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변해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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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변해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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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변해가는 시간
2022.10.19.
지헌은 병실 밖에서 영미의 음성을 들었다. 간병인에게는 오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힘겨웠던 상태에서도 목소리를 낸 것을 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절박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헌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 숨소리가 너무나 애처로웠는데도.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으로 살아온 시간이 흘러갔다. 기억을 잃은 3년의 시간을 제외한 그의 33년엔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있었다.
사랑한다 말을 걸며, 자신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며, 그의 앞길을 만들어갔다.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었겠지만 지헌이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집스러웠던 어머니가, 대뜸 지난날을 사과했다.
지헌은 허리 아래로 떨어뜨린 주먹을 꽉 쥐었다.
지헌이 매사에 진심이 없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 역시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변하는 마음을 쉽게 믿지도 않는다.
내가 아프니 용서해다오. 내가 아프니 사랑해다오.
그런 의도라면 응해줄 수 없었다.
그런 의도가 아닐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실 안에 들어선 순간 확인한 정오의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정오 역시 그 상황을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당황스러운 사과에는 굳이 곧장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겨내세요. 건강해지셔서 다시 사과해주세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지헌은 가장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서 정오의 손을 잡았다.
“이만 가볼게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요.”
지헌이 당긴 손에 이끌려 정오도 허둥지둥 고개를 기울여 인사하고는 병실을 나왔다.
병실을 나서는 순간에는 화가 난 듯 빨랐던 지헌의 걸음이 엘리베이터에 이르러 차분해졌다.
하지만 정오의 마음은 이후에 더욱 여울졌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문을 여는 순간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왜, 왜 그래.”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지헌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오는 고개를 내젓고서 조수석에 앉았다.
지헌은 정오를 쫓아 운전석에 올라 뚝뚝 떨어지는 정오의 눈물을 보며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아니. 아니…….”
정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은 닦아도 자꾸만 계속 흘렀다.
“그럼 왜 그래.”
시어머니의 사과를 받아주려고 했다. 마음을 받아주겠다 대답하려던 순간 지헌이 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깊숙이, 꽁하니 앉아 있던 말을 대신 해주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이 스쳐 갔을까.
그 말을 하는 당신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내 마음 편하자고 용서를 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금 역시 얼마나 무서울까.
그 시급한 상황. 상처받은 마음으로도 현명하게 제 어머니께 원하는 바를 말했던 그의 결단력에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잘했어. 고마워.”
잘했다고, 고맙다고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혹여나 그의 어머니께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의 단단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이 기대를 벗어나 흘러가더라도 그가 너무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도록. 그가 오래 아파하지 않도록.
정오는 몸을 기울여 지헌을 안아주었다.
*
영미의 병명은 골수성 백혈병. 50~70대에 발병이 많은 병이라는 것을 정오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2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정정해 보이시던 분이 이토록 빠르게 쇠약해진 건 병명의 앞에 ‘급성’이라는 단어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영미의 상태를 알게 되니 정오는 더욱 지헌이 염려스러웠다.
사실 지헌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국순에게 능청을 떨었고 예나에게 한없이 다정했다.
아이와 함께 바둑을 두는 그의 표정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지헌은 예나가 엉뚱한 데에 수를 둔 것을 보고 짚어 물었다.
“여기엔 왜 둔 거야?”
“앗! 아빠, 실수야. 예나의 실수!”
“실수여도 무를 수는 없어.”
“히잉. 아빠 치사해.”
“그래도 안 돼. 그건 바둑의 규칙이니까.”
한 치의 실수로 패배할 위기에 처한 예나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지헌이 의젓하게 격려했다.
“하지만 이런 건 멋진 실수라고 봐도 돼.”
“멋진 실수?”
“그래. 이게 얼마나 멋진 실수였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돼. 지금은 알지 못할 수도 있어.”
지헌의 의견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예나가 외쳤다.
“아! 알아!”
“우리 예나는 벌써 알겠어?”
“응! 이런 실수를 하게 되어서 이러면 질 수도 있다는 걸 배운 거잖아.”
“그렇지. 맞아.”
아이의 말끔한 대답에 지헌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정오는 멀찍이 서서 부녀의 사이좋은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지헌의 덤덤한 모습이 어쩐지 자꾸 안쓰러웠다. 온 힘을 다해 괴로움을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정오가 지헌을 보듯, 정오를 애틋하게 바라본 국순이 정오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이해가 간다.”
영미의 입장이 이해된다는 이야기였다.
“인생의 끝이 보이면 마지막엔 그 생각밖에 남지 않거든. 내 자식 힘들지 않게 해야겠단 생각.”
자식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 평범한 부모의 평범한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늦게나마 용서를 구하신 거겠지.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응…….”
“하지만 잘했어.”
그러나 짧게나마 의견을 내놓은 국순 역시 지헌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정 서방이 그렇게 말했다면, 어머니는 괜찮아지시겠지. 정 서방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정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재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오가 먼저 재광에게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 통화 연결음이 울리다가 전화가 연결되었다.
[새아가구나.]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그래. 오늘 지헌이랑 병원에 다녀갔었다면서?]
“네. 혹시 무슨 말씀 들으셨어요?”
[지헌이 엄마한테서는 들은 게 없고, 오 실장이 얘기해주었어.]
“아……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아무 얘기 없던데?]
“기분은 어떠셨고요?”
[조금 어두워 보이기는 했는데…… 요즘 들어 늘 그런 편이라.]
“……저, 아버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정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병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미가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면 정오가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재광이 상심한 영미를 챙겨주었으면 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저는 지헌 씨가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머니께서 건강하시길 누구보다 바라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받아들이는 어머님 입장은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아버님께서 곁에서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알았다. 얘기해줘서 고맙구나.]
사연을 모두 들은 재광이 자상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방문해줘서 고맙고, 예나한테도 잘 지내라고 전해주렴.]
재광의 나긋한 목소리에 정오의 시름이 어느 정도는 걷혔다.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시간이 흘러가며, 정오도 차근차근 마음이 정리되어갔다.
그녀 또한 영미에게 벽을 쌓았는데, 그 단단한 벽이 물러지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사과를 받겠다고 말한 대로, 그녀 또한 사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다.
마음이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
며칠이 흘러, 날이 선선한 저녁.
정오는 예나를 데리고 영미가 입원한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지난밤, 예나와 재광이 통화를 하다가 결정한 일이었다.
지헌은 일정이 있어 따로 오겠다고 하였기에 정오는 조금 걱정했지만, 예나가 긴장한 마음을 풀어주었다. 예나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지 않는다면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며 해맑게 정오의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그렇게 다시 방문한 병원.
정오는 예나의 손을 잡고 병실 문을 열었다. 이전에 한번 인사를 나누었던 간병인이 홀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작은 사모님 오셨네요.”
지금 막 잠든 영미를 깨울 수가 없어 간병인이 병실 밖으로 나와 정오와 예나를 맞았다.
“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잠깐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는데 한 시간 후에 오실 거예요. 사모님은 주무시고요.”
간병인은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예나에게 내밀었다.
“회장님께서 갑자기 자리 비워서 미안하다고 손녀따님 오면 선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와아!”
선물을 받은 예나가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었다. 지난번에는 색연필 세트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컬러펜 세트였다. 아무래도 재광은 예나를 화가로 키울 생각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필요하실지 몰라서 아무것도 안 사 왔어요. 가서 뭐 좀 사 올게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니면 드시고 싶은 거라도요.”
인사한 정오가 간병인에게 물었다.
“그냥 주스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예나도 같이 갈래?”
“여기 있을래!”
예나는 할아버지의 선물로 빨리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엄마 빨리 다녀올게. 할머니 깨시지 않게 조용히 놀고 있어.”
“응!”
정오는 어쩔 수 없이 예나를 간병인에게 잠깐 맡기고 아래층으로 혼자 내려갔다.
지하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에 푸드코트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채은엽과 관련된 큼지막한 사건들을 수사하는 용산경찰서의 경찰이었다.
“형사님.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경찰도 정오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채은엽과 관련된 사건에 정오의 가족이 크게 협조했기 때문에 경찰도 정오에게 우호적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채은엽이 이 병원에 있거든요. 여기랑 떨어진 병동이긴 하지만.”
경찰의 대답에 정오는 흠칫 놀랐다.
영미가 이 병원에 입원한 것은 한국에서 이 대학병원의 백혈병 치료 예후가 가장 좋기 때문이었다. 채은엽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채은엽은 깨어났나요?”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는데 의식은 있다고 하네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별 이상 없이 회복될 거라고 하고요. 의지만 있으면 깨어나서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깨어나질 못하는 건지, 자기 운명을 짐작해서 꾀를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경찰의 설명에 정오는 어쩐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정오의 표정이 심각해진 사이에 경찰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경찰이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정도의 답변만 하고서 전화를 끊은 경찰은 곧장 식판을 정리했다.
“채은엽이 깨어났다고 하네요.”
경찰의 말에 정오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