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찐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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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찐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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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찐 광기
2022.08.03.
은엽은 함대근으로부터 두둑이 자금지원을 받았다. 아버지가 차기 대법원장으로 지명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대근은 알아서 돈을 싸들고 찾아왔다.
함대근이 눈치 빠른 사람이라 여러모로 편했다. 이제 인사청문특별위원회가 구성되면 인사특위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조용히 뒷공작에 들어갈 것이다.
정지헌 집안이 손절한 후 앞으로 어떻게 아버지를 도와야 하나 막막했는데 동생한테 홀랑 넘어가 버린 바보 덕에 일이 손쉽게 되었다.
오늘의 쾌거에 흡족해하며 일찍 퇴근한 은엽은 집 안에서 은비와 맞닥뜨렸다. 은비가 반찬을 가져다줄 거란 얘기는 어머니께 들었지만 여태 집에 있을 줄은 몰랐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동생은 또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표독스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오빠, 나한테 할 말 없어?”
“또 왜.”
“김진구. 오빠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이게 뭔데.”
은비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알아본 은엽의 눈이 커졌다.
“이게 미쳤나. 남의 집을 왜 뒤져!”
은엽은 휴대폰을 냉큼 빼앗아 상태를 확인했다. 전원이 켜져 있었지만 다행히 비행기탑승모드 설정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비행기 모드는 안 풀었겠지? 그거 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염려스럽게 말을 꺼낸 은엽에게 은비가 버럭 소리쳤다.
은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채은비, 너는 상황 파악이 안 돼? 네가 어떻게 나한테 화를 내.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라지.”
“뭐어?”
“내가 나 잘살아보겠다고 그랬겠냐? 너 때문에 한 짓이잖아. 네가 7년 전에 한 거짓말 때문에! 네가 김진구 그 자식한테 협박을 받아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없애버린 거 아니야!”
한마디 한마디마다 은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은비의 눈 끝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넌 그냥 오빠의 능력을 감사히 여기면서 조용히 살아. 결혼이나 하고 잠자코 집안일이나 하면서 마음 편하게 있으라고.”
“왜 말끝마다 결혼이야! 왜 내가 그렇게 급하게 결혼해야 하는데!”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잠시 은비를 달래는 듯 음성을 낮추었던 은엽이 또다시 성을 냈다. 은비는 한껏 따지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집안에서 자신은 결혼 장사 빼고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은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곧 대법원장 되실 거잖아. 아버지가 대법원장이 되는 데에는 함대근이 꼭 필요해. 그러니까 네가 잘하라고. 너만 잘하면 돼.”
“…….”
“정 함대근이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그것도 얘기해. 결혼하고 유산까지 다 돌려놓은 다음에 안전하게 처리해줄 테니까. 몇 년만 참아.”
“……지금 내 남편이 될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싫으면 징징대지 말고 그냥 잘 살아!”
눈을 번뜩이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오빠의 행패에 은비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채은비. 결혼이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야. 알겠어? 아버지 곤란하게 하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해.”
오빠는 괴물이었다.
*
바쁜 하루.
저녁 시간을 지나서도 지헌에게 연락이 없어 정오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상담은 잘 끝났으려나…….’
전화를 해볼까. 아닌가, 다른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지.
다른 스케줄에 대해 따로 말을 들은 것이 없어 정오는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원주류에서 신제품 아이디어 회의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회의실로 향하는 정오의 옆에 같은 팀 송기훈이 따라붙었다.
“레미레미가 온다네요.”
“아, 도를 지나쳐서 미친 분?”
제작팀이 지어준 별명을 떠올린 정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기훈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심으로 정오가 걱정스러웠던 거였다.
“네. 대리님은 불편하시면 참석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다 같이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괜찮아.”
정오는 기세 좋게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에는 제작 1팀의 멤버들과 제작 2팀의 정오, 기훈이 참석했다. 어쩌다 보니 자리에 여자가 정오 하나뿐이었다.
잠시 후 기획팀의 팀장과 차장 AE가 세 명의 광고주를 데리고 나타났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만났던 두 명의 다원주류 직원과 레미레미였다.
“안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팀장님이 하도 안 오셔서 제가 왔습니다.”
레미레미가 안찬섭 팀장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네. 잘 오셨습니다. 앉으시죠. 우리 제작팀 멤버들은 기억하시죠?”
“기억이야 하는데…… 저분은 누구시더라?”
레미레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턱짓으로 정오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작 2팀 카피라이터 이정오 대리입니다. 여름 신제품 광고의 1등 공신이죠.”
안찬섭 팀장의 소개에도 레미레미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채은비 과장은 어딜 가고. 채은비 과장이 싹싹하게 일도 잘하는데 말이야.”
정오 가까이로 고개를 기울인 레미레미가 물었다.
“우리 이 대리님은 뭘 잘하시는가?”
“좋은 카피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정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레미레미는 영 마뜩잖다는 듯이 고개를 젓다가 자리에 앉았다.
“으흐흠, 제가 여기까지 손수 찾아온 이유는.”
헛기침을 크게 한 레미레미가 말했다.
“요즘 콜라보레이션 맥주 브랜드를 만드는 게 대세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다원주류도 콜라보 브랜드를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우리 광고 제작사인 맥스기획이 세련 그룹의 계열사잖아요? 세련그룹 하면 역시 세련식품이고. 많은 히트작이 있지 않습니까. 그 히트작들하고 콜라보를 하면 좋은 제품이 하나 나올 것 같은데.”
“우선은 세련식품과 협의를 해보아야 합니다. 염두에 두신 제품은 있으십니까?”
“이제 찾아보아야죠. 어쨌든 세련식품이랑 협의는 가능한 거죠?”
레미레미는 아무 제안서도 없이 그저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온 것이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기획팀 팀장이 대답했다.
“그럼 제품은 뭐로 할까?”
레미레미의 물음에 회의실 안은 적막해졌다.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 보네요. 혹시 우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얘기를 할 수가 없나? 분위기를 띄워야 하나?”
“아닙니다. 매번 아이디어가 반짝하고 나오는 건 아니고…….”
제작 1팀 팀장이 레미레미의 의문에 답했으나 레미레미는 답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오를 지목했다.
“카피라이터 이 대리님?”
“네.”
“이 대리님은 아이디어 없어요?”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당장 생각 못 하겠으면 분위기라도 알아서 띄워봐요. 그래야 아이디어가 파릇파릇하게 나오지.”
“……어떻게 띄울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알아서 하라니까? 춤을 추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그건 아니지 싶다. 이 광고주 자식아…….
레미레미의 요구가 황당하여 정오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이들도 똑같이 놀랐다.
“여기는 좀 그런가? 그럼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아무래도 더 편한 장소가 낫겠죠?”
정오가 반응하지 않으니 레미레미는 기획팀의 막내에게 눈짓했다. 레미레미의 의중을 파악한 AE가 흠칫 놀라며 일어났다.
“……회식 장소를 섭외해볼까요?”
“크으. 역시 빠릿빠릿해.”
레미레미는 막내 AE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AE가 회식 장소를 알아보겠다고 회의실을 떠난 후 레미레미는 또다시 정오에게 눈치를 주며 푸념했다.
“어휴. 제작은 이래서 안 돼. AE들은 시키면 다 하는데 제작은 왜 그래? 이 대리님 대학교 어디 나왔어? 꼬옥 학벌도 떨어지는 애들이 콧대는 높더라고.”
한 번만 더 참아볼까.
아니야. 내가 여기서 참으면 내 후배들은 나보다 더 고생할 수도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정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부장님. 조금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업무와 관계없는 내용으로 선을 넘으시면…….”
“뭐? 선을 넘어?”
정오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레미레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버럭 소리쳤다.
“이 대리 양반 말하는 꼬라지 보게. 맥스기획 요즘 왜 이래요? 직원 관리 안 합니까? 요즘엔 광고주한테 따박따박 말대답하라고 가르쳐요?”
그 순간.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죠?”
살짝 틈이 벌어져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지헌이 들어왔다. 그 뒤에는 고은주 대리가 서 있었다.
밖에서 레미레미의 호통 소리를 들은 지헌의 표정은 살벌하게 굳어 있었다.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레미레미의 시뻘겠던 얼굴도 퍼렇게 변색되었다.
“아, 이사님, 그게…… 으흠, 흠.”
레미레미가 헛기침을 가장하여 생각을 정리할 틈을 만들고서 대답했다.
“제가 이정오 대리하고 개인적으로 친합니다. 사석에서 오빠 동생 하는 사이고요, 그냥 장난으로, 서로 장난친 겁니다. 그렇죠, 김 팀장님?”
“그렇……습…….”
난처한 입장이 된 기획팀 팀장이 대답을 주욱 끌었다.
지헌이 정오를 불렀다.
“이정오 대리님?”
“네.”
“직접 말씀해보시죠. 사실대로.”
“…….”
“엄석기 부장님이랑 친합니까? 사석에서 오빠 동생 하는 사이고?”
“…….”
“사석에서 언제 봤죠?”
오빠 동생은 무슨. 엄석기라는 이름도 지금 처음 들었다고요.
확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오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저 인간과 친하지 않다고 하면 불쾌해진 다원주류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고 같은 본부의 동료들에게 원망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싫어서 저 인간과 친하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나는 정지헌한테 혼쭐이 나겠지.
어떤 식으로 혼쭐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회사 동료들보다 정지헌이 훨씬 무서웠다.
정오는 사실대로 말했다.
“……시음회 때 한 번 만났습니다. 잠깐 인사만 나누었고, 오빠 동생 하는 사이도 아닙니다.”
“엄 부장님, 일어나시죠.”
지헌이 조금 더 싸늘해진 목소리로 레미레미를 불렀다. 레미레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너희 회사랑 거래할 마음 없으니까 꺼져.”
“뭐? 뭐, 뭐…….”
지헌의 냉랭한 처사에 어물거리던 레미레미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이사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우리는 클라이언트고요. 맥스기획에 우리가 계약한 게 얼만데…….”
“개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X새X야.”
오오. 지헌의 옆에서 지켜보던 은주의 눈이 빛났다. 실은 박수를 치고 싶었다. 쌍시옷 발음을 이토록 쫀득하게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게다가 저 눈빛은 광고주의 목을 한 손으로 비틀어버릴 것만 같은 살기 어린 눈빛.
찐 광기란 저런 것이다.
저 남자는 진짜 미쳤구나.
회의실까지 내가 데려왔지만 조금 걱정되네.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저러나.
은주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처음인 듯싶었다.
교살의 위협을 느낀 레미레미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는 허둥지둥 떠났다. 레미레미가 데려온 두 명의 직원들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서 줄행랑을 치는 처지가 되었다.
레미레미가 떠난 후에도 회의실 공기는 싸했다.
빈자리에 앉은 지헌이 불쾌한 눈빛으로 회의실을 훑고서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렇게 광고주가 선을 넘는 발언을 해도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야 광고주니까요.
모두의 목구멍에는 차마 할 수 없는 대꾸가 꿀렁대고 있었다.
“김 팀장님.”
“네. 이사님.”
“내일까지 직원들한테 갑질 광고주 피해 사례 받아서 보고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다원주류 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다원주류에서 오는 모든 연락은 제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네.”
“쫄지 말고 일하죠. 회사가 마음 많이 다친 순서대로 월급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지헌이 쫄지 말라고 말했지만 다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레미레미와는 다른 의미로, 아니 훨씬 더 지헌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한숨을 쉰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지만 회의실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 지헌은 잠깐 돌아섰다. 그의 한마디에 직원들은 또 흠칫 놀랐다.
“이번 주에 공식 발표가 나겠지만 여기 있는 분들께만 미리 말씀드리죠.”
목소리가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제가 얼마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정오를 포함한 제작 2팀의 팀원들 눈은 동그래졌고 다른 이들은 눈을 삼박거렸다. 처세가 빠른 기획팀 팀장이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감사합니다만 축하받자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제 신부가 이 회사에 다녀서요.”
“……맥스기획에 말입니까?”
“이정오 대리가 제 아내입니다.”
이 사실을 이 자리에서 처음 듣게 된 이들의 입이 같은 속도로 벌어졌다. 정오의 얼굴은 그녀가 오늘 점심에 먹었던 떡볶이 색깔이 되어 있었다.
“혹시 실수하실까 봐 먼저 말씀드리게 됐네요.”
은주는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실수는 무슨 실수야. 그냥 당신 입이 간지러워서 얘기하는 거잖아.
또 한 건 하셨네. 이정오 지키러 회사 나오는 정지헌 이사님.
어쨌든 이렇게 재미난 회사라면 열심히 다녀야겠다.
뜻밖에도 없던 애사심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