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용서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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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용서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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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용서하는 용기
2022.10.01.
“오빠.”
눈을 뜬 채로 의식을 잃은 듯 호흡마저 멈춘 지헌을, 정오가 흔들어 불렀다.
하아아아!
그제야 지헌은 의식이 깨어난 것처럼 탁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채은엽의 모습과 채은엽의 목소리…….
나는 채은엽 때문에 기억을 잃었던 것인가.
채은엽이 나의 기억을 조작했던 건가.
지헌은 고개를 저었다.
채은엽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채은엽이 마법사도 아닐 테고, 어쩌다 한 번의 최면 가지고 기억을 잃을 수는 없다. 불운이 맞아떨어진 것이리라.
지헌은 다음 동영상을 클릭했다. 이것도 비슷한 영상이었다. 다만 채은엽의 옷이 달라져 있었다. 다른 날이었던 것이다. 이어진 세 개의 동영상이 모두 그런 식이었다. 채은엽은 여러 차례 최면을 시도했다.
……내 인생은, 내 기억은,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서 파괴된 것이었나.
믿을 수 없었고 또한 허탈하여 머리가, 온몸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이정오가 곁에 없었던 7년 동안 그는 무료한 인생을 살았다. 꿈이 없었고 소중한 것이 없었고 그래서 행복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3년간의 기억을 잃었지만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별다를 게 없는 인생이라서.
지헌은 기억을 떠올려 더듬더듬 함대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함대근이, 그런 말을 했었어. 채은엽은, 의뢰인을 구워삶으려고 최면술까지 공부하는 놈이라고.”
“…….”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머리가 아팠던 건…….”
옆으로 몸을 기울인 정오는 지헌의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고통을 감싸주듯이, 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정오의 품 안에서 감정을 다스린 지헌은 다음 동영상을 클릭했다. 지난 일요일 날짜가 찍힌 동영상이었다.
밤에 촬영한 듯 주변은 어두웠고, 그 안에서 채은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같이 정지헌을 없애는 거야. 어때?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준다면 너한테 10억을 주겠어. 어때. 구미가 당기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어디서 시치미를 떼려고. 내가 다 알고 왔는데.]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가서 쉬셔야 할 것 같네요. 댁으로 돌아가서 쉬시죠.]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어? 네가 못 하면 정지헌 그 자식이 널 먼저 죽일 거라고!]
은엽과 배일의 대화였다. 배일이 제 계획에 협조하지 않으니 은엽은 더욱 도발했다. 대화의 내용이 끔찍해서 정오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배일이는…… 채은엽이 날 죽이러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어. 다 알고 끼어들었던 거야…….”
“……경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다 얘기했어. 7년 전의 뺑소니사고를 낸 사람도, 예나를 유인하려던 사람도 본인이었다고.”
“왜? 왜 그랬는지는 얘기 안 했어?”
“……24년 전에 어머님이 권배일 경사의 어머니한테 압력을 넣었대. 그래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을 갔대. 어머니는 새 일터에서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정오는 배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지헌이 길게 한탄했다.
“본인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 같았어. 오빠를 지켜주려고 했던 건 그때의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래도 그러진 말지.
신고만 하지. 채은엽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 경고만 해주지.
‘그랬다면 오빠는 물론 우리 가족 모두 내내 불안했겠지. 채은엽을 다방면으로 견제하느라 힘들어했겠지.’
권배일은 그것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갈등은, 고름이 터지고 피를 확인해야만 그 실체를 증명할 수 있고 해결이 가능하다.
역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큰 괴로움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동안 말을 잃은 지헌이 힘겹게 마지막 파일을 클릭했다.
마지막 파일은 메모파일이었다. 배일이 지헌에게 남긴 짧은 편지였다.
「지헌아.
그 옛날의 나는 너를 많이 원망했어. 그래서 네 인생을 망가뜨렸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들을 돌려놓을게.
모든 자료는 이미 경찰에 넘겼어. 경찰이 도움을 줄 거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단 몇 줄의 담백한 편지가 가슴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모든 자료를 경찰에 넘겼다는 건, 7년 전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까지 책임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낸 거였어…….”
지헌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배일은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냈다.
유수일이 권배일로 살았던 인생은 얼마나 고달팠던 건지, 배일을 찾아오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양어머니인 권배일의 이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이모는 한숨만 쉴 뿐 언젠가 방문하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은엽은 다른 병원에 있었다. 은엽 역시 배일처럼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깨어나지 못하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세상은 채은엽에게 가혹해졌다.
경찰이 은엽이 인천에 은닉한 50여억 원의 현금을 찾아냈고 은엽의 돈을 받은 국회의원 두 명도 파헤쳐졌다.
또한 기자들한테 어떻게 새어들어갔는지 은엽의 살인미수혐의도 발 빠르게 뉴스화되었다. 누군가를 죽이려 하고 본인은 속 편하게 자고 있다며, 뭇사람들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은엽을 조롱했다.
기자들 때문에 은비와 은비의 엄마는 은엽을 보러 병실을 찾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정오는 은비가 걱정스러웠다.
‘홑몸도 아닌데. 세상이 너무 큰 시련을 주네.’
후우우우…….
“그래서 어디 땅이 꺼지겠어?”
부쩍 무거운 한숨을 자주 풀어놓게 된 정오에게, 국순이 한마디 했다. 정오는 주방 조리대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엄마가 만든 것들을 주워 먹으며 푸념했다.
“엄마, 나는 엄마의 성품을 닮고 싶었지만, 그냥 내가 못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엄마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원망의 감정이 쌓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권배일이 몸을 던져 남편을 살렸는데도 마냥 고마워하기는 어려웠다.
나의 7년, 남편의 7년, 그리고 예나의 7년.
애초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입을 꾹 닫았던 배일이 괘씸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안타까우면서도 마냥 딱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욕먹는 건 쉬운데 맘먹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울까. 공짜인데도 어렵네, 엄마.”
“맘먹는 게 어떻게 공짜야. 그 후폭풍을 다 떠안는 건데.”
정오의 푸념에 국순이 정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있어?”
“…….”
“미워할 수 있겠어?”
그러나 곧 질문이 따라붙었다. 딸이 누군가를 뼛속 깊이 미워할 순 없는 성정을 가졌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엄마였다. 자신의 성품을 닮지 않은 것 같다 말했지만 이보다 더 닮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도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정오는 자신 없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마음을 고백했다.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은 있어. 나도 사람이라.”
“그렇지.”
“……그런데 내 미움의 좋은 점이 하나도 없네.”
“…….”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속이 시원하질 않아. 그냥 계속 아프다, 엄마.”
권배일의 인생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밉고, 권배일이 너무나 밉지만 또 그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까워 자꾸 마음이 아팠다.
“항상 엄마가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했던 내가, 어떻게 엄마를 잃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겠어.”
누군가의 불행을 통해서 내 행복을 깨닫게 된다. 그 마음이 옳지는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인지라, 늘 그렇다.
“엄마, 사랑해.”
불현듯 자신이 너무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국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딸의 뜬금없는 고백에 국순이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돼지의 세레나데라도 들은 듯이.
“왜 얘기가 그쪽으로 가. 네 남편한테나 많이 해줘라.”
“딸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얘기하면 좀 이쁘게 받아주면 안 됩니까? 이 부끄러움을 무릅쓸 만큼 엄마를 사랑한다는데. 어?”
“아 됐어!”
이국순 여사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국순은 쥐고 있던 조리용 주걱을 놓고서 돌아서서 공연히 싱크대 문을 열었다.
정오가 쪼르르 쫓아가 국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 이국순 여사님, 우세요?”
“울긴!”
“우시는 것 같은데?”
정오는 엄마를 놀리며 동시에 꼬옥 끌어안았다. 국순이 귀찮다는 듯 몸을 비틀었다.
“아 저리 좀 가. 징그럽게.”
“엄마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만 좀 해!”
국순이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연락이었다.
*
배일은 닷새 만에 눈을 떴다. 긴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꿈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생각보다 가뿐했다. 약간 힘겨웠지만 대화도 그럭저럭 가능할 정도였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와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의사는 회복이 기적적으로 빠르다고 말했다. 넌지시 보호자가 없냐는 질문을 건넸고, 간호사가 환자의 친구분이 계속 방문했단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옮긴 입원실은 VIP 병실이었다. 병실을 확인한 배일은 지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 즈음 정오가 찾아왔다.
“지헌 씨도 곧 올 거예요.”
정오는 배일이 먼저 물어볼 것을 짐작하듯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웃지 않고 건조하게 말했다. 사실 정오는 작정을 하고 왔다. 그간 쌓인 것들을 털어내야 그를 온전히 염려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맙다는 얘기 못 해요.”
엄한 표정을 연출하고는, 몸은 좀 어떠냐는 질문도 생략했다. 몸은 좀 어떠냐고 묻지 않기 위해 간호사에게 그의 상태를 먼저 물어보긴 했지만.
“경사님은 그 모자를 쓰고 왔잖아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지난 월요일, 배일이 정오의 집을 방문하여 모든 것을 고백한 그날, 배일은 모자를 쓰고 왔다. 예나를 유괴하려던 여자가 쓰고 있던 모자였다.
정오의 지적에 배일의 눈도 커졌다.
“날 겁주려고 했던 거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래서 정오는 배일이 미웠다. 미안하다고 말하러 왔으면서 그런 모자를 쓰고 온 배일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고선 대뜸 미안하다고 하고, 용서하지 말라고 하고선, 목숨을 걸고서 사죄하려고 했잖아요. 치사하게.”
“…….”
“경사님은 너무 독단적인 사람이에요.”
자기 멋대로 그녀의 인생을 판단했던 사람.
이정오에게 정지헌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유괴사건을 꾸며 겁을 주려고 했던 사람.
7년 전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으면서 감추었던 사람.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인생을 짐작해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지 못했으니 홀로 생각하고 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외로웠고, 괴로웠던 사람을 어떻게 마냥 미워할 수 있을까.
눈에 바짝 힘을 주었던 정오는 이내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호통을 치자니 가슴이 너무 울렁거려서 제 속이 더 아픈 것 같았다.
“……보자마자 타박해서 미안해요. 아직 많이 아플 텐데.”
“…….”
“사실 용서하는 것도 미안하다는 말만큼의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나왔다.
“다 용서해요. 그리고 미안하기도 해요…….”
“…….”
“그리고 지헌 씨를 구해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하지만 다시는 남의 일에 몸을 던지지 마세요. 얼른 회복하셔서 건강하게, 열심히 사세요. 아시겠어요?”
“…….”
“예쁜 가정도 이루시고요. 인물도 좋으시니 경사님 닮은 애들은 다 예쁠 거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찔끔 맺혔는데, 배일은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정오는 문득 그의 상태가 걱정스러워졌다.
“아니 왜 말씀은 안 하시고 웃기만 하세요. 목소리가 안 나오나요?”
정오가 의자에서 일어나 배일에게 한 걸음 다가간 사이에 문이 열리고, 지헌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