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전화를 받고 싶다 (133/183)


133. 전화를 받고 싶다
2022.08.06.


지헌이 회의실을 떠난 후, 모두의 이목은 정오에게 집중되었다.


“어…… 어…… 이 대리, 그랬구나. 이 대리가 결혼을 했구나. 이사님이랑…….”

“그래서 이사님이 허겁지겁 달려오신 건가?”

기획팀 팀장과 제작 1팀 팀장이 충격이 가시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은주 대리가 대신 대답했다.


“이사님은 제가 불렀어요. 레미레미 광고주가 와 있으니까 보고 가시라고.”

은주가 잽싸게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정오도 은주도 잘 알고 있었다. 정지헌은 이정오를 지키러 납시었다는걸.

정오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축하해. 축하해. ……결혼하고 나서도 일 계속하는 거지? 요?”

손을 휘저은 안찬섭 팀장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요. 말씀도 평소처럼 편하게 하세요.”

안찬섭 팀장의 긴 한숨이 그 옆의 기획팀 팀장으로, 그리고 또 그 옆의 동료에게로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회의도 파투가 났고, 더 앉아 있기엔 가시방석이라 정오도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다른 이들이 따라 나오기 전에 지헌의 집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벌컥, 문을 여니 지헌이 여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입술 끝에 굳게 힘을 주고서 다가간 정오가 슬쩍 눈을 흘겼다.


“욕 잘하더라?”

“뭐 어때. 앞으로 안 볼 사람인데.”

“직원들 앞에서 욕을 했잖아.”

“할 수도 있지. 너도 솔직히 시원했잖아.”

“……아무튼 애 아빠는 욕하면 안 돼.”

“왜 안 돼. 애 아빠는 뭐 사람도 아니야?”

“안 돼. 버릇 돼가지고 애 앞에서도 그러면 어쩌려고.”

“애 앞에서 욕을 왜 해.”

직원들 앞에서 진면모를 드러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네가 말해도 어쩔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할 수도 있지.”

“…….”

“너랑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하길래 죽여버릴 뻔했어.”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하니 너무 진심 같잖아.

섬뜩해진 정오는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 정지헌 너무 변했다. 7년 전에는 꽃하고 나비하고 대화하던 순수한 청년이었는데.”

“내 기억 도망갔다고 너무 함부로 말씀하시네?”

정오의 과장된 농담에 지헌이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레미레미를 쫓아낸 것은 후련한 일이었지만 정오는 뒷감당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득달같이 달려왔다.

지헌이 오너 일가의 일원이지만 회사가 지헌의 것은 아니다. 이 일이 잘못 알려지면 오너의 자제라는 이유로 더욱 큰 질타를 받을 수도 있다.


“이제 어쩔래. 다원주류 어쩔 거야.”

정오의 타박에 지헌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에서 한번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알아서 하라니까? 춤을 추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어휴. 제작은 이래서 안 돼. AE들은 시키면 다 하는데 제작은 왜 그래? 이 대리님 대학교 어디 나왔어? 꼬옥 학벌도 떨어지는 애들이 콧대는 높더라고.]

 
레미레미의 갑질 발언들을 녹화한 것이다. 다원주류가 이번 일을 문제 삼으면 이 녹화기록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정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지헌…… 너는 정말 치밀한 또라…….”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정말 치밀한 또라이구나,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야?”

“어후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런 상스러운 말을. 절대 아니야.”

지헌에게 욕하지 말라고 핀잔을 한번 주었던 정오는 급하게 시치미를 떼고는 지헌의 휴대폰을 끌어갔다.


“근데 오빠 욕은 녹음 안 했어? 나 그거 다시 듣고 싶은데.”

“아까는 하지 말라며.”

“오빠가 하는 건 안 되지만 내가 듣는 건 괜찮아.”

푸흡.

몇 분 전, 회의실 앞에서 레미레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분노가 솟구쳤는데, 여전히 레미레미를 한 대 때려주지 못하고 곱게 내쫓아버린 것이 분한데, 자가당착의 정오 덕분에 들끓었던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정오 때문에 그의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헌은 제 휴대폰 화면의 버튼을 쓸데없이 꾹꾹 누르고 있는 정오를 붙잡아다가 얼굴을 돌려세웠다. 지난밤만큼이나 달달한 숨결이 오늘의 피곤을 잊게 했다.


 

*

「세련 그룹 정재광 회장의 차남 정지헌 맥스기획 이사가 최근 결혼 사실을 알렸다. 신부는 같은 회사의 카피라이터 재원으로, 두 사람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혼인신고만 한 상태이며, 추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초청하여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목요일, 지헌이 예고한 대로 혼인신고 기사가 보도되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기억상실증이라거나 숨겨진 아이가 있다거나 하는 가십거리 없이, 아주 간단한 사실만 박혀 있는 기사였다.

그럼에도 지헌의 앞으로 쉴 새 없이 꽃 선물이 들어왔고 회사는 소란스러웠다.

오후에는 회사 전체에 지헌의 신부가 이정오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정오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기쁘게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신기해요. 미혼모가 어떻게 총각이랑 결혼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고, 비하인드 들려달라고 조르는 사람도 없고, 눈치 주거나 수근대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다들 마냥 축하만 해주시네요.”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길게 인사를 받은 정오가 별일이라는 듯이 은주에게 말을 걸었다. 은주가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제가 단톡방에 올렸는데.”

“고 대리님이요?”

“네. 이사님께서, 이 대리님이 여러 사람한테 대답하느라 피곤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던데요.”

은주는 대답과 함께 단체 채팅방 화면을 보여주었다. 정오가 활동하지 않는 채팅방이었다.

- 이정오 대리님 딸이 정지헌 이사님 딸임. 이사님은 7년 전에 사고로 기억을 잃는 바람에 이 대리님이랑 헤어졌는데 최근에 이 대리님을 다시 만났음. 그리고 결혼.

고은주 대리다운 짧고 건조한 설명 뒤에 ‘세상에!’, ‘대박!’, ‘오 마이 갓!’ 하는 감탄사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저만 한 건 아니고요. 아마 송기훈 씨도 본인이 활동하는 단톡방에 소식 올렸을 거예요. 박 차장님도 올렸을 거고.”

은주가 기훈과 영광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정오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러저러한 공작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혼인신고 소식이 알려지면 여기저기 별별 소문들이 퍼져나가며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거라고 예상했다.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별일 없는 반응에는 이런 비밀이 있었던 거였다.


“저는 일개 직원일 뿐이라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한 건데, 괜찮으세요?”

“그럼요, 그럼요! 대리님이 저를 위해서 해주신 일이잖아요.”

“요즘 이사님 이미지가 예전 같지 않고 엄청 좋아요. 지난번에 레미레미 내쫓은 일로 호감도가 한 번 더 떡상했고요. 아주 좋을 때 좋은 소식이 전해져서 다들 들떴을 거예요.”

“고마워요. 고 대리님.”

“그럼 밥 사세요. 맛있는 걸로.”

“아유 그럼요. 엄청 맛있고 비싼 거 사드릴게요.”

정오의 살랑거리는 미소에 은주는 새침데기처럼 눈꺼풀을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속으로는 내심 걱정했는데 정오의 반응에 뿌듯했다.

*

친구의 연락으로 지헌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은비는 처연하게 한탄했다. 제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이정오는 봉을 제대로 잡아 호강하게 되었다.

씁쓸하여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은데 함대근에게서 자꾸 연락이 왔다. 너무 사람을 귀찮게 했다. 은비는 차마 수신차단까지는 하지 못하고 모든 연락을 흘려보냈다.

문자메시지에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 은엽에게 따로 문자를 보내두었다. 대근이 찾거든 아픈 걸로 해달라고.

정말로 몸이 성하지는 않았다. 왠지 아랫배가 찌르르한 느낌이 났다. 자신이 홑몸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유산기가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정말 수술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은비는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갔다.


“금방 또 오셨네요.”

의사의 인사에 은비가 사유를 밝혔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아랫배가 자꾸 욱신거려서요.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해서.”

“그래요? 자궁이 약한가…….”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곧장 태아의 상태를 살폈다. 의사의 목소리가 금세 밝아졌다.


“아주 잘 놀고 있네요. 오늘은…… 지난번보다도 훨씬 컸는데요?”

의사의 진찰에 은비의 눈이 커졌다. 우렁찬 심장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는 곰인형 같은 아기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9주로 봐도 되겠어요.”

“월요일에 8주 2일이라고 하셨잖아요.”

“아기의 움직임이나 기계 각도에 따라서 오차가 있긴 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기가 쑥쑥 잘 자라는 편이긴 하고요.”

“…….”

“아기 성장 속도가 빠른 만큼 엄마도 영양이 필요하니까 음식 골고루 섭취하시고 영양제도 챙겨 드셔야 합니다. 이상 있으시면 언제든 내원하시고요.”

의사는 아기가 잘 크고 있는 것이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이 웃어주었다. 은비는 그 앞에서 울지도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은비와 같은 임신부를 많이 만난 의사는 눈치가 빨랐다. 의사가 조심스러운 말로 은비를 회유했다.


“자궁이 선천적으로 약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포기하면 다시 아이 갖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힘내셔야 해요.”

은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아직 자신이 맥스 기획에 다닌다고 생각한 친구가 결혼을 축하한다며 연락을 한 것이었다.

기사에는 ‘같은 회사 카피라이터’라는 내용이 있으니 당분간 이런 연락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지헌과 이정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겨났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단 하나 있었다. 아이를 포기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한탄하는 자신과 배 속 아이의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니 눈물이 나왔다. 처음으로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잘못 만나서…….

*

둘째 아들의 혼인 기사가 뜬 후, 재광도 지헌 못지않은 축하를 받았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기에 선물은 정중히 사양했지만 재광의 집무실은 금세 꽃으로 가득 찼다.

일 때문에 찾아온 이들도 재광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회장님, 손녀딸까지 얻으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우리 손녀딸 그림 좀 볼 텐가?”

재광은 그런 손님을 놓치지 않고 손녀딸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보여달라고 사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오. 이건 무슨 작품일까요?”

“나잖아. 그냥 딱 봐도 나잖아. 안 그런가?”

“……그러네요. 아주 잘 그렸네요.”

“그렇지? 겨우 일곱 살인데 아주 천재적인 재능이야.”

재광은 인생의 새로운 행복을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부작용도 상당했다. 계속 아이가 보고 싶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손녀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지우는 짓을 하게 되었다.


“회장님, 회의 준비됐습니다.”

“응.”

오늘도 재광은 휴대폰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회의에 나섰다.

아이에게 매일 전화하라고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손녀딸에게 닦달하는 할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아 시간을 못 박아두지는 않았는데, 아이가 이렇게 속을 태울지 알았다면 아예 요일과 시간을 정해놓을 것을 그랬다.


“인도네시아 진출 사업 중 가장 비약적인 성장을 보인 분야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발표자의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해볼까 하는 사이에 휴대폰 화면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화면 가득 뜬 ‘예나공주님’이라는 글자에 이게 생시인가 싶어 재광의 눈이 커졌다. 심장도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중요한 회의였다. 그룹의 수장이 되어 수십 명의 임원을 불러다 놓고 딴청을 피울 수는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회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어, 아니아니, 물.”

“물 여기 있습니다.”

물은 재광의 눈앞에 있었지만 비서는 재광이 못 본 건가 싶어 재광의 코앞에 가져다 놓았다.

재광은 물은 건드리지도 않고 계속 휴대폰만 쳐다보았다.

받고 싶다. 전화를 받고 싶다.

하지만 고뇌하는 사이에 전화는 끊겨버리고 말았다. 애정의 동아줄도 툭 끊어진 것만 같았다.


“후우우우…….”

재광의 깊은 한숨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요.”

자신의 한숨에 프레젠테이션을 멈춘 발표자에게 재광은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최근 한류 흐름을 타고 국내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다시 살아난 희망의 불씨!

재광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분만 쉬었다가 회의 재개하도록 하지.”

재광은 휴대폰을 가슴에 품고서 급하게 회의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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