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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136/183)


136.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2022.08.17.


커다란 손이 물속에서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가 차지한 위치가 주는 막막함이 외설적인 무언가로 읽히기도 했다. 정오는 허겁지겁 그 손을 움켜잡았다.


“나는 다 씻었어. 괜찮아.”

높아진 목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평소보다 크게 들리는 제 음성에 정오는 화들짝 놀라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제 나가려고 했어.”

“더 있다 가.”

정오가 일어나려니 지헌이 허리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첨벙!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고 잔물방울들은 위로 튀어 올랐다.

지헌의 엄청나게 희한한 점은,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힘을 쓸 줄 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오를 돌려 앉혔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저 무대를 옮겼을 뿐 침대에서와 똑같은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지헌이 고개를 들었고,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방울이 맺힌 얼굴. 물에 젖어 미끌거리는 넓은 어깨. 맑고 깨끗한 모습인데도 그의 눈빛은 왠지 탁하고 야릇한 느낌이었다.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말 없이 강요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기운에 홀리듯 정오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입술이 제일 거룩하고 건전했다. 입술로는 그녀의 호흡을 머금으며 그는 손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움직일 때마다 물소리가 정적뿐인 욕실을 진득하게 울렸다. 얼마 안 가 기진맥진해진 그녀가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 푹 안겼다. 지헌은 보이는 대로 입 맞췄다.

한참을 기대 있던 정오가 가만히 물었다.


“오늘 어땠어? 피곤하지 않았어?”

“아니. 엄청 좋았지.”

“…….”

“드디어 이정오 남편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됐는데.”

그가 많이 고단하리라 생각하여 건넨 질문이었는데 그는 정말로 말짱해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좀 더 이어졌다.

목욕이라고 해야 할지, 유희라고 해야 할지.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려는 처음의 취지와 상반되는 전신욕을 마치고 먼저 욕실 밖으로 나온 정오는 성급하게 옷을 입었다.

어물쩍거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마음이 급했다.


“정오야.”

그사이에 지헌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여보.”

“응? 응?”

허둥지둥 잠옷의 단추를 끼운 정오가 대답했다.


“이리 와. 머리 말려줄게.”

지헌이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들고서 말했다. 머리도 안 말리고서 옷을 입어버려서 그새 어깨가 다 젖어버렸다. 수건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화장대 앞으로 간 정오가 지헌에게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할게, 오빠.”

“내가 해줄게.”

“무섭게 왜 그래.”

“머리 말려주는 남편이 무서워?”

“아니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그래.”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늘 해주고야 싶었지.”

“…….”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매일 해줄게.”

굳이 손수 머리를 말려주겠다니 정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오는 유순한 양처럼 조용히 앉아 남편의 수발을 받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남편 때문에 꽉 긴장했지만, 옷을 입고 물기를 닦고 가만히 앉아 따뜻한 바람을 쐬니 또 이보다 천국이 없는 것 같았다. 서서히 머리의 물기가 날아가고 온몸이 보송보송해졌다.

정오가 고개를 바짝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도 해줄까?”

“좋지.”

이번엔 정오가 드라이어를 넘겨받고 지헌이 의자에 앉았다.

부우웅. 드라이어 소리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정오는 문득 웃음이 났다.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바보처럼 서로 해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 바보 같은 일들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헌은 그런 정오를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예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만해.”

“응?”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정오가 다리를 움직여 그의 뒤편으로 떠나려 했다. 지헌은 곧장 아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정오가 드라이어를 손에 잡은 채로 허우적거렸다. 그는 드라이어를 넘겨받아 전원을 껐다.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뜨거운 바람이 뚝 끊기며 방안의 유일한 소음이 사라졌다.


“뜨거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 또한 뜨거워서 말이 묘하게 들렸다. 뜨거운 바람이 닿은 부분이 뜨겁다는 건지, 자기 몸이 뜨겁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도 또, 욕실에서와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고서 올려다보며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즐기는 상황.

분명히 욕실에서도 일이 있긴 했는데.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정지헌은 그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 또한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예나가 할머니의 방에서 잠든 지금은 정지헌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각오한 듯 체념한 표정으로 제 위에 앉아있는 정오를 보며 지헌이 피식 웃었다.


“하려는 줄 알았어?”

“아니. 아닌데?”

속을 들킨 정오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맞으니까 안심해.”

“아니라니까!”

그녀가 반박했으나 목소리는 이내 묻혀버렸다. 이번엔 욕실에서와 달리 그가 먼저 도둑처럼 입술을 맞춰왔다. 그녀의 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버둥거리자 그가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급하게 지헌의 팔을 붙잡은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웅얼거림이 호흡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입술이 맞닿은 채로 살결을 건드리면 입안에서 가파르게 따끈한 숨결이 터진다. 이 순간엔 매번 전율이 온다. 머리가 저릿해지며 앞으로의 걱정 따위가 무의미해지고 현재에 모든 것을 쏟고 싶어진다.

오늘 벌어진 많은 일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웬일로 정오가 먼저 눈을 떴다. 언제나 아이가 있는 풍경에서 눈을 떴던 정오는 잠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참, 나 결혼했지.

정지헌의 아내로 살게 된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꿈속에서는 제멋대로의 모습이었다가 아침이 오면 허둥지둥 본모습을 찾아간다. 여전히 자신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참 낯설고 신기하다.

밤에는 조금 원망스러웠는데, 자는 얼굴은 예나처럼 사랑스럽네.

지헌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그가 이불을 자신에게 모조리 넘겨주고 속옷 바람으로 자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정오는 일어나 이불을 위로 드리웠다가 내려놓고는 그의 복근을 더듬었다.

방이 환해지니 그의 몸에 박힌 상처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7년 전의 수술 자국이었다. 이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매번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정오는 혼자서 먹먹해졌다.


“왜 막 만져? 아침부터.”

잠에서 깬 지헌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오는 금방 손을 거두고서 물었다.


“깼어?”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지헌은 정오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내 옷 어쨌어. 여보가 벗겼어?”

“…….”

“아, 짐승.”

정지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헌은 언젠가의 타박을 되갚아주듯 능청을 떨었다. 정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니, 자기가 벗어놓고서…….”

그러면서도 정오는 지헌이 일어나자마자 흠칫 옆으로 물러났다.

거리를 두면 허리를 끌어가고, 또 저만치 도망가면 다시 다가와 앉혀놓고, 눕혀놓고. 눕혀놓고는 재우지도 않고, 자는 척해도 소용없고.

그러니 그가 다가올 때마다 움찔하게 되는 것인데, 지헌은 그녀가 움츠리는 것을 보고서 근육통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지 더없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쉬어. 하루쯤 빠져도 돼.”

“결혼 발표하자마자 결근하면 사람들이 참 곱게 보겠네.”

“괜찮아. 내가 다 이겨.”

언제나 그랬듯 그가 가뿐하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며 정오는 먼저 방을 나섰다. 옷을 주워입은 지헌이 곧장 따라붙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난 예나가 저편에서 걸어오는 지헌을 발견하고서 달려왔다.


“아빠아.”

“예나 잘 잤어?”

지헌이 예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정오의 눈썹이 찡긋 움직였다. 자신과 비슷한 걸 먹고 사는 남자인데 어째서 혼자 저렇게 힘이 넘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 왜 어제 늦게 왔어?”

“아빠가 일이 많아서 늦었어. 미안.”

지헌은 예나를 그렇게 안은 채로 국순과도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예나 아빠도 잘 잤지?”

“네.”

이보다 공손할 수 없는 지헌의 아침 인사에 정오의 눈썹이 다시 한번 찡긋 움직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속고 있습니다. 저 남자는요…….

저 남자가 얼마나 밝히고 집요하고 못됐는지 가족에게 상세하게 밝힐 수 없는 정오는 한탄을 하며 돌아섰다.

국순의 눈길은 그런 정오의 걸음을 오랫동안 좇았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정오와 예나는 화해했다. 사실 화해랄 것도 없었다. 밤사이 어제 일을 잊은 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오에게 안겼고, 오늘은 발레리나 머리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예나의 등원 준비를 돕고,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아침이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오늘부터 지헌과 함께 출근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 건물을 몇 블록 앞에 두고 몰래 내리는 수고에서 벗어났다.


“엄마, 다녀올게.”

인사를 하는 정오의 목소리 또한 기분 만큼이나 밝아졌다. 그런 정오를 국순이 불러세웠다.


“이정오.”

“응?”

“이거 신어. 그건 불편해 보인다.”

국순은 현관 구석에 있는 운동화를 집어 들어 정오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바지 핏에는 이 구두가 어울려.”

“이것도 예뻐. 이거 신어.”

“회사에 무슨 운동화야.”

“광고 회사는 아무거나 입고 아무거나 신어도 된다며. 편한 거 신어.”

“싫은데.”

정오가 툴툴대니 지헌이 다그쳤다.


“이정오. 엄마 말씀 들어야지.”

“맞아! 예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말고 엄마도 엄마 말씀 들어야지!”

예나 또한 즐거워하며 옆에서 거들었다.

결국 가족의 성화에 정오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었다. 구두의 굽만큼 눈높이가 낮아지니 정오는 시무룩해졌다.


“키가 작아졌잖아.”

“더 귀엽고 좋네.”

지헌이 그런 정오의 어깨에 팔을 쉽게 올려놓으며 말했다.


“넘어지지 말고 앞 잘 보고 다녀.”

국순은 신발을 바꿔주고서도 걱정이 떠나지 않는 듯 당부했다.


“제가 잘 지켜보겠습니다.”

지헌이 정오 대신 대답했다. 국순은 지헌이 듬직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지헌 역시 그런 국순을 보며 미소 지은 순간 휴대폰이 진동이 울렸다. 승규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 이거 확인했어?

 
승규가 보낸 짧은 메시지 아래에는 인터넷주소 링크가 있었다. 링크를 누르니 게시글 하나가 떴다. 게시글을 확인한 지헌의 이맛살이 우그러졌다. 상단의 제목부터 기가 막혔다.

「세련그룹 정재광 회장의 차남, 정지헌의 갑질」

주저리주저리 쓰인 그럴싸한 소설에 지헌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재빨리 수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소동은 그저 심기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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