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 너지? 너잖아 (145/183)


145. 너지? 너잖아
2022.09.17.


토요일, 지헌은 재광과 함께 채서복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빈소에는 은비와 채서복의 부인, 둘뿐이었다. 은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비는 많이 지쳐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의외로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지헌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동도 없었지만, 장례식장 앞을 지키고 있던 몇몇의 기자들에게 노출되었다. 기자들이 계속 따라붙으며 현재의 심정과 진행 중인 송사에 대해 물었지만 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문 시간 30분이 하루처럼 길었다.

차에 탑승한 지헌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넥타이를 끌렀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동정여론도 크지 않고.”

“다들 씁쓸한 거지. 인사청문회 때에야 채서복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제대로 알아볼 겨를도 없이 이렇게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재광도 착잡한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어머니는 안 오시려나 봐요?”

“몸이 안 좋아.”

“많이 안 좋으세요?”

내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질 않는다고, 검사를 받아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재광은 꾹 참았다. 대신 작은 바람을 털어놓았다.


“네 엄마 있을 때 잠깐 오면 어떻겠니. 너라도 말이야.”

“…….”

“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면 네 엄마도 못 이기는 척 받아줄 텐데.”

“아직은요. 조금 안정이 된 후에.”

아들은 거절했다. 그런데 표현이 조금 이상했다.


“안정?”

재광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눈치챘는지 지헌은 빙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

월요일.

지헌은 정오와 함께 최면치료센터를 방문했다. 의사에게 기억이 조금 떠올랐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


“금요일 밤에, 아내의 임신테스트기를 보는 순간 기억이 떠올랐어요. 장면장면은 어제 일처럼 선명했고요.”

“반가운 일이네요! 그때 얘기를 조금 더 해보시겠어요?”

지헌은 금요일에 있었던 일을 의사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지헌의 사연을 들은 의사는 생각에 잠겼다.


“사고 전날의 일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어지러운데, 이것들을 잘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정오 씨를 만나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정오 씨와 헤어져서 무엇을 했는지, 언제 반지를 사러 갔고 언제 꽃집에 갔는지. 그다음 날에는 이정오 씨에게 프러포즈할 준비를 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을 했을지,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도 생각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는지.”

의사의 의견에 끄덕인 지헌이 또 말했다.


“아, 선생님,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뺑소니사고를 일으킨 남자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남자가 꽤 억울해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누군가가 그 남자에게 누명을 씌운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사고 당시의 기억까지 떠오르길 바란다는 말씀이시죠?”

“네. 제 기억이 돌아온 날과 가까이 있는 사건이니까요.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

“사고 당시에 정오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후회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거든요. 사고 전날의 기억이 있고, 사고 직후 쓰러졌을 때의 기억도 있으니 사고 당시의 기억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지헌은 퍼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지헌이 의지를 보이니 의사 또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7년 전 그날의 기억을 찾아, 지헌은 의사의 지시대로 눈을 감았다.


“7년 전 11월 2일. 그때로 돌아가죠. 여자친구의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했습니다. 책상 위에 하나, 서랍에 세 개가 있었죠. 여자친구가 많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는데 위로해주지 못하고 곧장 여자친구 집을 떠났습니다. 약속이 있었죠. 무슨 약속이었나요?”

“……자선행사를 갔어요.”

“다녀와서는요?”

“돌아오는 길에 프러포즈 반지를 사고 꽃집에 들렀어요…… ‘플라워드림’이라는 꽃집에서 프러포즈 꽃을 주문했어요. 다음 날로 예약하고 카드를 쓰고…….”

“그 후에는 바로 집으로 갔나요?”

“……집에 가서 전화를 했는데, 정오한테…….”

정오도 알고 있는 내용 사이에 지헌은 느릿한 목소리로 새로운 기억 하나를 얹었다.


“……병원에 가자고 말했고, 산모수첩을 받아오자고 했어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했나요?”

“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발목을 잡아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서로 말한 적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다른 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오의 눈시울이 따뜻하게 젖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다음 날 세 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러고 바로 잠들었나요?”

“잠은 잘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려고 노력했어요.”

“그럼 이제 다음 날 얘기를 해볼까요? 일어나서 뭘 했죠?”

“……정오한테 데리러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고.”

“…….”

“‘이타봐’라고, 정오가 답문을 보내서 웃었어요.”

“왜 웃었나요?”

“너무 귀여워서.”

그 대답에 의사는 잠시 본분을 잊고 피식 웃었다. 정오 또한 눈물 맺힌 눈으로 미소 지었다.


“……다음에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형 얘기를 했는데…… 형이 달걀 테러를 당했다고. 그래서 어머니께 걱정 마시라고 했어요. ……소개해줄 친구가 있다는 말도 했어요.”

“어머니 반응은요?”

“누구냐고 물어보셨는데, 다시 연락드리겠다고만 대답했어요.”

“그럼 이제 집에서 나올 때가 됐겠군요.”

느릿하게 이어진 목소리는 어느덧 뺑소니 사고가 일어날 즈음에 이르렀다.

의사는 말을 더 이어가기 전에 지헌의 체온과 호흡, 맥박을 체크했다. 의사에게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정오 역시 심장이 온몸을 압박하듯이 뛰어대서 보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도 굳게 마음먹고 자리를 지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겠죠? 주차되어 있는 차까지 가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나요?”

“새로 태어날 아이 생각을 했어요.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것들을 생각했어요.”

“그리고요?”

“그리고…….”

“…….”

“생각은 더 못 했고…….”

눈을 감고 있는 지헌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손등과 팔뚝의 혈관까지 도드라질 정도였다. 입을 벌리려다 말고, 또 목소리를 내려다 말고, 주저하고 힘들어하다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헉!’ 하고, 거친 숨을 터트렸다.

사고의 충격을 다시 한번 느낀 듯이.

정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떠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의사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눈을 뜨는 게 좋겠어요. 셋까지 세면 기억에서 빠져나옵니다. 하나 둘 셋.”

지헌이 번쩍 눈을 떴다. 고통스러운 듯 급하게 최면에서 빠져나온 흔적은 눈빛과 호흡에 고스란히 남았다. 흉통이 크게 들썩거렸다.


“괜찮아요. 잘했습니다. 후우우…… 천천히 호흡하세요. 후우우…….”

의사가 멍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토해내는 지헌을 안정시켰다. 지헌은 여전히 진정이 안 된 상태로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엉뚱한 물음을 읊었다.


“……들어본 적, 있나?”

“지금 뭐라고 하셨죠?”

“……뭔가를 얘기하면서, 그걸 들어본 적 있느냐고 제게 물어봤어요. 그 남자가.”

“그 남자라면? 사고 낸 남자가 말을 걸었다고요? 정지헌 씨한테?”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 저한테 물었어요. 무언가를…… 들어본 적 있느냐고.”

“…….”

“그건 뭐였을까요?”

지헌이 더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물었다. 의사에게 건넨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물음이었다.

*

국순은 학원으로 향했다. 거의 20년 만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과 똑같은 진도로 함께 공부하려니 버거운 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젊어진 느낌에 흐뭇하고 신이 나기도 했다.

국순이 학원 앞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사님, 안녕하셨어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뜻밖에도 권배일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한참 만에 알아보았다. 국순은 반갑게 인사했다.


“내일 우리 집에 오신다면서. 우리 사위한테 들었어요.”

“아…… 그게 문제가 좀 생겼는데…….”

배일은 난감한 듯 말끝을 주욱 끌었다.


“왜. 바쁜가?”

“네. 내일 일이 생겨서요. 급하게 진주로 다시 내려가게 됐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우리 사위도 그렇고 정오도 예나도 기대 많이 했을 텐데, 서운하네.”

“나중에 또 서울에 오게 되면 들르겠습니다. 아, 아니면 오늘은 시간이 좀 있는데.”

“그래요? 그럼 오늘 같이 저녁 할래요? 내가 맛있게 차려줄게요. 진주 가서도 계속 생각나게.”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이따가 일곱 시쯤에 와요. 내가 맛있게 차려놓을게.”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지헌이한테 연락할게요.”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그럼 이따 봐요.”

국순은 배일에게 인사하고서 곧장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배일은 국순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보았다.

*



“권배일.”

지난밤. 채은엽이 배일을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거처까지 찾아온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나 알죠? 알 거야. 몰라서는 안 되지.”

은엽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꽤 활력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것은 살기였다.

은엽은 살기가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다 알고 찾아왔다는 듯이 배일에게 물었다.


“7년 전에 김진구를 그렇게 만든 놈이 너지? 너잖아.”

“…….”

“경찰 신분을 이용해서 김진구랑 정지헌을 동시에 보내버리려고 했어. 무서운 자식.”

은엽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24년 전의 흔적을 추적했다. 서울에서 남원으로 거처를 옮긴 후 사망한 미혼모를 찾는 과정은 고되었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남원 출신 바둑기사’라는 단서가 유용했다. 유명한 바둑기사, 이강호가 남원 출신이었다. 은엽은 이강호가 살던 마을과, 이강호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자료를 뒤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유수일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자신과 동갑인 남자아이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이는 이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며 이름이 바뀌었다. 유수일에서 권배일로.

권배일은 7년 전 용산 경찰서의 경찰이었고, 김진구와 똑같은 키, 비슷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지헌의 초등학교 동창. 바둑영재반 출신.

은엽은 배일의 신상을 파악한 후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권배일은 김진구에게뿐 아니라 정지헌에게도 원한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정지헌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런 짓을 했을까. 응?”

“…….”

“정지헌을 죽이려고 하고선, 이정오의 집 옆에 살면서 이정오의 동태를 살피고 말이야.”

“…….”

“이정오한테 홀딱 빠지기라도 했나? 응?”

은엽은 ‘이정오’라는 말에 배일이 움찔하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를 잃고 더는 웃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웃음이 계속 날 만큼 짜릿하고 재미났다. 은엽은 간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식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걸 보니까 어때. 죽이고 싶지 않아?”

“…….”

“우리 같이 정지헌을 없애는 거야. 어때?”

내 소원을 이루어줄 좋은 말을 발견했다.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준다면 너한테 10억을 주겠어.”

“…….”

“어때. 구미가 당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