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나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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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나락으로
2022.09.28.
지난 일요일 밤.
“우리 같이 정지헌을 없애는 거야. 어때?”
배일의 숙소 앞까지 찾아온 채은엽이 배일을 설득했다.
김진구를 저수지에 밀어버린 녀석은 일을 처리하자마자 해외로 도피했다. 그래서 철왕파는 진술이 쉬웠던 것이다. 어쨌든 철왕파도 은엽의 일로 피해를 보게 되었으니 그쪽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은엽에게 권배일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준다면 너한테 10억을 주겠어.”
“…….”
“어때. 구미가 당기지?”
은엽의 간교한 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배일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살의에 빛나던 은엽의 동공이 어두워졌다. 미간에는 바짝 주름이 잡혔다.
이 녀석이라면 넙죽 반길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단번에 포기할 순 없었다. 은엽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피식 비웃었다. 배알이 꼴렸다.
“어디서 시치미를 떼려고. 내가 다 알고 왔는데.”
하지만 은엽은 더 가까운 정보에는 어두웠다. 은엽을 검거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권배일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가서 쉬셔야 할 것 같네요. 댁으로 돌아가서 쉬시죠.”
배일은 은엽을 조용히 타일렀다. 경찰이 비행청소년을 달래듯.
그럴수록 은엽은 더욱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어?”
먼저 돌아선 배일의 등 뒤에 대고 은엽이 외쳤다.
“네가 못 하면 정지헌 그 자식이 널 먼저 죽일 거라고!”
은엽의 섬뜩한 말에 배일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은엽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은엽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얼굴로 돌아섰다.
*
다음 날 저녁.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은엽은 지헌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조용히 지헌을 기다렸다. 지헌의 차를 잘 알고 있는 덕에 모든 것이 쉬웠다. 새벽에 지헌의 차에 몰래 위치추적기를 달았다.
그리고 불법 개조한 차를 얻어 번호판까지 바꾸어 달고 또 이 번호판을 교묘히 가릴 수 있는 테이프까지 붙이고서 지헌을 기다렸다.
“권배일. 네가 못 하면 내가 죽여.”
정지헌 그 자식은 내가 없애야지.
그간 한숨도 못 잔 탓에 잠시 졸았지만 위치추적기를 단 차량이 근처로 다가오고 있다는 알림에는 즉각 반응했다. 눈을 뜬 은엽은 주차장 입구를 노려보았다.
조금 더 기다리니 지헌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은엽은 먼 곳에서 시동을 걸고서 대기했다. 지헌이 차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로 가는 동선은 예측이 가능했다.
기회는 단 한 번. 아파트 입구 바로 앞에서 정지헌을 들이받을 것이다.
이윽고 지헌이 차에서 내렸다. 녀석은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걷지 않고 재빨리 뛰는 모습에 은엽도 전조등을 밝게 켜고서 가속페달을 꽉 밟았다.
정지헌. 잘 가라.
부우우아아앙!
그러나 그 순간!
“헉!”
옆에 주차된 차 한 대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끼이이이익!
콰아앙!
은엽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소용없었다. 은엽의 차는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제 가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정체불명의 차를 들이받았다.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차 두 대가 박살이 났다.
지헌은 자신을 향해 번쩍이며 달려드는 빛을 보았다. 7년 전의 사고를 기억하는 몸은 이미 사고를 당한 것처럼 빳빳해졌다. 움직임이 무거워진 그 순간.
끼이이이익! 콰아앙!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차를 밀어내듯 또 다른 차 한 대가 끼어들었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두 차가 맞물리며 옆으로 돌았다.
그 바람에 지헌 또한 급하게 몸을 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헌이 저편으로 나동그라진 사이에 중량이 비슷해 보였던 두 대의 차는 반 토막이 났다.
헉, 헉, 헉.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지헌 또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굉음을 들은 관리인 두 명이 뛰어왔다.
“사고 났어! 빨리 119 불러!”
관리인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헌은 정면의 차를 바라보았다.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은 남자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채은엽이었다.
그렇다면 도중에 끼어들어 사고에 맞선 사람은 누구인가.
지헌은 떨려오는 발걸음으로 다른 차량에 다가섰다.
“……수일아.”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은 사람은 다름 아닌 권배일이었다.
쾅쾅쾅.
“수일아, 수일아.”
차가 눌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쾅쾅 두드려도 안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운전석에 기대 있는 배일의 표정은 어찌 된 일인지 평온해 보였다.
*
예나를 데려다주러 온 진서는 정오가 붙잡아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 옆에 앉아 있게 되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왜 그래요, 정오 씨…….”
붙잡는 정오의 손에는 힘이 실려 있었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알려주지 않아 진서는 의아했다. 국순 또한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정오는 진서의 질문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바르르 떨었다. 배일과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배일이 떠난 후에 진서를 바래다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그 이유를 곧장 말할 수도 없었다.
그사이에 지헌에게 전화가 왔고, 지헌은 바로 올라오겠다고 말했다.
“좀 더 있다가 가세요. 지헌 씨도 오면, 지헌 씨한테 바래다주라고 할게요.”
전화를 끊은 정오가 안도하며 진서에게 말했다.
정오와 국순이 왜들 그렇게 긴장해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진서는 눈치껏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른 올라온다던 지헌은 10분,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정오는 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지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저기 언니, 저 잠깐 나가보고 올게요. 여기 계세요.”
정오는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딘 순간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이르자 사이렌 소리가 더 커졌다.
“아이고, 어디서 사고가 났나 보네.”
중간에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웃의 혼잣말에 정오는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지하주차장에 이르러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주차장은 혼잡했다. 렉카와 경찰차와 구급차,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로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 구급대원들이 사람 한 명을 옮기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설마…….
“잠깐만요, 잠깐만.”
정오는 파들파들 떨려오는 다리로 나아갔다. 두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가까이 다가간 정오는 스트레처에 실려 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제 입을 막았다. 채은엽이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왜. 대체 왜.
그럼 내 남편은 어디 있는 거지?
“정오야.”
그때, 지헌이 옆으로 다가와 정오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하아.
짧은 탄식과 함께 지헌을 와락 끌어안았다. 지헌이 그런 정오를 다독였다.
“걱정했잖아아. 왜 연락을 안 했어어…….”
“미안해. 미안해.”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정오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오빠도 다쳤어? 채은엽이 왜 여기 있어?”
“사고가 났어. 채은엽이랑…… 배일이랑.”
지헌이 대답한 순간, 구급대원들이 차에서 배일을 꺼내는 데에 성공했다.
정오의 얼굴은 다시 굳었다.
아니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오래전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사람이. 내게 미안하다고 꾸벅 인사를 했던 사람이…….
권배일. 그가 두려웠고, 원망스럽긴 했지만 이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니었다.
정오가 충격을 받은 눈으로 현장을 응시하는 동안 구급대원들은 배일의 의식을 확인한 후 구급차에 실었다. 지헌이 정오에게 말했다.
“정오야, 나는 배일이랑 같이 갈게.”
“…….”
“연락할게. 예나 잘 재워줘.”
정오가 먹먹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헌은 바로 구급차에 올랐다.
*
병원에 도착한 후, 배일의 수술 채비가 이루어졌다. 배일은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
지헌은 수술실 앞을 지키며 배일의 예전 동료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했다. 광진 경찰서 동료 중에 배일과 친한 이가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배일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권 경사는 가족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부모님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런데 괜찮습니까? 권 경사가 진주 경찰서에 사직서를 냈다고 하던데요. 지난 토요일에요.]
사직서까지 냈다고?
뜻밖의 소식이었다. 지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7년 전 뺑소니사고의 진범이라고 생각하여 정오에게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알고 급히 집으로 달려갔는데, 권배일은 오히려 채은엽이 지헌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것을 몸소 막아냈다. 마치 목숨을 각오한 듯이.
정말 그런 각오였던 건가? 그래서 사직서까지 낸 거야? 다 끝이라고 생각해서?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해?
권배일, 너는 대체 어떤 녀석이지?
자신이 끄집어낸 기억과 오늘의 경험 사이에서 혼란이 일었다. 벽에 기대어 멍하니 다른 벽을 응시하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빠.”
정오였다. 예나를 재우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갈피를 잃었던 지헌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미로 속에서 길잡이를 만난 듯 안정을 찾았다. 지헌은 다가온 정오를 안아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주었지만 자신이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전, 또다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듯한 그 강렬한 빛 속에서 지헌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나를 잃는 것보다 너를 잃는 게 내게는 더욱 큰 두려움이다.
“오빠는 괜찮아?”
살포시 안겨 있던 정오가 반걸음 물러나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응. 멀쩡해.”
“아픈 데는 없고?”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서 애틋하게 물어오는 아내를 보니 삶이 실감 났다. 지헌은 대답 대신 웃어 보이고서 청했다.
“정오야. 결혼하자.”
“이미 했잖아.”
“결혼식 말이야.”
“…….”
“보고 싶어.”
“…….”
“웨딩드레스 입은 이정오.”
그 강렬했던 빛 속에서 한 줄기 후회가 스쳤다. 여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숱하게 상상해보았지만 실제로는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미안했다.
우리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든 나는 너에게 미안하겠구나.
그 마음에 이르니 그저 사랑하는 마음인 지금 이 순간이 기적 같았다.
“사랑해.”
그의 뜬금없는 고백에 정오는 괜스레 울컥했다. 같은 고백을 하면 목소리보다도 울음이 더 크게 쏟아질 것 같아 정오는 그저 지헌의 품 안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한참 후 지헌의 품에서 나온 정오가 배일에 대해 물었다.
“경사님은 어떻대? 얼마나 다친 거야?”
“잘 모르겠어. 수술 중인데 아직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
“…….”
“채은엽 차가 내 쪽으로 돌진해 왔어. 그때 배일이 차가 끼어들었어. ……몸을 던져서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지헌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지헌을 지켜보는 정오 역시 가슴이 아렸다.
9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수술은 잘되었고, 이제 차도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의사가 전했다. 배일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묵묵히 입을 닫은 지헌에게, 정오가 USB를 건넸다. 배일이 놓고 간 USB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정오도 모른다.
“권배일 경사님이 집에 이걸 놓고 갔어. 오빠한테 전해주라더라.”
지헌은 곧장 노트북PC를 가져와 USB 안에 든 자료를 살폈다.
USB에는 몇 개의 파일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동영상이 재생되자마자 정오는 ‘헉!’ 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헌의 7년 전 사고 동영상이었다. 지헌을 차로 들이받고 차에서 내려 지헌의 앞으로 다가가는 권배일의 모습이 동영상에 담겨 있었다.
동영상에는 지헌과 배일 두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비상계단 쪽에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런데 이거…… 채은비 아니야?”
정오가 비상계단 쪽에 숨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뻔히 지켜봐 놓고도 김진구가 뺑소니범이라고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정지헌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지헌은 다 지난 일이라는 듯 담담히 동영상을 끝까지 확인한 후 다음 동영상을 클릭했다. 이번 동영상은 음성까지 담겨 있었다.
병실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어쩐지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아 지헌은 미간을 좁혔다.
“7년 전, 내가 입원했던 병실이야.”
기억을 떠올린 지헌이 정오에게 말했다.
“7년 전 병실? 권배일 경사가 이런 파일까지 갖고 있었던 거야?”
지헌의 설명에 놀란 정오가 물었다.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동영상에서 더욱 끔찍하고 놀라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하나 없애버려. 성냥에 불을 켜서 뇌를 태우듯이. 성냥불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질 거야. 여행을 다녀온 기억, 군대를 다녀온 기억, 새로운 사람을 만난 기억. 모든 기억에 불을 붙여. ……내게 필요 없는 기억이니까. 쓸데없는 기억이니까.]
으으윽…….
지헌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노트북PC를 통해 들려오는 채은엽의 목소리가 숨통을 꽉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빠…… 괜찮아?”
바로 옆에 있는 정오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락으로, 나락으로.
끝없는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