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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꿈이 사라진 자리엔 (144/183)


144. 꿈이 사라진 자리엔
2022.09.14.


퇴근길.

집으로 향하는 지헌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먼저 퇴근한 정오가 집에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고 했다. 아픈 건 아니라고 했지만 왠지 그녀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최면치료센터에서도 정오는 속이 좋지 않은 듯이 화장실로 달려갔었다.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린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배일이었다. 이전에 경찰서를 나서며 문자메시지를 남겨 놓았는데 이제야 연락이 온 것이다.


“배일아.”

지헌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전화를 받았다.


[지헌아. 일이 많아서 연락을 못 했어. 미안해.]

“아니야, 이해하지. 이제 일은 좀 정리된 거야?”

[응. 거의 정리됐어. 급하게 발령이 나서 사람들한테 인사를 못 했는데 이번에 출장이 길게 잡혀서 조금 더 있다가 다음 주에 떠나려고.]

“그래. 잘됐다. 나도 또 들를게. 아니면 우리 집에 올래? 초대할게.”

[…….]

“어머님도 정오도 예나도 다 좋아할 텐데.”

쉽게 결정하기는 어렵겠다는 듯 배일이 길게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럼 다음 주에 시간을 내볼게.]

“고마워. 나는 언제든지 괜찮아.”

[아마 다음 주 화요일쯤이 될 거야.]

“알았어. 그날 아침에 연락 주면 돼.”

[응. 그럴게. 그럼 잘 지내고.]

배일과 담백한 통화를 마친 지헌은 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오늘도 역시 예나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아빠아!”

“예나 오늘도 재미있게 보냈어?”

“응!”

예나를 안아 들었다가 내려놓았을 때 국순도 현관까지 나왔다. 정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얼른 저녁 먹어야지.”

“네. 정오는요?”

“방에서 안 나오네. 한번 들어가 봐.”

“네. 그리고 어머니,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뭔데?”

“배일이 아시죠? 예전 집 옆집에 살았던 경찰.”

“그럼. 그 친구가 이번 사건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많이 줬다며.”

“네. 배일이를 집에 초대하려고요. 다음 주 화요일쯤,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고말고! 같이 저녁 먹으면 되겠네.”

“그러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 신경 쓰시면 힘드실 테니 음식은 시켜 먹으려고요.”

“아니야. 하나도 안 힘들지. 시켜 먹는 것보다 내 음식이 나아. 경찰 선생님도 내 음식 좋아하고.”

시원하게 대답했는데도 지헌이 망설이는 것 같아 국순은 한 번 더 가뿐하게 말해두었다.


“괜찮아. 정말 안 힘들어.”

“고맙습니다. 그럼 저도 일찍 와서 조수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지.”

어느새 지헌은 국순과도 쿵짝이 잘 맞는 사이가 되었다. 정오보다 지헌이 더 요리 감각이 있다는 건 국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헌은 국순에게 인사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방 안에 있던 정오는 화들짝 놀랐다.


“헉!”

정오가 등 뒤로 무언가를 잽싸게 감추는 것을 알아본 지헌이 바로 다가갔다.


“뭘 감추는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비밀이야?”

“아니 뭐, 그렇지. 비밀이지.”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몸을 바짝 기울이고 팔을 뻗은 지헌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정오는 금세 등 뒤에 감춘 것을 들켜버렸다. 지헌이 유연하게 임신테스트기를 낚아채 갔다.

정오는 너무 일찍 검사를 해버린 게 왠지 쑥스러워 두 손을 들어 두 뺨을 감쌌다. 임신테스트기의 결과가 불분명했다. 두 줄은 두 줄인데, 오른쪽 선은 기준선에 비해서 흐릿했다.


“아니…… 아직 흐릿해서 나중에 다시 해보려고.”

“이게 흐릿한 거야?”

지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스트기를 보여주었다.


“어? 이게 언제 이렇게 진해졌지?”

정오가 확인했을 때보다 빨간선은 훨씬 더 진해졌다. 이제 기준선과 다를 바 없었다.

정오는 화장대 위에 놓아둔 또 다른 테스트기도 가져왔다.


“어? 이것도 어느새 진해졌네? 점점 진해지나 봐.”

7년 전에는 결과를 꽤 빨리 확인했기에 정오가 마음을 급하게 먹은 것이다.

테스트기는 두 개 모두 빨간선이 진해져 있었다. 지헌은 두 개의 테스트기를 들고서 멍하니 서 있었다. 지헌이 충격을 받은 건가 하는 생각에 정오가 슬그머니 물었다.


“괜찮아?”

“……7년 전에도 그랬지? 분명히.”

“응?”

“이게 한 개가 아니었어.”

그는 7년 전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래. 그때 내가 아니라고 했던 건 그거였어. 의사 선생님이 물었었잖아. 네 방 책상 서랍을 열면 임신 테스트기가 하나 있을 거라고.”

“…….”

“아니야. 여러 개였어. 그렇지?”

지헌이 점점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정오의 두 눈이 말갛게 젖었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7년 전, 정오는 테스트기를 네 개 구입했고 책상 위에 놓아둔 하나와 서랍에 숨겨둔 세 개를 모두 지헌에게 들켰었다.


“……기억나?”

그의 두 눈도 이내 붉어졌다. 지헌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렸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듯.


“오빠, 괜찮아?”

이윽고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빠르게 일그러져가는 그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 마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마음, 단박에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 이상한 표정을 만들었다. 지헌은 바르르 떨려오는 손을 뻗어 정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하아, 그녀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숨긴 채 길게 탄식을 내뱉은 그가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

“…….”

“이제 절대 떨어지지 말자.”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우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의 힘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정오는 조금 버거웠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정오는 한참 후에야 지헌의 결박에서 풀려났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어때? 다 기억났어?”

“그날 임신테스트기를 봤던 건 기억 나. 네가 많이 당황스러워했는데, 내가 얘기를 못 하고 바로 떠난 것도.”

“맞아! 그랬어!”

그날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된 정오도 환호했다.

꽤 진정이 된 지헌이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뭐가?”

“뭐든지 다.”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태어나줘서 고맙다.”

“…….”

“사랑해.”

농담 같은 채근에 진지하게 대답한 그가 정오의 한쪽 손을 끌어가 손등에 쪽 입 맞췄다.

한 번으로는 표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몇 번의 키스가 더 이어졌다. 정오는 7년 전의 겁 많은 아가씨와 이제야 이별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만 걸려오지 않았어도 좀 더 행복했을 텐데.

오늘의 훼방꾼은 지헌의 형 정지태였다. 지헌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전화를 받았다.


“응. 형.”

[소식 들었어?]

지태는 인사를 할 여유도 없이 소식을 전했다.


[채은엽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채서복 판사의 사망 소식이었다.

*

함대근이 붙들려가며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같은 날 오빠도 살인교사혐의로 붙들려가고, 아빠의 인사청문회는 중단되고.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은비는 숨어 지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허겁지겁 돌아왔다.

-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모두 내 탓이다.

채서복이 남긴 짧은 글이 은비를 더욱 참담하게 했다. 은비는 관을 부여잡고 목놓아 울었다.


“아빠아, 아빠아…….”

장례 준비가 다 되어갈 즈음에 은엽이 왔다. 이틀 동안 경찰서에서 지낸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타난 은엽은 넋을 잃은 채 아버지의 관 앞으로 다가오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슬픈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다 오빠 때문이야.”

은비가 그런 은엽을 질타했다.


“결혼이 중요해? 돈이 중요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

“오빠만 아니었어도, 아빠 이렇게 안 됐어.”

“…….”

“오빠가 김진구만 건드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감정이 폭발하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절망에 빠져 흐느끼던 은엽이 고개를 돌려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은비를 바라보았다.


“너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네가 그 휴대폰 신고한 거 아니냐고.”

“하아.”

여전히 아무것도 뉘우치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오빠를 보며 은비는 더욱 허탈해졌다.

*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은엽은 상주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살인교사혐의로 경찰에 붙들려가는 장면이 세상에 생중계된 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다.

은엽과 악수를 대놓고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은엽은 더 이상, 자신을 꺼리는 이들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짓지는 않았다.

꿈이 사라졌다. 꿈이 사라진 자리엔 미움만 남았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자신을 몰아붙인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복수를 다짐한 은엽은 개인 이메일함을 열었다. 뒤로 꽤 밀린 메일 하나가 기억났다. 김진구의 원한 관계를 알아봐달라며 심부름업체에 요청을 해두었는데,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느라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장문의 메일은 멀미를 일으킬 정도였지만 은엽은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아시다시피 김진구는 7년 전 뺑소니 사건 직전까지 양아치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그때의 피해자들 중에는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도 꽤 됩니다. 그들의 리스트와 사건들을 첨부하겠습니다.」

긴 이메일에 첨부한 자료까지, 심부름업체는 조사에 꽤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관련자들 중에 김진구와 체형이 비슷한 남자는 없는 것 같았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은엽의 시선이 이메일의 말미에서 멈추었다.

「모든 사건들은 피해자가 명확한데 한 가지 신원이 확인 안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실 24년 전이라 얘기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원한 관계라면 뭐든지 알아봐달라고 하셨기에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남기겠습니다.

김진구 집안이 전북 남원에서 크게 식당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러니까 24년 전에 식당에서 고용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편 없이 아들 하나만 데리고 서울에서 남원으로 이사를 왔는데, 서울에서 식당일을 하다가 사정이 생겨서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애 엄마가 아주 젊고 예뻤다고 합니다. 김진구의 아빠가 바람기가 좀 있었는데 그 애 엄마한테 집적거렸던 모양입니다.

그 후로 결국 일이 크게 터졌는데, 김진구의 엄마는 남편 말만 믿고 그 애 엄마가 김진구의 아빠를 꼬셨다며 몰아붙였다고 하네요.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 애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군요. 식당에서 얼마나 괴롭혔는지, 제 때에 치료를 못 받아서 그리되었다고 합니다.

그 애 엄마에 대해서는 서류 한 장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유 씨인데 정확한 이름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요. 워낙 오래전이라 아이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애엄마의 아들이 당시 9~10살이었는데 아주 똑똑했다고 하네요. 왜 서울에서 남원까지 왔느냐니까 아들이 좋아하는 바둑기사가 남원 출신이라 남원으로 왔다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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