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포기할 수 없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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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포기할 수 없는 마음
2022.10.22.
은엽은 내내 깨어나지 않은 척했다. 제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복되면 바로 감방행.
수감생활이 예약된 몸.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몸.
그렇다면 구치소까지 가기 전에,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의 인생이라도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은엽은 침대 위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거두어진 틈을 타 몸을 단련했다. 깨어나자마자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누운 채로 코어를 단련하고 팔다리의 힘을 키웠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하기에 회복은 더디었지만 독한 의지로는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연극이 길어진 탓에 의사들은 그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걸 점차 눈치채갔다. 어제는 간호사가 은비와 어머니를 병실로 불렀다.
은비와 어머니의 앞에서도 은엽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제대로 연극을 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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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미 여사가 여기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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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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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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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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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네. 엄청 위중한 것 같더라. 그래서 네 아빠 장례식 때도 못 왔다고 하더라고.”
어머니와 은비가 은엽의 병실 문을 나서며 했던 대화를 은엽은 똑똑히 들었다.
장영미가 여기 있다!
솔깃한 정보를 토대로 은엽은 상황을 유추해보았다.
영미와 재광이라면 이곳에 은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피했을 텐데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은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은엽이 입원해 있는 병원은 백혈병과 심장질환에 있어선 독보적인 성과를 낸 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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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아니면 심장질환이겠구나.’
위중하다고 했으니 병세는 깊어졌을 테고, 정재광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할 테고.
장영미는 당연히 VIP 병실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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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병실은 옆 병동의 20층.’
은엽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었기에 병원의 구조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했다.
그리하여 계획에 확신이 선 어느 오후.
은엽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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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엽 씨? 정신이 들어요?”
은엽을 반기는 건 며칠 밤낮을 곁에서 감시한 경찰이었다.
은엽은 경찰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눈을 멍하니 뜨고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물론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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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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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입니다. 사고가 났었던 건 생각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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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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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하나도 안 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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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누구시죠?”
은엽의 힘겨운 목소리에 경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뒤돌아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서 다시 몸을 돌린 경찰은 경찰답게, 냉정한 목소리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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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엽 씨, 김진구 씨 살인교사 혐의와 정지헌 씨 살인미수혐의로 체포영장이 나왔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은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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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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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원에서 회복치료를 받은 후에 채은엽 씨는 구치소로 이송될 겁니다. 이전까지는 경찰과 구치소 교정직원이 상주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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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뭔가 이상한데요…….”
은엽은 약하고도 점잖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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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저는 구금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살인교사라뇨? 살인……미수는 또…… 뭐죠?”
경찰이 이맛살이 찌푸리고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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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엽 씨, 기억하고 있는 가장 최근의 일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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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대법원장 후보가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경찰이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은엽의 아버지 채서복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채서복이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건 더 오래전이었다.
기억을 잃었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알지 못하고 바보가 되었구나…….
채은엽의 야비한 진면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찰은 순간적으로 그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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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엽 씨, 잘 들어요. 오늘은 9월 15일이고, 채은엽 씨 아버지는 8월 20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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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슨, 그게 무슨…….”
은엽이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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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돌아가셨죠?”
경찰은 말을 아끼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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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뇨.”
경찰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뉴스 기사를 검색하여 은엽에게 보여주었다. 채서복이 세상을 떠난 날의 뉴스 기사였다.
휴대폰을 받아든 은엽의 손이 부들거렸다. 은엽은 점점 거칠게 호흡하더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끅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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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요……. 아니야,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아.
급기야 울음이 터졌다.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아비를 잃은 자의 비통한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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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헌의 일정은 재광의 일정과 겹쳤다. 두 사람은 같은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당연히 영미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영미의 1차 항암치료는 골수 내의 백혈병 세포들을 죽이기 위한 관해유도화학요법을 쓴다. 의사들은 1차에서 완전관해가 될 확률을 약 70%로 보고 있는데, 완전관해가 된 후에도 예후를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고 한다.
완치에 가장 좋은 방법은 완전관해 후 조혈모세포 또는 골수이식을 받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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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부터 항암치료를 할 거야. 치료 후에는 골수이식이나 조혈모세포이식을 생각해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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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가 적임자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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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네가 아니면 일반인 중에서 기증자를 찾아야겠지. 아마 기증자를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거다.”
재광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조혈모세포의 유전자형은 형제자매 간에 25%, 부모자식 간에 5%, 타인 간에 0.005%의 확률로 일치한다고 한다. 영미에게는 형제자매가 없으니 지헌이 아마도 유일한 일치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확률마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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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유전자가 맞았으면 좋겠네요.”
사실 지헌은 5%의 확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적을 바라게 되었다. 진심으로 어머니가 회복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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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친자확인검사를 했던 유전자 연구소에 의뢰해 볼게요. 다방면의 혈액 검사를 같이 해주는 연구소라 제 유전자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기록으로 어머니의 조혈모세포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겠네요. 물론 나중에 제가 직접 검사를 받으러 가도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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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맙다.”
아들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인데 아버지에게 인사를 받으니 지헌은 머쓱해졌다. 지헌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자간의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지헌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지헌이 고용한 카운슬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카운슬러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지헌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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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은엽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
예나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할머니의 곁에 앉아 할아버지가 선물한 펜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간병인이 그런 예나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간병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영미가 잠들어 있어 시끄럽게 할 수는 없었다. 간병인은 예나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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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 아줌마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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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간병인은 영미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 자리를 피했지만, 영미는 간병인이 병실을 떠나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영미는 제 가까이의 협탁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예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보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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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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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미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바짝 든 예나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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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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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 10분에요. 바둑학원 갔다가 바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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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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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예나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영미는 오래전 지헌을 떠올렸다. 딱 예나만 했을 때의 지헌도 바둑을 좋아했다. 바둑 영재라고 불릴 만큼 신통했다.
하지만 유수일이라는 친구를 만난 후 지헌은 바둑을 접었다. 영미 때문이었다. 영미가 지헌이 유수일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막기 위해 압력을 넣었고 그 결과 아들과 유수일을 갈라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들은 바둑에 흥미를 잃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이, 원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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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얼마나 아파요?”
영미가 옛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예나가 말을 걸었다. 영미의 대답이 늦어지자 예나는 기다리지 않고 영미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영미가 잠들어 있는 동안 열심히 그린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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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거 선물이에요.”
날개 달린 공룡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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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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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요정이요.”
요정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영미는 미소 지었다.
또 아들 생각이 났다.
미술학원을 보내도, 미술 과외를 시켜도 아들의 그림 실력은 늘지 않았다.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며 재광이 포기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영미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림 실력을 키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열두 살이 된 지헌은 상상그리기대회에서 우수상을 탔다. 그때의 성취감을 영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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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하면 되잖아. 잘했어, 우리 아들 장하다!”
지헌이 상을 탔는데 자신이 수상을 한 것만 같았다. 그것이 행복인 줄만 알았다. 아들과 자신을 분리할 줄 몰랐다. 그런 집착의 세월이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손녀딸에게 선물을 받았으니 마냥 고마워야 할 텐데, 영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겨우겨우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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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요정 덕분에 할머니가 금방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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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로 일어나자마자 오열한 덕분에 경찰은 은엽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주며 의사에게 호출했다. 의사는 은엽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지만 곧 몸이 더 회복되면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쨌든 잠깐의 연극 덕분에 감시가 느슨해졌다. 그래도 오래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의심이 커져갈 터였다.
은엽은 경찰이 딴 곳을 보는 틈을 타 다리를 휘적거려 보았다. 다리가 의지대로 잘 움직여주었다.
침대에서 지독하게 단련을 한 덕에 몸이 크게 무겁지는 않았다. 상태를 확인했으니 바로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은엽은 경찰이 자리를 비울 틈을 엿보았다.
기회는 한 번. 어쩌면 앞으로 한 시간 정도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곧 감시자가 한 명 이상 더 투입될 것이다. 또한 수갑이 채워질 수도 있다.
잠시 기다린 끝에 은엽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경찰이 전화를 받으러 간 틈에 은엽은 병실을 탈출했다.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은엽은 무작정 뛰었다.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은엽은 5층으로 내려가 옆 병동과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이동하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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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층.’
은엽은 20층에서 내렸다. VIP 병실은 입구가 막혀 있었지만 곧 간호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오며 출입문이 열렸다. 은엽은 문이 닫히기 전에 재빨리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모든 것은 모험이고 도박이었다.
VIP 병실에 장영미가 없다면, 병실에 장영미 말도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생각지도 않게 경찰이 그 앞을 지키고 있다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자신은 더한 중범죄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은엽은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VIP 병실은 40실. 그중 맨 끄트머리 병실이 가장 최상급일 터였다. 은엽은 맨 끝 병실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병실 끝에 이르러 문이 슬쩍 열린 틈으로, 은엽은 잘 아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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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요정 덕분에 할머니가 금방 낫겠어.”
장영미 여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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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치료의 요정이 할머니를 빨리 낫게 해줄 거예요!”
저 꼬맹이.
내 인생을, 우리 가족의 인생을 다 망쳐놓은 저 꼬맹이!
정예나를 알아본 은엽의 눈이 번뜩였다.
정지헌의 아이가 제 할머니와 단둘이 병실에 있었던 것이다.
은엽은 곧장 목표를 바꾸었다.
저 꼬맹이. 저걸 없애야겠다.
은엽은 성큼성큼 병실에 진입했다.
예나의 깜찍한 목소리에 영미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는 이내 끔찍하게 바스라졌다.
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채은엽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서 가느다란 링거 호스를 쥐고는 예나의 뒤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호스로 예나의 목을 졸라버리겠다는 듯이.
달리 생각할 틈도 없이 재빨리 몸을 일으킨 영미는 채은엽이 예나에게 닿기 직전에 제 옆에 놓인 폴대를 들어 올려 있는 힘껏 던졌다.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다.
와장창!
둔탁한 소리를 내며 폴대가 채은엽의 머리를 때렸다.
예나는 얼굴이 창백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쓰러진 채은엽은 더욱 괴물 같은 표정으로 일어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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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그사이에 영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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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얼른 나가!”
예나는 할머니가 은엽을 막아낸 틈을 타 잽싸게 병실 밖으로 도망쳤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겁을 잔뜩 먹은 예나는 갈피를 잃고서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때 불현듯 오래전 바둑대회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가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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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
예나는 복도가 쩌렁쩌렁하도록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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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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