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이제 머지않았을 거야
(134/183)
134. 이제 머지않았을 거야
(134/183)
134. 이제 머지않았을 거야
2022.08.10.
재광은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아이의 깜찍한 목소리에 심장에 찌르르 진동이 일었다.
“그래. 우리 손녀딸! 밥 먹었어?”
재광의 옆에 서 있던 비서의 눈이 커졌다. 손녀딸과 전화하는 재광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높아진 것 같았다.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신 우리의 회장님께 이런 가벼운 목소리라니. 너무 무게감이 없어서 목소리와 함께 재광의 몸이 붕 떠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재광은 비서가 놀라든 말든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점심은 먹었고 저녁은 안 먹었어요.]
“그래. 어서 먹어야지. 우리 공주님이 왜 전화를 하셨을까?”
[할아버지, 사탕 다 먹었어요.]
“그걸 다 먹었어?”
[네.]
“그래. 잘했네. 할아버지가 또 만들어줄게. 이번에는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줄까?”
[네!]
“무슨 동물을 만들어줄까?”
[캥거루요!]
캥거루. 캥거루 접수.
생김새가 난해하긴 했지만 만들지 못할 건 없었다. 아기 피카소의 할아버지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 할아버지가 또 만들어줄 테니까 엄마한테 얘기해서 또 놀러와. 알았지?”
[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벌써 끊게?
통화는 짧았다. 용건을 전한 손녀딸은 쿨하게 인사했다.
재광 또한 질척거리는 할아버지로 각인되고 싶지 않아 곧장 받아들였다.
“그래그래. 우리 공주님 저녁 맛있게 먹고!”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전화는 뚝 끊겼다. 재광은 휴대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행복한 통화의 끝은 다시 긴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
은엽은 유전자 연구소 직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회사에서 몰리고 있는 상황이라 퇴사를 하는 것이 낫겠다며 지겹게도 연락했다. 은엽 때문에 피해를 보았으니 앞으로 생계를 책임져 달라는 투였다.
은엽은 유전자 연구소 직원을 위한 자금을 따로 빼두었다. 함대근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은비와 은비의 친구가 고소장을 받은 일 또한 성가신 일거리였다. 아버지가 대법원장 임명장을 받기 전까지는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별것도 아닌 고소장 따위가 기자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은엽은 지헌을 찾아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맥스기획 건물 로비에 들어섰을 때 함대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은엽은 살갑게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변호사님, 업무 중이시죠?]
“업무 중이지만 언제든 대표님의 연락을 받을 시간은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은비 씨가 연락이 안 돼서요. 며칠째 통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해서 연락드렸는데.]
“아…….”
은엽은 목소리를 주욱 끌었다. 저 멀리서 지헌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외부 스케줄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모양이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제가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은엽은 급하게 전화를 끊고 지헌에게 달려갔다.
“지헌아.”
은엽이 부르는 소리에 지헌이 고개를 돌렸다.
벌레만도 못한 것을 바라보는 듯, 비위가 상한 표정이 은엽의 속을 긁었다.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은엽은 미소 지었다.
“소식 들었어. 결혼 축하한다.”
“할 말은 그거야?”
짧게 쏘아붙인 지헌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은엽이 다시 붙잡았다.
“은비 요즘 힘든 거 알지? 그런데 고소장까지 받아서 애가 말이 아니야. 은비 친구도 고소장을 받았다고 하던데, 은비가 양쪽으로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하더라.”
백조가 물밑에서 미친 듯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며 아무도 모르게 뒷공작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엽은 목표 하나만 바라보며 잠시 자존심을 눌러 두기로 했다.
“너무 은비를 몰아붙이면 네가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 그냥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좋게 넘어가자. 그래도 우리한텐 옛정이 있잖아. 응?”
“나도 옛정을 생각해서 일단 고소장은 두 개만 접수했어. 앞으로는 지켜봐야지.”
은엽의 설득에 지헌도 똑같이 미소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저 위에서 군림했던, 세상의 더러운 꼴을 본 적이 없는 그 오만한 미소가 은엽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동안 재미있게 돌아다녀. 하고 싶은 거 많이 하고.”
“…….”
“우리나라 법이 너 같은 악질을 잡아넣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네가 아직 세상을 잘 활보하고 다니고 있지만, 이제 그것도 머지않았을 거야.”
지헌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은엽이 죽자사자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정지헌 또한 어딘가에 잠수함을 숨겨놓고 고요히 물밑작업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 아래로 쥔 은엽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
은비는 집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휴대폰도 꺼두어 만지작거릴 게 없어서 병원에서 받은 아기 초음파 사진만 멍하니 들여다보게 되었다.
2.5cm,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자그마한 녀석이 자신의 몸과 마음까지 지배해가는 것이 신기했다. 허락 없이 제 몸에 자리 잡은 것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또 생명이라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도 들었다.
너무 작아서, 아이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다. 은비가 아이의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휩싸여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이 없어서 처음에는 무시했으나 이윽고 쿵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몸을 일으켰다.
“채은비 씨,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요. 문 열어요.”
“허.”
함대근의 목소리였다.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것이다. 아니,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은비는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옆집에서 항의를 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불쾌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표님, 갑자기 무슨 일로…….”
대근은 인사도 없이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껏 보아온 모습과는 달랐다. 이전의 젠틀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은비는 대근의 험악한 표정이 무서워서 긴장했으나 존중받고 싶은 마음에 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우리가 결혼할 사이라도 이건 실례잖아요!”
“뭐? 실례? 실례?”
두리번거리던 대근이 핏발선 눈으로 은비에게 소리쳤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대근은 주머니에서 꼬깃한 종이를 꺼내 은비에게 보였다. 은비의 병원 진료 기록이었다. 은비와 연락이 닿지 않아 의심스러운 마음에 뒷조사를 한 거였다.
“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은비 역시 기가 막혀 따졌다. 대근은 그런 은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은비의 뒤편 베개 아래에 꽂힌 사진을 발견했다.
“앗……!”
은비가 막아보려 했으나 우악스러운 대근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근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은비의 눈앞은 하얗게 변했다.
은비의 이름과 태아의 주수와 크기, 태아의 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 부인할 수 없는 아이의 존재.
대근이 얼굴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당장 지워.”
그것이 함대근의 순정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차마 결혼을 깨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채은비의 미모와 교양을 포함하여 채은비 집안의 잘난 구성원들. 대근이 이번 생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채은비의 친부가 대법원장이 되면 자신 또한 투자한 몇 배를 돌려받게 될 터였다. 그래서 결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너한테 얼마를 투자했는지나 알아? 어?”
“…….”
“당장 지워.”
대근은 병원 기록과 태아 사진을 챙겨가지고 은비의 집을 떠났다. 은비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아랫배의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은엽의 사무실.
지헌을 만나고 와 더욱 씁쓸해진 은엽은 PC 자판을 두드리다가 몇 번 손을 놓았다. 정지헌 때문에 짜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 눈빛이 생각나 계속 열이 올랐다.
그 와중에 사무실로 함대근이 찾아왔다. 은엽이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대근은 다짜고짜 은엽의 멱살을 잡았다.
“임신까지 한 애를 나한테 떠밀어?”
붉으락푸르락, 당장 누구 하나 숨통을 끊어놓을 것만 같은 대근의 얼굴에 은엽도 바짝 쫄았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대표님.”
“오해는 무슨! 다 가서 확인하고 왔다고!”
대근은 자신이 조사해온 은비의 진료기록과 은비의 집에서 가져온 태아 사진을 한꺼번에 은엽의 사무실 바닥에 던졌다.
그 사무실 바닥으로 은엽 또한 툭 팽개쳐졌다.
은엽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 종이를 들추었다. 임신 9주 태아의 사진이었다.
“뭐? 임신 9주? 소름 끼치는 것들.”
동생이 약을 먹었다고 하고서 먹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함대근의 아이인 것처럼 속일 요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식하기까지 한 동생의 행실에 은엽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어쩐지 제 침대로 날 끌어들이더라. 딴 놈 애를 배 놓고 내 애라고 속일 속셈이었겠지. 그래서 그렇게들 마음이 급하셨어. 어?”
“…….”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아니에요, 대표님. 그런 거 아닙니다.”
은엽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대근에게 호소했다. 지금 대근을 붙잡지 않으면 집안의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리 집안의 명예를 걸고 하는 얘기예요!”
“…….”
“은비는 수술할 거예요. 은비가 지금은 겁이 나서 그러는 겁니다.”
은엽은 대근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요즘 수술 흔해요. 안전하고, 추후 임신에도 전혀 지장 없습니다.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
“대표님이 이해해 주셔야 해요. 딱하고 안타까운 애란 말입니다.”
은엽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호소했다. 누가 보아도, 동생의 처지가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오빠의 모습이었다.
대근의 눈썹이 휘었다. 흥분한 호흡을 차츰 다스리며 대근이 은엽을 바라보았다.
“당한 거예요. 제 동생은 당한 거라고요.”
“누가…….”
“누구겠습니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내 동생 낙동강 오리알 만들어버리고 딴 여자랑 바람피워서 살림 차린 놈.”
은엽의 간절한 표정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대근의 눈이 커졌다.
그 기생 오라비같이 생긴 놈.
대근은 결혼을 다짐하기 전에 채은비에 대한 뒷조사를 마쳤다. 오랫동안 세련그룹 대표의 차남 정지헌과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최근에는 연애가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소문들이 껄끄러웠지만 그럼에도 대근이 결혼을 결심한 건 채은비가 너무나 예뻤고 채은비의 집안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서른 살의 예쁜 여자가, 과거가 전혀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현실과 타협을 보았다.
하지만 임신은 다른 문제였다.
자신의 하소연에 완전히 넘어간 대근의 표정을 확인하며 은엽은 희망 한 자락을 확인했다.
은엽의 눈이 빛났다.
이건 기회일 수도 있다!
“정지헌. 그놈이 그렇게 역겨운 놈이란 말입니다.”
정지헌의 인생을 찢어발길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