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 엄마에게도 엄마가 (135/183)


135. 엄마에게도 엄마가
2022.08.13.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를 받느라 바쁜 하루였다. 같은 팀의 팀원들이 배려해준 덕에 크게 성가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퇴근할 때쯤이 되니 정오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서 인사하니 가장 먼저 예나가 달려왔다.


“엄마아!”

“예나공주!”

엄마를 부르며 안기는 예나를 번쩍 안아들 힘이 없어서, 바닥에 털썩 앉아 아이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모녀가 애틋한 인사를 하는 동안 국순이 다가왔다.


“밥은.”

“먹었어.”

“오늘은 정 서방이랑 같이 안 오네.”

“응. 할 일이 많다나 봐.”

“에구. 힘들겠네.”

“나도 힘들었어.”

국순이 남편을 염려하듯 혼잣말하자 정오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푸념했다. 시원한 주스라도 있나 해서 냉장고 문을 여니 국순이 물었다.


“맥주 마시게?”

“아니. 나 술 안 마시기로 했어.”

“웬일이래?”

“엄마는 내가 맨날 술만 마시는 사람인 줄 알아?”

정지헌한테 당한 게 있어서 그렇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예나가 그런 정오에게 다시 쫓아와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엄마. 오늘 예나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했어.”

“그랬어? 할아버지랑 무슨 얘기 했어?”

나도 따로 전화를 못 했는데, 딸이 기특한 일을 한 것 같아 아이의 두 뺨에 찰싹 손바닥을 갖다 대고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내가 사탕 다 먹었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또 만들어준다고 했어.”

“이예, 아니, 정예나.”

하지만 예나의 대답에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사탕을 다 먹었어?”

“응.”

“그 많은 걸 다 먹었다고?”

정오는 두리번거리다가 예나의 방으로 향했다. 분명히 커다란 통에 사탕이 꽉꽉 채워져 있었는데 재광이 사탕을 담아주었던 통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두 통 전부! 아이는 그 아래 가라앉은 사탕 가루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나흘 만에 그 많은 사탕들이 다 사라졌다.


“이걸 혼자 다 먹었어?”

“할머니도 주고 도빈이도 주고 도윤이도 줬어.”

“도빈이랑 도윤이 몇 개씩 줬는데.”

예나는 고개를 내리고서 작은 손가락을 찬찬히 꼽았다.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줬단 말이지.

대부분은 혼자 다 먹었다는 얘기였다.


“정예나. 엄마가 사탕 하루에 몇 개 먹으라고 했어. 네 개만 먹으라고 했잖아.”

“근데 이 사탕은 다른 것보다 작았잖아.”

“그렇다고 열 배를 먹어? 아니 열 배가 뭐야. 사백 개는 먹었겠네.”

예나도 스스로 잘못했다는 걸 아는지 슬쩍 정오의 눈을 피했다.


“할아버지가 두고두고 먹으라고 잔뜩 주신 걸 그렇게 홀랑 다 먹어버려? 그러고 또 만들어달라고 전화를 해?”

하지만 아이도 억울한 게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잘했다고 했는데 엄마는 왜 그래애!”

“뭐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할머니이!”

예나는 울먹거리며 쪼르르 할머니에게 쫓아갔다.

할머니가 받아주자 아이의 못된 버릇이 나왔다. 서럽게 울어버리는 버릇. 어른들에게 눈물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더 크게 우는 버릇.


“할머니이, 엄마가 예나 울렸어어어.”

“그게 엄마가 울린 거야? 네가 울어놓고 어디 엄마 핑계야!”

우에에엥! 엄마의 타박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국순은 예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울지 말라며 토닥였다. 정오는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왜 무거운 애를 그렇게 안아 들어. 팔 떨어지게. 너 내려와.”

“싫어!”

예나는 할머니의 손길에 의지하며 더욱 세게 매달렸다.


“할머니, 오늘 할머니랑 잘래.”

“할머니 발로 찰 생각하지 말고 혼자 자!”

“싫어!”

도무지 고집을 꺾을 줄 모르는 어린애였다.


 
결국 고집쟁이 예나는 국순의 방에서 크게 이불을 깔고 잠이 들었다. 정오는 그 앞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우. 속상해.”

“애들이야 다 그렇지 뭘. 너도 그랬어.”

“난 안 그랬어.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면 나는 딱 그만했다고.”

“네가 그런 것만 기억하는 거지. 너도 그랬어. 둘이 똑같다.”

“안 똑같거든! 그리고 엄마, 얘가 사탕을 어떻게 먹는 줄 알아? 콱콱 깨물어 먹는다고. 그러니까 금방 다 먹어버리지. 이는 있는 대로 다 썩을 거고.”

“양치질 잘하고 잤으니 됐지 뭐.”

국순이 가만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의 손은 아이에게 닿아 있는데 정오는 엄마가 자신을 다독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의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은 언제나 정오에게도 안정을 가져다준다.

이내 숙연해진 정오가 말했다.


“내가 데려갈게. 엄마는 편하게 자.”

“그냥 둬.”

“…….”

“이게 다 엄마 복이지. 손녀딸이 이렇게 할머니 좋다고 같이 자자고 하니 얼마나 좋니.”

“…….”

“이러니저러니 해도 엄마는 지금이 제일 좋다. 딸이 결혼해서까지 이렇게 엄마랑 같이 사니 더 바랄 것도 없지.”

정말로 국순은 지금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더는 소원이 없을 것만 같은, 여기서 뭔가를 더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인 것 같은, 그런 충만한 행복이었다.


“우리 엄마도 이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말이야. 딸 시집보내고서도 딸이랑 같이 사이좋게 사는 거.”

“할머니?”

“그래. 그랬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

“…….”

“그 소원을 내가 대신 이루네.”

정오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국순의 눈이 젖어갔다. 정오는 제 무릎을 끌어안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세상 최고의 어머니, 날 때부터 엄마였을 것만 같은 이국순 여사에게도 엄마에게 마냥 사랑받던 예나 같은 시절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아유 피곤하겠다. 얼른 가서 쉬어.”

회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국순은 딸에게 눈물을 보이기는 싫다는 듯 정오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저었다.

국순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온 정오는 침대에 털썩 누워 방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일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예나와 함께 잤는데, 오늘은 예나와 복도 반대편의 방에 누워 있다.

참 이상하지. 아이가 자신을 지키는 것도 아닐 텐데, 아이가 없으니 그녀 또한 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아이가 날 지켜줬던 거였구나.

정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만 아이를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아이 또한 엄마를 지키고 있었다. 그 넘치는 행복, 많은 웃음은 모두 아이 덕분이었다. 어둑한 날들이 무섭지 않았던 것도 아이 덕분이었다.

예나가 주는 행복을 가만히 되짚어보니 오늘 아이를 너무 크게 나무랐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면 아이도 조심했을 텐데 아이가 할아버지께 처음 받은 선물이라 아무 말 하지 못한 자신의 탓도 컸다.


‘내일 미안하다고 해야겠네.’

마음먹고 나니 조금 우스웠다. 예나는 내일이면 엄마한테 혼이 났었단 사실은 씻은 듯 잊어버리고 강아지처럼 제게 안길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자신 또한 엄마처럼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헌이 늦어지는 것 같아 먼저 잠들까 하다가 정오는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긴 하지만 지헌에게는 더욱 힘든 하루였을 테니 의리상 기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오늘 하루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듣고 싶기도 했다.

욕실로 들어간 정오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생애 처음으로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쓸모를 누리지는 못했다.

몸이 고단하긴 하니 지헌이 올 때까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을 다 받고 욕조 안으로 들어간 정오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 이곳이 천국이로구나!

몸이 다 녹아버릴 듯 따끈한 수온에 온 세상 시름까지 다 녹아버린 느낌이었다. 회사에서의 시끄러운 일도 꿈속의 일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

모든 시름을 잊은 정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올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념무상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사이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지헌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는 집이지.”

[집에서 뭐해?]

“욕조 개시했어. 물이 따끈해서 좋다. 오빠도 이따가 몸 좀 담가봐. 어디야?”

[거의 다 왔어.]

“응. 조용히 들어와. 엄마 주무셔. 예나도 엄마 방에서 자고.”

[응. 알았어.]

전화는 금방 끊겼다. 휴식이 길진 않았지만 대강 피로는 풀린 것 같아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3분만 앉아 있다가 일어나야지.’

정오는 턱 끝까지 잠기도록 욕조에 깊이 몸을 내렸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흠칫 놀란 정오의 입이 벌어졌다.


“헉! 컥!”

휘청거리다가 욕조의 물까지 벌컥 들이켰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사실인데 그녀의 숨이 턱 막혀버렸다.

남편은 왜인지 맨몸이었다. 타월 한 장 걸친 뻔뻔하고 위풍당당한 자태에 사고까지 정지한 기분이었다.

꽉 찬 습기로 흐릿해진 욕실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질의 몸이 그녀의 얼굴마저 새빨갛게 달아오르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새색시는 온몸이 꽉꽉 긴장하게 되는데 이 남자는 아랑곳없이 욕조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아아니, 여길 왜 들어오는데!


“……왜 들어와?”

“몸 담그라며. 네가.”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지. 정오는 뒤늦게 허둥지둥 후회했다.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내가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눠 쓰자. 욕조.”

욕조를 나눠 쓰자면서, 그는 널찍하게 뚫려있는 그녀의 눈앞에 자리 잡지 않고 굳이 그녀 등 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지금 막 욕조에 들어왔는데도 왠지 뜨끈하게 느껴지는 몸이 그녀의 뒤편에 자리 잡았다. 단단하고 울룩불룩한 근육들의 형체가 짐작되었다.


 
듬직한 가슴이 그녀의 작은 어깨를 완전히 감쌌다. 조금만 움직여도 수면이 찰랑거려서 정오는 더욱 굳어버렸다. 숨쉬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는데, 지헌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밌네.”

“…….”

“우리 부인은 목욕할 때도 몸에 기합이 꽉 들어가는구나.”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냥 곱게 씻겨줄 테니까 힘 좀 빼.”

“…….”

“일단은.”

이, 일단은?

*

이국순 여사는 널따란 침대를 두고 손녀딸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 이사 와 계속 침대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방바닥에 자리 잡으니 이건 또 이것대로 편안하게 여겨졌다.

편안한 만큼 금세 잠에 빠져든 국순은 오랜만에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다. 이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국순은 감격했다.


“엄마!”

“우리 국순이 왔어?”

꿈속의 자신은 지금의 정오와 비슷한 나이였다. 엄마 또한 돌아가실 때쯤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좀 더 나이든 엄마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하면서도 국순은 마냥 반가웠다.


“엄마는 어쩌면 하나도 안 변했어?”

“우리 딸은 딱 엄마만큼 컸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지금의 예나만큼 자그마해진 아기 정오였다. 국순은 엄마에게 얼른 딸을 소개했다.


“엄마, 얘가 내 딸 정오야. 엄마 닮았지?”

“우리 딸 닮아서 예쁘네. 아주.”

국순의 엄마는 아기 정오를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슬프고도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국순은 꾹 참았다.


“정오야.”

“네!”

아기 정오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정오의 엄마와 국순의 엄마는 꼭 닮은 엄마 미소를 지었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건강해야 해. 밥도 잘 먹고. 알았지?”

“네!”

“자. 할머니가 주는 선물이다.”

아기 정오는 할머니에게 빨갛고 탐스러운 사과 하나를 받았다. 아기 정오가 두 팔로 안아 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사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