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엄마를 믿어
(156/183)
156. 엄마를 믿어
(156/183)
156. 엄마를 믿어
2022.10.26.
채은엽이 깨어났다…….
경찰과 헤어져 편의점으로 향하는 정오의 걸음이 무거워졌다. 정오는 얼른 주스를 사가지고 병실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스를 구입하고 계산을 하는 사이에 좀 전에 만났던 경찰이 후다닥 달려와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네. 형사님.”
“어머님께서 입원했다고 하셨죠? 병실이 몇 호죠?”
“2040호예요. 무슨 일이세요?”
“채은엽이 사라졌다고 해서요. 혹시 그쪽으로 가지 않았나 해서.”
경찰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머니, 그리고…….
‘예나!’
정오는 값을 치른 주스도 내팽개치고 경찰과 함께 달렸다.
*
은엽은 예나가 병실 밖으로 도망가자마자 돌아섰다. 장영미보다는 정예나가 중요했다. 정예나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제대로 된 복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꼬맹이를 없애버렸어야 했다.
그게 훨씬 쉬웠을 터인데. 그게 정 씨 일가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방법이었을 텐데.
하지만 예나를 뒤따라가려던 은엽은 곧바로 영미에 의해 저지당했다.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영미가 제 발목을 꽉 부여잡고 버티고 있었다.
“놔! 이 양반이 미쳤나!”
은엽이 영미를 힘껏 걷어찼지만 소용없었다. 영미는 그대로 돌이라도 된 듯이 은엽을 꽉 붙들었다. 병에 걸려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이 앙상해진 여자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엄마아!”
영미가 버티는 동안 병실 밖에서 아이의 구슬픈 음성이 들려왔다. 은엽은 다급해졌다.
이제 얼마 안 가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손 쓸 틈이 없어지기 전에 무언가 하나라도 해내야 했다.
은엽은 다시 목표를 바꿔 몸을 내렸다. 영미를 먼저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려움과 맞서면서도 공포에 서린 영미의 두 눈이 그를 짜릿하게 했다. 은엽은 영미의 앙상한 목을 틀어쥐었다.
영미는 다급하게 벗어나려 했으나 은엽의 손아귀를 피할 수 없었다. 숨통이 꽉 조여들었다.
“그거 알아? 지금 당신을 없앤다고 해서 내가 죽지는 않아. 기껏해야 무기징역이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은엽이 말했다. 이제 인생의 바닥,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
간병인은 병실 밖으로 나온 김에 베갯잇을 갈아야겠단 생각에 관리직원을 찾아갔다. 관리직원은 창고에서 새 베갯잇을 꺼내주었다.
“엄마아!”
그때 복도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간병인은 헐레벌떡 달려갔다.
영미의 입원실 옆옆 방.
“엄마아아!”
젊은 부부가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누가 저렇게 엄마를 찾지?”
“엄마를 잃어버렸나?”
“자기가 좀 나가 봐. 그럴 리가 없는데 꼭 우리 애 같네.”
병실에서 남자가 나왔다. 다른 병실에서도 예나의 목소리를 듣고서 밖으로 나왔다.
“애기야, 왜 울어. 엄마 잃어버렸어?”
“우리 할머니 방에 나쁜 사람 들어왔어요.”
예나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예나가 가리킨 방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갔다. 상주하고 있던 간호사도 뒤따라갔다.
“엄마아아…….”
예나는 그 후에도 엉엉 울며 엄마를 찾았다. 마법의 주문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오가 나타나자마자 예나의 울음소리는 더욱 격해졌다.
“엄마아아아아!”
“예나야!”
정오가 예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그래. 괜찮아?”
“할머니 방에 나쁜 사람 들어왔어어어.”
예나가 울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영미의 병실로 달려가고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기에,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경찰은 곧장 영미의 병실로 뛰어갔다. 정오도 예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병실로 향했다.
몸을 비틀던 영미의 저항이 사라졌다. 팔다리가 늘어진 영미의 모습을 확인한 은엽은 길게 심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꼬맹이를 찾으러 가야 했다.
그 순간 병실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환자분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간호사가 외쳤다. 다급한 순간에도 은엽은 꾀가 생겼다.
“아니…… 이분이 의식이 없으셔서요…….”
하지만 함께 온 옆옆 방의 남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야. 아까 애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은엽의 눈빛이 변했다. 은엽은 영미가 던져버린 폴대를 들고서 사람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휘적거렸다.
“저리 가!”
“환자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정신 차리세요!”
“채은엽!”
간호사가 외치는 사이에 경찰이 들어왔다.
은엽은 있는 힘을 다해 폴대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폴대가 경찰의 머리를 쳤다. 경찰은 얻어맞은 와중에도 손을 뻗어 폴대를 잡았다. 그 틈에 사람들이 은엽을 에워쌌다.
“비켜! 놔!”
은엽의 몸부림이 과격해서 사람들 모두가 힘을 합쳐 붙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은엽을 바닥에 눕힌 경찰이 은엽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이 자식 왜 이렇게 멀쩡해.”
경찰이 쓰게 한탄하며 말했다. 거기에 힌트를 얻은 듯 완전히 포박된 은엽이 돌연 선해진 얼굴로 경찰에게 물었다.
“형사님. 여기가 어디죠? 제가 왜 여기에…….”
심신미약. 법원에서 선처를 호소할 구실을 만들려는 거였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경찰은 별 정신 나간 놈을 다 보겠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경찰이 은엽을 끌고 나오는 사이에 정오도 예나를 안고서 병실에 들어섰다. 은엽에게 욕을 퍼부어줄 새는 없었다.
“사모님! 사모님!”
간병인이 소리쳤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병실에 영미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어머니…….”
정오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간호사가 재빨리 호흡을 살폈다. 영미는 호흡이 없었다. 심장도 멈춘 상태였다.
“빨리 의사 선생님 불러주세요!”
사람들에게 외친 간호사는 직접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어머니, 어머니.”
정오도 가까이 다가가 영미를 불렀다.
모두에게 간절한 순간.
간호사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슴 압박과 인공호흡 한 사이클이 돌아가고 희미하게 영미의 입술이 움직였다. 정오가 영미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들려요. 심장 소리.”
심폐소생술이 한 사이클 더 이루어졌다. 정오는 옆에서 영미의 손을 꼭 잡고서 영미의 상태를 살폈다. 다시 인공호흡이 이루어지고, 이윽고 가늘게 이어졌던 숨이 밖으로 터졌다.
하아아,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정오가 영미의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호흡이 안정된 영미가 정오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하아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간호사에게 인사한 정오는 온몸에 힘이 풀려버려 그 앞으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예나도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영미는 어쩐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영미의 눈앞엔 앞머리가 땀과 눈물에 흠뻑 젖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마 가운데가 불이 난 것처럼 새빨갰다. 제 아들과 꼭 닮은 불꽃 모양의 연어반이었다.
이제 놓아도 되려나, 그럼 좀 편해지려나, 생각한 순간 아들의 목소리가 반짝 떠올랐었다.
“이겨내세요. 건강해지셔서 다시 사과해주세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아들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생을 붙들어주었을까.
영미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듣기 좋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영미는 또다시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
은엽은 곧장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신체가 멀쩡한 것을 확인했으니 더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소식을 들은 지헌과 재광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빠아!”
복도 저편에서 지헌을 발견한 예나가 달려와 안겼다.
“예나야,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응! 근데 할머니가 죽을 뻔했어.”
예나가 대답했다.
깊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영미는 검사를 받게 되었다. 제 때에 심폐소생술을 하여 다행이었으나 영미의 곳곳에는 또다시 멍이 들었다. 영미의 항암치료는 하루 미뤄졌다.
의사는 항암치료 후에 바로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수 있게 준비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리고 유전자 연구소에서 병원으로 전달한 유전자 정밀검사 기록을 토대로 지헌을 불렀다.
지헌은 아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예나와 함께 의사의 진료실을 찾았다.
“정지헌 씨의 유전자 검사를 다시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의사의 의견에 지헌이 물었다.
“네. 검사야 얼마든지 받겠지만,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환자분이랑 손녀 따님의 유전자형이 일치합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아드님도 검사를 다시 해보셨으면 해서요.”
“저는 일치하지 않는데, 제 딸은 일치한다고요?”
“네.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연과 혈연이 맞아떨어진 결과겠죠.”
지헌과 의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나가 물었다.
“아빠, 유전자는 그거지? 피에 있는 지도.”
“그 손녀 따님이 너구나?”
고개를 돌린 의사가 밝아진 표정으로 예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 피에 있는 지도에 닮은 부분이 있어서 할머니를 살릴 수가 있게 되는 거야.”
예나의 질문에는 의사가 추가 설명을 덧붙여 대답했다.
“예나의 피에 있는 지도로 할머니를 살려요?”
예나 역시 추가 질문을 했다. 이번엔 지헌이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나는 할 수 없어.”
“왜?”
“예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돼.”
조혈모세포 이식이 공여자에게는 골수 이식에 비해서 가벼운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에게 편히 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식 며칠 전부터 주사를 맞아야 하고 기증일에는 상당량의 혈액을 채취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견디기는 힘든 과정이었다. 모든 절차가 장기적으로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아빠의 입장에서는 공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나이팅게일은 아픈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는데?”
하지만 예나는 집요하게 따졌다.
의사는 아이가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타인 간의 기증은 만 18세 이상부터 가능하지만, 가족 간의 공여는 어린이도 가능하긴 합니다. 우리 병원에서 여덟 살 동생이 조혈모세포 공여를 해서 열두 살 형을 살리기도 했고요.”
“아빠, 예나도 할 수 있대!”
“아니, 그래도 안 돼. 예나야.”
“왜 안 돼?”
예나는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지헌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너무 똑똑한 아이를 둔 탓이었다.
*
자신의 피가 할머니를 살릴 수 있단 사실에 매료된 예나는 아빠의 반대에 결국 토라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예나는 아빠와 다시는 얘기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래도 지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오의 입장에서는 지헌의 결단이 조금 아쉬웠다.
아이가 원한다면, 자신이 할머니를 살릴 수도 있단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면.
조혈모세포 공여는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일은 아니다. 주사를 맞고 며칠 입원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다른 이식에 비해서는 작은 희생이다.
“하지만…… 어머님을 살릴 수가 있는 건데…….”
“그래도 예나는 건드리면 안 되지.”
정오가 설득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정지헌과 정예나. 부녀가 모두 꺾을 수 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정오가 시무룩해하니 지헌이 돌아서려다가 다시 다가와 정오를 다독였다.
“내 검사 결과 나온 후에 다시 얘기하자. 내가 할 수 없다면 기증인을 찾아보면 돼. 타인 중에서도 2만분의 1의 확률로 유전자형이 일치한대. 어머니는 기증받으실 수 있을 거야.”
2만분의 1. 그 숫자가 정오는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정오에게 국순이 다가갔다.
“왜들 그래. 병원에서 큰일이 있었다며. 그래서 그러는 거야?”
“아니, 그건 해결됐는데…….”
정오는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국순에게 털어놓았다. 은엽이 병실을 덮친 사건과 이로 인해 영미가 겪었던 큰일, 예나와 영미의 조직적합성항원형이 일치한다는 사실, 그리고 예나가 조혈모세포 공여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까지.
정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국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러니까, 예나의 그게 필요하다는 거지?”
“조혈모세포.”
“그래. 조혈모세포.”
한 번 더 끄덕인 국순은 자리를 떠나 휴대폰을 집어 들고 돋보기를 썼다. 정오는 맹하니 국순을 지켜보았다. 국순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돋보기안경을 벗은 국순이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방법이 있어. 정오야.”
“……응?”
“있어. 방법이 있어. 다 괜찮을 거야. 우리 예나가 고생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말씀하셨다. 방법이 있다고.
엄마 말씀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오는 그 방법이라는 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 괜찮을 거야. 사부인도 이제 괜찮아지실 거야.”
엄마를 믿어.
국순의 미소가 설레는 확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