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당신을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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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당신을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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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당신을 체포합니다
2022.09.03.
함대근에 대한 수사는 처음부터 경찰을 골치 아프게 했다. 함대근은 바로 변호사를 불렀고 입을 꾹 다물었다.
변호사가 투입되면 어떤 전략으로 움직일지 알 수 없으므로 지헌은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지헌은 경찰에게 부탁하여 피해자 신분으로 함대근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왜 여기…….”
지헌이 나타나자 함대근은 얼어붙었다.
“피해자라서요.”
“…….”
“함대근 씨가 일으킨 사건의 피해자라서.”
함대근의 바로 앞에 바짝 앉은 지헌은 보일 듯 말 듯한 비소와 함께 여유롭게 물었다.
“내가 채은비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채은비가 그러던가요, 채은엽이 그러던가요?”
역시 함대근은 대답하지 않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경찰서 앞에서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채은비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채은비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채은엽도 물론 알고 있죠. 그게 누가 됐든 대표님은 뒤통수를 맞으셨네.”
지헌은 진실을 말해주며, 함대근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오래전 작성한 고소장이었다.
“고소장 사본입니다. 이게 진실이죠. 채은비 채은엽 남매가 하도 낭설을 만들어대서 일찍이 고소를 했습니다. 이 고소를 취하해 달라면서 채은엽이 8월 12일에 찾아왔었고.”
“…….”
“그리고 8월 13일부터 세련그룹 온라인 테러가 시작됐으니 채은엽이 12일 밤에 대표님과 만났었나 보네요.”
날짜까지 정확히 짚어주자 함대근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 함대근의 얼굴살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헌은 침착한 목소리로 냉혹한 진실을 일러두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
“채은엽은 당신을 버릴 겁니다. 당신을 구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면 벌써 달려왔겠죠. 아니면 채은비라도 보냈을 테죠.”
이간질은 채은엽만의 특기가 아니었다. 정지헌 역시 목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과장해서 말할 수 있고, 거짓말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물론 모두 진실이고 확신이라 자부하지만.
“그 남매한테는 그 정도의 의리도 없는 겁니다. 당신에게는 관심조차 없을 거예요. 당신은 오르기 위한 발판일 뿐이죠. 발판은, 오른 후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안전하게 내려갈 때야 또 필요하겠지만 그들은 올라간 후에는 내려올 생각 따위 없을 테니까.”
함대근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헌의 침착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이 자신을 옥죄고 찌르는 것 같았다.
정지헌이 하는 말이 다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간 채은비에게선 연락 한번 없었다. 채은엽은 동생이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연락 한번 없는 것은 역시 이상했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 같은데, 정작 손에 쥔 것도 없이 경찰서에 붙잡힌 꼴이 되었으니 본전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 돈…….’
함대근은 집 금고에 있는 현금을 채은엽에게 보냈다. 사과박스로 5박스였다.
아무 증거도 없으니 채은엽이 입을 싹 씻으면 그만인 돈이었다.
지헌의 목소리가 끊기자 경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대면은 이 정도로 하고…….”
“……돈을 가져갔어요.”
그때 함대근이 입을 열었다. 경찰이 돌아보았다.
“그 자식이, 채은엽이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60억이 필요하다고…….”
일어서려던 지헌 또한 체념하듯 내놓은 함대근의 말에 멈칫했다.
“채은엽. 그놈이 진짜 독한 놈이야. 의뢰인들 구워삶으려고 최면술까지 공부하는 놈이라고. 나도 그놈한테 당한 거야.”
최면술.
그 발악을 듣는 동안 지헌에게는 갑작스러운 두통이 찾아왔다. 귀가 먹먹하고 어지러운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은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빨리 기자들에게 정보를 흘려서 모든 것을 기사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인사청문회를 막을 수 있다.
“지헌아, 괜찮아?”
형사과 앞.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온 지헌에게 배일이 말을 걸었다. 배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헌을 바라보았다.
“어, 어. 괜찮아.”
“너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보다도 배일아. 따로 말할 게 있는데.”
이를 악물고서 두통을 이겨낸 지헌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다음 수순을 그려나갔다.
*
오후 4시.
청문회가 무르익은 가운데 의원 하나가 함대근을 입에 담았다.
“제가 점심시간에 뉴스를 하나 봤는데요. 후보님의 가족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벌어진 세련그룹 온라인 테러 사건이 모두 음모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그 주모자가 후보님의 따님과 결혼을 앞둔, 대근물산의 함대근 대표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함대근 대표에 대해서는 이름은 알고 있지만 다른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개인의 일탈이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채서복은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사실을 말했다. 점심시간에 연습한 대답이었다.
접촉은 은엽이 했고 자신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완벽한 사실이었다. 채서복 또한 함대근의 일탈에 대한 기사를 접했지만 비웃어 넘겼다.
“함대근 대표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서복이 확실하게 단언하자 국회의원 또한 추가 질의를 하지 않았다.
청문회는 한두 시간 안에 마무리될 것 같다. 이제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사방이 조용해져 속으로 안도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속보가 도착했는데요. 다들 뉴스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속보를 확인한 다른 의원이 말했다.
“후보님도 확인하시는 게 좋겠네요.”
아무도 그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아 채서복 또한 휴대폰 전원을 켜서 기사를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 뉴스 상단에 뜨인 글자에 채서복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채서복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 비리 의혹. 대근물산 함대근 대표가 자금 지원 자백」
채서복은 고개를 들어 은엽을 바라보았다. 기사를 확인한 은엽도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던 은엽이 급하게 문자메시지를 작성하는 게 보였다. 순간 채서복의 휴대폰에 비밀메신저 메시지가 떴다. 은엽이 보낸 것이었다.
-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증거도 없으니까요.
기사를 모두 읽어본 국회의원 한 명이 물었다.
“채 후보님, 직접 말씀해보시죠. 이게 대체 무슨 얘기입니까!”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저야말로 무슨 일인지 황당합니다. 함대근 대표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채 후보야 함대근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죠. 직접 접촉하지 않고 아드님을 통해 일을 벌이셨다면.”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제 아들이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후보님.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무서운 겁니다. 대법원장은 생판 모르는 남이든 아드님이든 똑같은 법의 잣대로 공명정대하게 판단해야 하는 무거운 자리고요.”
그 틈을 타 국회의원 한 명이 대법원장의 자질에 대해 지적했다. 채서복과 채은엽의 이마에 동시에 식은땀이 맺혔다.
의원은 아예 기사를 읽어주었다.
“함 씨는 ‘채 씨가 자신에게서 전달받은 자금의 일부를 인사청문특위 13인 중 누군가에게 전달했으며 사고 없는 인사청문회를 청탁했다’고 자백했다…… 이게 대체 누굽니까? 누가 청탁을 받아놓고 지금 여기 시치미를 떼고서 버젓이 앉아 있습니까! 누가 신성한 국회를 더럽혔습니까!”
“이건 역대급이네요.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날, 비리 행각이 발각되다니요.”
다른 이가 흥분한 국회의원을 거들었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채서복이 묵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판사가 된 이후 제 인생은 국민 여러분들에 대한 봉사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지요. 정직과 청렴은 저의 가장 큰 자랑입니다. 하늘에 대고! 법원과 제 목숨을 걸고! 지금의 기사는 모두 오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두 저를 음해하려는 세력입니다. 즉시 조사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늘에 대고, 법원과 제 목숨까지 걸어버린 채서복의 장담에 국회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채 후보님이 목숨을 거신다잖아요. 이 정도면 믿어야지. 정말로 수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날도 아니고 인사청문회날 딱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수상해도 의심은 해봐야죠! 아니 강 의원님이 혹시 청탁받으신 거 아닙니까? 왜 갑자기 나서서 채 후보님을 감싸시죠?”
“아니 갑자기 누구한테 덮어씌워요! 그러는 윤 의원님은 오늘 내내 가만히 계시다가 기사가 나오자마자 흥분하시네요. 혹시 채 후보님 떨어뜨리라는 특명이라도 받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모욕입니까!”
의원들이 서로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국회는 어느새 마피아게임 현장이 되었다.
참다못한 위원장이 의견을 내놓았다.
“채 후보님 아드님을 증인석으로 모셔야겠네요. 어디 계시죠?”
모두의 이목이 채은엽에게 쏠렸다. 예정된 일은 아니었지만 은엽은 어쩔 수 없이 증인석에 올랐다. 아버지를 도우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은엽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선한 표정으로 증인석에 섰다. 증인 선서를 한 은엽에게 국회의원이 물었다.
“증인은 함대근 대표를 알고 있습니까?”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증인의 동생과 함대근 대표는 결혼할 사이고요.”
“네. 그렇습니다. 제 동생의 신랑이 될 사람이고, 제가 대근물산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닙니다.”
“그럼 지금 뉴스 기사로 뜬 함대근 대표의 자백은 대체 뭐죠?”
“저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의원님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청탁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의원들 몇 명이 서로를 곁눈질했다. 청탁을 인정한다면, 은엽이 매수한 국회의원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끝까지 은엽을 보호해야 했다. 은엽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의 애인이 저지른 개인적인 일탈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말씀은 조심스럽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최근 제 동생과 함대근 대표 간의 애정 문제로 제 동생이 일주일간 함대근 대표를 만나주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로 인한 치정 갈등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한 사람의 비행이 이 신성한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속히 청문회 재개를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청문회를 계속합니까!”
은엽이 정직을 가장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요청했건만 국회의원은 불쾌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흥분했다.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니 국회의원들은 저마다 또 노발대발이었다.
결국 위원장이 휴식을 제안했다.
“너무 과열된 것 같은데, 일단은 잠깐 쉬겠습니다. 30분 뒤에 청문회 재개합니다. 그동안 의원님들은 경찰에 문의하셔서 사실을 속히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휴식 선언 후에도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렀다. 채서복이 분노에 찬 얼굴로 은엽을 바라보다가 청문회장을 떠났다. 은엽은 급히 채서복을 쫓아갔다.
기자들이 쫓아오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채서복은 청문회장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은엽에게 따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시죠. 쪽문으로 가시면 됩니다.”
건물 안은 위험했다. 어느 방 어느 통로에서 누가 엿듣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은엽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적한 쪽문으로 채서복을 안내했다.
“의원들 중에 직접 접촉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최측근을 통해 전달했고 실수도 없었어요.”
채서복이 못 미덥다는 듯 은엽을 바라보았다.
“제가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잘 아시잖아요. 아버지는 당당하게 청문회 이어가시면 됩니다. 그냥 함대근을 미친놈 만들어버리면 돼요.”
은엽은 채서복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확실한 대안을 못박았다.
그 순간 저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저기 있다!”
은엽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왔다. 10명은 족히 넘는 기자들이었다. 이들이 달려오자 휴식시간에 밖으로 나온 이들과 국회 밖을 지키던 기자들까지 합류했다.
“채은엽 씨, 함대근 씨에게 돈을 받아 인사청문회를 청탁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삽시간에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은엽은 소리치며 채서복을 보호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카메라를 들지 않은 남자 두 명이 뛰어왔다.
“채은엽 씨?”
희한하게도 두 남자가 등장하자 홍해가 갈라지듯이 길이 생겨났다. 기자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는 들이대고 있었지만.
은엽은 다가온 남자 두 명을 바라보았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이었다.
“경찰입니다. 경찰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경찰이 팔을 건드리자 은엽은 크게 뿌리치며 호통쳤다.
“지금 일부러 그럽니까? 이 중요한 때에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
“증거도 없는 비자금 같은 걸로 압박할 생각하지 맙시다. 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꾸미는 거죠?”
“아유 참. 아버지 생각해서 조용히 좀 가시지…….”
경찰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서 다시 은엽의 팔을 붙잡았다.
“채은엽 씨, 당신을 살인교사혐의로 체포합니다.”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동안 은엽은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는데…….
“무슨 소립니까. 내가 살인교사라니!”
“철왕파 아시죠?”
“그게 뭔데요.”
“일단 보는 눈이 많으니 서에 가서 말씀하시죠.”
두 팔을 붙잡힌 은엽이 몸부림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이것도 음해공작이라고! 내 매제 될 사람이 세련그룹을 공격했다고 지금 이러는 건가? 이게 세련그룹의 위력입니까?”
어떻게든 세련그룹을 끌고 들어가 물타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의외의 물건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채은엽 씨 자택에서 김진구의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은엽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돈 말고도 숨겨야 하는 것이 또 있었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전원을 꺼서 숨겨놓았는데, 대체 누가 그걸…….
그 와중에 저 멀리.
저 멀리서 지헌이 지켜보는 것이 보였다.
너무 섬뜩하여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