를 만났다. 곰인형 같은 아기가 작은 공간에 편안히 누워 있었다.


“8주 2일차 크기네요. 심장 소리도 좋고요.”

의사가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말했다. 놀란 마음에 은비의 심장도 급하게 파들거렸다.

아이가 생각보다 컸다. 함대근을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주수에 따라 태아의 모습이 훅훅 바뀌는 임신 초기에 함대근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역시 아이를 포기하는 게 나을까.

오빠 은엽은 이미 자신이 아기를 지웠다고 믿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약을 쓸 수도 없다. 실패하게 되면 두 배로 고생하게 될 운명이었다.

그것이 부모님 귀에 들어간다면, 함대근의 귀에 들어간다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은엽이 늘 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은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 같았다.

시름이 깊어진 채로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는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연락이 안 되니?]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성을 냈다.


“바빴어.”

[네가 뭐가 바빠. 일도 안 하는 애가.]

“…….”

[집에 와서 네 오빠 반찬 좀 갖다줘.]

“반찬 먹지도 않을 텐데 뭐하러 챙겨?”

[하여튼 한 번에 들어먹는 법이 없지. 네 오빠의 반만이라도 닮아보고 그런 소리를 해라.]

“…….”

[네 오빠는 바쁜 사람이잖아. 배고플 때 집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기분이 어떻겠어.]

그저 오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지헌과의 관계가 수포로 돌아간 후 부모님은 더욱 은비를 괄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님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은비는 툴툴거리면서도 본가에 들러 오빠의 반찬 보따리를 챙겼다. 보따리가 무거워 몇 번을 내려놓았다가 들었다. 수고 끝에 오빠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는 땀 범벅이 되었다.

은비는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TV에서는 아빠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법원장 채서복. 가슴이 뛰고 자랑스럽긴 했다. 역시 누가 보아도 대단한 가족이긴 하다.

은비는 기운 내어 몸을 일으켜 집 안을 정리했다.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며, 한편으로는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를 포기할까 계속 지킬까. 포기하자니 몸이 위험하고 계속 지키자니 마음이 위험했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은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서류를 넣어놓기 위해 연 오빠의 책상 서랍. 못 보던 휴대폰이 있었다. 지퍼백에 담긴 것이었다. 불안한 호기심이 손끝을 이끌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은비는 홀린 듯이 지퍼백의 입구를 열었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 그러나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번쩍 불이 들어왔다. 배터리 용량이 남아 있는 휴대폰이었다.

두근두근. 휴대폰을 바라보는 심장이 오늘 만난 아이의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꺅!”

홈 화면이 나타나자마자 은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김진구. 그건 김진구의 휴대폰이었다.

오빠가 김진구를 죽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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