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누가 전원을 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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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누가 전원을 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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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누가 전원을 켰을까
2022.09.07.
오래전 채은엽은 김진구를 처리한 후 휴대폰을 전달받아 챙겼다.
강에 던져버릴까, 부수어서 태워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냥 가지고 있었던 건 그 안에 어떤 자료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은엽은 아버지가 무사히 대법원장이 된 후 급한 일들이 정리되면, 휴대폰의 암호를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휴대폰. 전원을 켜서도 비행기탑승모드로 설정해놓고 꼭꼭 감춰두었던 그 휴대폰.
그 휴대폰이 어째서 경찰의 손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은비에게 휴대폰을 들킨 후에 더 확실하게 감춰놓았는데.
‘설마…… 채은비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게 다 채은비 때문에 한 짓이었는데!
*
혼란 속에서 30분이 흘렀다. 인사청문회가 재개되었다.
아들이 붙들려간 후 채서복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로 돌아왔다. 한쪽 팔다리를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휴식시간 30분 동안 큰일이 있었죠.”
위원장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채서복 후보님 아드님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혐의가…… 비자금 조성도 아니고, 살인교사혐의라고요.”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채서복은 참담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국회의원들은 모두 독을 품은 눈이었다. 아들이 건넨 돈을 받은 국회의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비자금에 대한 건, 경찰에 정확한 설명을 들었습니까?”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위원장의 물음에 의원이 대답했다.
“확실한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혐의가 의심이 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정말로 이대로는 인사청문회를 이어가기 곤란할 것 같습니다.”
“중단합시다. 더는 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위원장은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인서청문특위 의원분들의 만장일치로 인사청문회를 중단합니다.”
모두의 의견을 받은 위원장이 선언했다.
인사청문회 중단.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법원장 취임의 축배를 준비하고 있던 채서복은 만신창이가 되어 국회의사당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고개를 들 수도 없는데 떳떳한 척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걸음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인사청문회가 중단되는 일이 일어났는데요. 지금 심정은 어떻습니까? 아드님께 따로 들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채은엽 변호사가 살인청부를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내 아들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채서복은 악을 쓰듯 버럭 소리쳤다.
*
몇 시간 전.
지헌이 고용한 카운슬러가 연락을 주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김진구를 뒤쫓았던 차의 정체를 파악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철왕파라는 조직을 아십니까?]
“아뇨. 처음 듣습니다.”
[그 조직 소유의 차였습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확인했고 사진도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김진구와 철왕파의 관계는 알아보셨습니까?”
[조사한 바로는 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왕파에서 살인청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살인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거죠?”
[조심스러운 예측입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이메일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채은엽 변호사가 매수한 유전자 연구소 직원의 정체도 파악했습니다. 역시 이메일에 내용 첨부했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카운슬러와의 통화를 마친 지헌은 바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채은엽이 매수한 유전자 연구소 직원의 정체와 함께, 김진구가 사망하기 전날 그를 뒤쫓았던 차량이 ‘철왕파’라는 조직의 소유라는 것까지 확인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철왕파에 대해선 일단 함대근과 채은엽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알아보아도 된다.
하지만 철왕파와 채은엽이 관계있다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며 되도록 오늘 안에 해결을 보는 것이 좋다.
고심하는 지헌 앞에 뜻밖에도 배일이 나타났다. 그리고 배일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든든하게 말했다. 마치 지헌이 도움을 청하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기분 탓일까.
이후 함대근과 대면하고 나온 지헌은 다시 만난 배일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과거의 사건을 고백했다.
출소한 김진구가 채은비를 협박했고, 생전의 김진구는 왜인지 지헌이 자신을 뒤쫓는다고 생각했고, 지헌은 김진구가 사망한 날 김진구에게서 이메일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메일에는 김진구의 뒤를 쫓는 누군가가 담겨 있었다고.
“이건 보통사건이 아닌데? 김진구는 실족사로 처리됐잖아.”
“아, 내가 실족사로 처리됐다는 얘기도 했나?”
“……응. 아까 했지.”
배일이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이 없는 상태라 지헌도 쉽게 수긍했다. 그 후 지헌은 김진구를 뒤쫓았던 차가 철왕파의 소유라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배일은 지헌의 말을 모두 믿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지헌은 마음이 든든했다.
배일은 지헌을 다시 형사과로 데려가 김진구 사망사건에 대한 전산 자료를 훑었다.
“현장에서 휴대폰이 사라졌네. 저수지에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들었어.”
“김진구가 사망한 후에 이 번호로 전화해본 적 있어?”
배일이 김진구의 전화번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헌은 배일의 질문이 엉뚱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전화를 걸어봤자 없는 번호라고 나오거나 전원이 꺼져 있다고 하겠지.”
그래도 손끝은 김진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그런데.
뚜르르르. 뚜르르르.
“……어?”
“…….”
“신호음이 가는데?”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건 지헌도 당황했다. 통화 대기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전화를 받지는 않았고 통화는 음성녹음으로 넘어갔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음성녹음으로 연결되었어.”
“누군가가 김진구의 휴대폰 번호만 물려받았을 수도 있겠네. 그게 아니면…….”
“…….”
“휴대폰을 가져간 사람이 어쩌다 전원을 켠 것일 수도 있고.”
배일이 덤덤하게 내놓은 의견에 지헌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배일은 곧장 김진구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했다. 위치는 서울. 지헌도 아는 건물이었다.
“……채은엽의 집이야.”
몇 층인지까지 알 수 없으나 딱 은엽이 사는 맨션이었다.
지헌의 확인에 배일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헌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배일도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담당팀에 사건 넘겨주고 바로 철왕파 쪽으로 갈 거야. 담당팀에서는 김진구의 휴대폰이 왜 거기 있는지 파악할 거고 적당한 답을 얻지 못하면 바로 이 건물을 수색하게 될 거야.”
배일의 잽싼 행동력에 지헌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배일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래전의 그 똑똑하고 활기 넘치던 소년은 믿음직스럽고 명석하고 행동이 빠른 경찰이 되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야.”
“…….”
“오늘 하루가 길겠다. 무사히 보내길 바랄게.”
배일은 인사를 하고 바로 떠났다.
두 시간 만에 철왕파와 접촉한 배일은 곧장 김진구에 대한 진술을 확보했다. 배일은 마치 오늘을 위하여 조직의 여러 약점을 쥐고서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신속했다. 역시 철왕파가 채은엽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 것이었다.
철왕파의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곧바로 채은엽의 자택을 수색했다. 김진구의 휴대폰은 에어컨 기계 안쪽에 밀봉되어 있었다.
꽤 은닉에 신경 쓴 흔적이 보였지만 아주 멍청한 실수가 있었다. 휴대폰의 전원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증거를 확보하고, 채은엽이 붙들려가는 상황까지 지켜본 지헌의 머릿속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남았다.
‘정말 채은엽이 전원을 켜놨다고?’
전원이 켜진 휴대폰이라니. 치밀한 채은엽이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었다.
이건 마치 나 좀 봐주세요, 잡아가 주세요, 하는 메시지 같잖아.
채은엽은 그럴 녀석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가 전원을 켜놓았을까.
놀라운 점은 또 있었다. 그간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일들이 하루 만에 뚝딱 해결된 것이다. 물론 지헌이 경찰서에서 상주하며 일을 밀어붙인 덕이 크겠지만.
모든 일들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착착. 마치 하늘이 정지헌을 위해 길을 열어준 것처럼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
「채서복 장남 채은엽, 살인교사혐의로 체포」
「사상 초유,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 중단」
「국회에서 쫓겨나는 대법원장 후보 채서복, 비자금은 모르쇠」
「채은엽의 사주를 받은 국회의원은 누구인가」
세련그룹에 대한 뉴스 기사로 도배되었던 세상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모든 신문사에서 채은엽 채서복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세련식품 불매운동을 벌이자며 아우성이었던 여론은 채서복에 관한 특검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들끓었다.
소란 속에서 어느덧 저녁이 찾아왔다.
오늘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하느라 배일은 바쁜 것 같았다. 지헌은 배일에게 고맙단 말도 전하지 못하고 경찰서를 떠났다.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경찰에 바통을 넘겼지만 회사 일에는 뒷수습이 남았다. 지헌은 곧장 귀가하지 못하고 본사로 가 그룹의 임원들과, 사건들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회의했다.
오늘 밤, 그룹의 계열사들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최종 입장문을 내놓을 것이고 모두 기사화될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정리되겠지.
회의를 마친 지헌이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형 지태가 고생했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그 뒤로 정재광 회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이제 광고회사는 그만 다니고 그룹 본사로 들어와.”
“네에?”
편안히 풀어져 있던 표정이 다시 꽉 긴장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자신이 너무했다. 잠시 잊었다.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했는데, 언제나 능력의 반절만 드러내고 살았는데, 일주일 동안 너무나 최선을 다해 살아버렸다.
지헌은 식겁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 돼요. 저는 안 돼요.”
“왜.”
“아버지, 저 정오 7년 만에 만난 거예요.”
“그래서 잘 붙어 있으라고 결혼시켜줬잖아.”
“제가 알아서 한 거지 아버지가 시켜주신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집에서 붙어 있으면 됐지. 회사에서까지 붙어 있게?”
“본사로 가면 계속 일만 시키실 거잖아요. 집에도 못 들어가게.”
갑작스럽게 절박해진 지헌의 목소리가 쉬어갔다.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능력 없어요. 형 같은 리더의 자질이 저에겐 전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정리해.”
그간 지헌을 유심히 지켜본 재광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과자 공장으로 시작한 세련식품이 오늘날 큰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건 적재적소에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재광의 혜안 덕이 컸다. 재광은 이번에도 자신의 감을 확신했다. 지헌은 훌륭한 인재였다.
“다음 달 내로 그 회사에 네 자리는 없앨 거다.”
지헌이 고집을 부리니 재광 또한 완고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늘어진 눈매로 아버지를 오래 쳐다보던 지헌이 쓰게 웃으며 한쪽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될 텐데요?”
“뭐가 또 안 되냐. 네가 뭐라고.”
“예나 아빠죠.”
“…….”
“예나 아빠한테 그러시면 안 될 텐데요?”
“…….”
“손녀딸이랑 앞으로 연락 안 하고 싶으세요?”
지헌의 도발에 재광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러나 긴장한 듯 이내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예나는 잘 있냐?”
“이제 가서 확인해봐야죠. 요 며칠 어린이집 등원할 때 인사를 못 해서 삐친 것 같은데…….”
“아이고. 귀여워라…….”
아빠는 아이가 삐친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데, 할아버지는 삐친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상상하느라 가슴이 간지럽다.
손녀 사랑, 세계 평화.
어쨌든 지헌은 아이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예나랑 좀 놀러와. 하루 자고 가도 좋고.”
재광이 떠나려는 지헌에게 소박한 바람 하나를 전했다.
“네.”
길었던 하루.
싸움을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