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 덕분에 (158/183)


158. 덕분에
2022.11.02.


영미는 일정대로 항암치료를 진행했다. 혈관에 직접 관을 삽입하여 독한 약물을 투여하는 고된 과정에도 불구하고 영미는 잘 이겨냈다.

골수 내 백혈병 세포를 5% 이내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치료 후 검사 결과 완전 관해 진단을 받았다. 예후가 좋아 다른 걱정 없이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나의 제대혈을 이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가족 모두가 비밀에 부쳤다. 솔직하고 순수한 예나가 영미에게 진실을 얘기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예나를 포함한 정오의 가족들은 병문안을 삼갔다.

또한 영미의 병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라 다들 조심스러웠다.

영미를 생각하면 시간은 초조하고도 느리게 흘러갔지만 창문 밖의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가을의 정점에 닿았다. 도심에서도 제 계절을 잊지 않은 나무들이 노랗게 붉게 옷 자랑을 했다.

정오의 배 속에서도 시간은 차근차근 탄탄하게 흘러갔다. 엄마 배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서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확인한 지헌은 조금 더 정오를 과보호하게 되었다.

맥스기획 제작 2팀의 팀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광고 대행사의 숙명이 그러하듯 또다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게 된 제작 2팀은 혹여나 정오가 무리할까 싶어 늘 신경 쓰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먼저 일어난 정오가 정리를 하려 하니 자리에서 작업 중이던 고은주 대리가 힐끔 보고서 여상하게 말했다.


“그냥 두세요. 지금 작업하는 것만 끝내고 제가 할 테니까.”

“아뇨. 제가 할게요.”

“그냥 가세요. 그게 제 마음을 덜 괴롭히는 거예요.”

뚱한 표정에 건조한 어투였지만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말이었다. 정오가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입술을 길게 늘이며 능청을 떨었다.


“고 대리님? 절 사랑하시는군요?”

은주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흥, 코웃음을 치고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런 은주의 반응에 정오는 좀 더 즐거워졌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죠?”

“아, 잔망스러우셔라. 그런 건 남편분한테나 하시죠.”

“고 대리님, 저 남편한테는 이런 거 안 해요. 고 대리님한테만 보여주는 거예요.”

정오가 찡긋 윙크하며 손가락 하트를 보여주자 은주는 더욱 치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정오의 비글미에 정신이 혼미할 때가 있었다.

이정오 대리 때문에, 내진설계 잘되어 있는 내 마음이 마구 흔들려.

그런 자신의 변화가 쑥스러운 은주였다.

정오의 짓궂은 장난에 한술 더 떠서 때마침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기훈까지 은주를 놀렸다.


“에이, 고 대리님, 이 대리님의 사랑을 좀 받아주세요.”

“송기훈 씨도 그만하지?”

은주가 기훈을 향해 눈을 흘겨 보였지만 기훈은 킥킥 웃었다.

정오가 오기 전, 기훈은 팀에서 은주를 가장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 한마디 없이 얼음장 같은 차가운 태도로 제 소임만 열심히 해내는 고은주 대리가 편할 리 없었다. 사수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무서워했다.

그랬었는데, 어느새 고은주 대리와도 두터운 동료애를 쌓게 되었다. 정오 덕분에.


“제가 정리할게요. 고 대리님은 천천히 하세요.”

기훈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오도 일어나 기훈을 도왔다. 두 사람은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고은주 대리만 남겨두고서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 문을 닫으며 기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대리님이 오시기 전에는 은주 대리님이 마냥 어렵고 무서웠는데, 어느새 정말 편해졌어요.”

은주가 달라졌다. 정오도 동의하며 끄덕였다.

몇 걸음 발을 옮겼을 때 어디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 집무실이 잘 보이는 복도였다.

기훈은 잽싸게 정오에게서 반 발짝 떨어져 일정 거리를 만들었다. 정오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홍길동처럼 홀연히 나타나 기훈을 한껏 째려보는 정지헌 이사 덕에 단련된 눈치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헌이 나타났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이미 정오와 반걸음 떨어져 있던 기훈이 긴장한 채로 뻣뻣하게 인사했다.


“대리님, 저는 얼른 가서 기자재 반납할게요.”

마치 지헌에게 다른 쓴소리를 들을까 예상된다는 듯이, 기훈은 곧장 자리를 피했다. 정오가 붙잡을 새도 없이 줄행랑을 쳐버렸다.

지헌은 당연하다는 듯이 정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서 나란히 걸었다. 정오는 눈꺼풀을 내리고서 시큰둥하니 지헌을 바라보다가 질문을 건넸다.


“오빠는 정말로 일 안 할 거야?”

“일은 지금도 하고 있잖아.”

“여기보다는 본사나 세련 식품 쪽이 훨씬 일이 많잖아. 아버님이 몇 번이나 오라고 하셨는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몇 주 전에 재광이 정오에게 근심을 토로했다. 지헌이 제 아빠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그룹 본사에서, 아니면 세련 식품에서라도 좀 더 제대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데, 제대로 일을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하였다.

정오는 일과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려 하는 지헌을 존중했다. 다만 지헌이 본인의 재력만 믿고서 노력하지 않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관리자가 되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오의 따끔한 질문에 지헌이 느른하게 대답했다.


“난 맥스기획이 좋은데?”

“정말로 맥스기획이 좋은 거야?”

“정말이지 그럼.”

“그럼 내가 이직하면?”

“네가 왜 이직을 해. 내 부인인데 세련 그룹에 있어야지, 어딜 가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내 능력 키울 수 있는 데로 가야지.”

정오의 매정한 선언에 지헌의 눈썹이 휘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어쩔 건데. 응? 정지헌 씨.”

“……나도 가야지.”

“뭐?”

“나도 따라가야지.”

“맥스기획이 좋다며.”

“광고회사가 좋다는 얘기였어.”

“그럼 내가 세련 식품으로 이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럼 나도 세련 식품을 좋아하게 되겠지.”

영원히 너만 따라다닐 거야.

그의 속내가 투명하게 읽혔다.

뭐 이런 찰거머리가.

지헌의 대답이 기가 막혀 걸음을 멈춘 정오는 지헌을 향해 검지를 휘둘렀다.


“나 따라다닐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 오빠 성과를 만들어. 알았어?”

마구 삿대질을 하고서 돌아선 정오는 어깨에 힘을 빡 주고 지헌에게서 떠났다. 남겨진 지헌은 지헌대로 서운해졌다.

사람이 일을 하는 동기가 꼭 일 자체일 필요는 없지 않나. 입신양명일 필요도 없지 않나. 꼭 너 없이 나의 성과를 만들어야 하나. 네가 없으면 온전한 나일 수도 없을 텐데.

정오에게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그날 내내 지헌의 입안에서 웅얼대며 굴러다녔다.


“아빠!”

집에서도 서러워 꽁해 있는 지헌에게 아이가 다가왔다. 밝은 얼굴로 다가오는 아이를 보니 잠시나마 표정이 풀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빠의 무릎에 털썩 앉은 예나가 물었다.


“아빠, 일요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이지?”

“아빠 생일이잖아.”

아아아.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린 지헌의 입이 벌어졌다. 이정오의 온갖 스케줄, 회사의 온갖 일정을 머리에 넣고 있으면서 제 생일은 그냥 지나칠 뻔했다.

몇 년간 생일을 챙긴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께 축하 전화를 받고 승규에게 작은 선물을 받는 것으로 지나갔던 날이었다.


“아빠, 예나한테 받고 싶은 선물 있어?”

“글쎄. 예나의 뽀뽀?”

“그런 거 말고오!”

예나가 고개를 저었다. 왠지 예나는 이미 준비한 선물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야무진 표정에 숨겨놓은 선물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아빠는 예나를 제일 사랑하지?”

“그럼. 당연하지.”

“그럼 아빠 생일에는 내가 아빠랑 놀아줄게.”

“아빠랑 어떻게 놀아줄 건데?”

“같이 캠핑 가줄게. 그럼 되겠지?”

 

 
흡.

역시 아이는 바라는 것이 있었다. 지헌은 입술 밖으로 뛰쳐나오려 하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빠, 좋아 죽겠지?”

“그래. 좋아 죽겠다.”

“그럴 줄 알았어.”

기가 막힌 선물을 생각해낸 자신이 대견한 듯 예나가 한껏 으스대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우리 딸.”

“뭘. 근데 아빠, 빨리 캠핑 준비해야지.”

“캠핑 준비는 뭘 해야 하지?”

“몰라. 도빈이네 아저씨한테 물어봐.”

할 말을 마친 예나는 지헌의 무릎 위에서 내려와 제 방으로 건너갔다.

지헌은 다시 한번 웃음을 머금었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캠핑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준비가 막막했을 텐데 딸이 현명하게도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어 든든했다.


[어, 왜.]

승규에게 전화를 거니 친구의 지친 목소리와 함께 가까이에서 도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하 육아 중인 모양이었다.

지헌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나 이번 토요일에 캠핑 가려고.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해?”

[캠핑장 예약은 했고?]

“아니.”

[그럼 못 가는 거지. 이번 주 토요일이면 당연히 캠핑장도 다 찼지.]

“벌써?”

[벌써라니.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고. 지금이 제일 날 좋을 때인데 어디가 남아있겠어.]

승규의 대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캠핑장에서 궁궐 같은 텐트를 쳐놓고 예나와 고기를 구워 먹는 상상을 하고 있던 지헌은 절망스러웠다.

그런 지헌에게 승규가 묘안을 제시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진서 씨네 친정에 같이 갈래? 거기 공기도 좋고, 마당이 엄청 넓어서 텐트 치고 놀기도 좋아. 우리는 자주 그렇게 해.]

“아니, 그래도 예나가 기대하고 있을 텐데.”

[산도 있고 논도 있고 바다도 있어. 웬만한 캠핑장보다는 거기가 나아. 거기서 연습하고 다음에 제대로 준비해서 가면 되지.]

“…….”

[아우야. 캠핑은 예습이 필요하다. 쉽게 보지 마. 준비할 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다고. 특히 애들 데리고 가는 아빠라면 더욱! 캠핑장에서 아빠는 어리바리하면 안 돼. 아이들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고.]

캠핑 경력 3년 차 승규가 지헌에게 진서의 친정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정성스럽게 설명했다.


“……하아, 그래. 그럼 신세 좀 져도 될까?”

[신세랄 게 뭐 있어. 다들 좋아하겠지.]

“그래. 그럼 같이 가자. 고마워.”

[뭘 친구끼리.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승규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곁에 있는 도빈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우와아아!’ 하며 휴대폰이 쩌렁쩌렁하도록 환호하는 도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헌은 왠지 승규의 계략 아닌 계약에 넘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시간이 흘러 토요일 아침, 병원 입원실.

조혈모세포를 이식받고, 이후 처치를 시작한 영미는 내내 주사를 주렁주렁 달고 지냈다. 공여자의 조혈모세포가 환자에게 잘 맞아 생착이 잘되어가고 있다며 의사가 격려해주었다.


“이제 며칠 안에 퇴원할 수 있겠다고 하시네.”

재광이 병실의 커튼을 열며 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햇빛을 보면 멀미를 했는데, 어느새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이제 햇빛을 보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된 아내에게 재광이 물었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나쁘지 않네.”

“아이들은 만날 수 있겠어?”

“만나야지. 내일이 지헌이 생일인데.”

영미는 누워 있는 와중에도 날짜를 정확히 세어가고 있었다. 내일이 아들의 생일. 그녀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기증자가 우리 아들 생일도 챙길 수 있게 금방 나타나줘서 고생을 덜 했네.”

“기증자 얼굴은 볼 수 있나? 선물이라도 드리면 좋을 텐데 말이야.”

“할 수 있어. 아는 사람이거든.”

영미가 관심을 보이자 재광이 냉큼 대답했다. 이제 진실을 얘기할 때가 된 것이었다.


“……누군데?”

물어오는 영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사실 기증자가 금방 나타났다는 말에 설마 싶었던 때가 있었다. 기증자는 역시 아들이었던 걸까. 다시는 엄마를 보지 않겠다며 매정하게 돌아섰던 때도 있었지만, 역시 그랬던 건가. 재광의 대답을 기다리며 영미의 목 안에 울음이 그렁거렸다.


“예나야. 당신 손녀딸 예나.”

그런데, 재광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지헌이 아니었다.

영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깜빡거리는 두 눈이 급하게 젖어갔다.


“당신은 당신 손녀 덕분에 살아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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