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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아직 늦지 않았어 (160/183)


160. 아직 늦지 않았어
2022.11.09.



“아빠 생일 축하해! 빨리 일어나!”

이따금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깨우는 참새 같은 아이.

그 아이가 버릇처럼 찾는 ‘아빠’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아침이 있다.

아이의 아빠로 살았던 시간보다 혼자였던 시간이 훨씬 길어서 꿈속에서는 제멋대로의 모습이었다가 아침이 오면 허둥지둥 본모습을 찾아간다. ‘아빠’라는 말은 여전히 참 낯설지만 참 신기하다.

사랑하는 이들로 인하여 아빠가 되었다.

아빠로서 맞이하는 첫 생일.

지헌에게도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지헌은 팔을 들어 올려 예나를 끌어안으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아빠를 침대 삼아 그 위에 엎어져 있던 예나는 지헌의 팔에 이끌려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예나는 놀이공원의 비행기라도 탄 듯이 와아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웃었다. 지헌은 그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끌어안아 품에 넣었다.

정신이 맑아지며 불현듯 아이의 생일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예나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였다. 정오에게 마냥 이끌리는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질투 때문에 심술을 부렸었다. 정오를 늦게까지 옆에 두려고 모질게 굴었다. 그녀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도 모르고서 제 욕심만 채운 날이었다.

한참 뒤에, 그날이 예나 생일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후회, 얼마나 많은 반성을 하게 될까.


“아빠 생일 하지 말고, 우리 예나 생일 하자.”

지헌이 예나를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싫어어. 아빠 생일이지이. 아빠 숨 막혀!”

지헌의 완력에 못 이겨 몸을 비튼 예나가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침의 유쾌한 씨름 덕에 지헌도 정신이 맑아졌다. 바닷가 마을에서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가만히 귀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정오와 국순은 진서의 집에서 따로 자게 되어 텐트 안에는 지헌과 예나뿐. 아직 새벽녘이라 마당에서 시끄럽게 뛰어놀 수는 없었다.


“아빠랑 바다 보러 갈까?”

“응!”

지헌은 옷을 두둑이 챙겨 입힌 예나와 함께 텐트 밖으로 나왔다.


“예나야아!”

예나가 나오자마자 도빈도 텐트에서 나오며 예나를 반겼다. 도빈 역시 일찍 일어난 것이다. 승규 또한 퀭한 눈에 까치집을 지은 머리로 쫓아 나왔다.


“도빈아! 우리 바다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자!”

“그래!”

지헌과 예나의 산책에 도빈과 승규도 합류했다.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는 동안 푸르스름한 새벽의 기운이 옅어졌다. 한참을 걸어가니 아침 바람과 함께 밀려온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예나가 바다를 보고서 소리쳤다.


“어? 아빠! 갯벌이 없어졌어!”

아침 만조 때라 어제 갯벌이었던 자리엔 모두 바닷물이 차올라 있었다. 물이 높아진 바다는 어제의 모습과 퍽 달라 보였다. 도빈은 더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조개를 다 잡아가서 갯벌이 없어졌어?”

“그런가 보다.”

“그럼 어떡해?”

“바다한테 부탁해야지. 갯벌을 돌려달라고.”

장난스런 승규의 대답에 도빈이 두 손을 합장했다.


“이제 조개 안 잡을게요! 갯벌을 돌려주세요!”

“도빈이가 기도했으니까 곧 갯벌이 돌아오겠다.”

승규가 아들을 놀려먹고 있을 때 지헌은 예나에게 진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갯벌이 없어진 게 아니고 바닷물이 차오른 거야. 또 시간이 지나면 물이 빠지고 예나가 어제 봤던 갯벌도 보일 거야.”

“시간이 지나면?”

“응.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지나면?”

“점심 때쯤이면 될 거야.”

“그럼 점심때 또 오자!”

“그래. 그러자.”

육아에 정답은 없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르기에.

예나는 또 오자고 하고서도 떠나지 않고 오래 놀았다.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서 바다로 한 걸음 디뎠다가 큰 파도에는 물러났다가를 반복했다. 예나는 파도가 발을 씻어주는 느낌이 간지럽다며 깔깔 웃었다.


 

*

같은 시각.

진서네 본가 주방에서는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임신부인 정오와 진서가 세상 귀한 딸들이라, 어쩌다 보니 최고 어른들이 제일 열심히 지헌의 생일상 준비를 하게 되었다.

미역국을 끓이는 국순에게 진서 모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진서한테 들었어요. 요즘 공부하신다면서요. 필기도 단번에 합격하셨다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 실기도 배울 게 많더라고요. 평생 음식만 하고 살았는데도 다 처음 듣는 소리 같고 그래요.”

국순이 수줍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만학을 하려니 생각만큼 재빠르지가 못해서 마음만 급해지네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자꾸 들고.”

국순의 고민에 잠시 끄덕거리던 진서 모가 입을 열었다.


“여기선 나를 새댁이라고 불러요. 놀리는 게 아니고 이 동네 사람들은 나를 정말 어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적어가지고.”

“…….”

“새댁이라고 들으면 마음이 어떻게요? 이 나이에도 어리광부리고 싶고 예쁨받고 싶고 그래요.”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개구쟁이 도빈이 칭찬받은 만큼 의젓해지는 것처럼, 곱게 자란 숙맥 같던 지헌이 어느새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믿음직한 사위가 된 것처럼.


“아직 아무것도 안 늦었어요. 이렇게 꽃처럼 고운 분이 뭐가 걱정이에요. 차근차근 천천히 가도 아무것도 늦을 게 없어요.”

“…….”

“음식 솜씨나 경력이나, 여사님이 제자를 키워야 할 것 같은데 계속 뭔가를 배우고 도전하려고 하시니 얼마나 멋져요. 제 눈에는 멋지게만 보이네요.”

진서 모의 격려에 국순도 기운을 얻었다. 좋은 인연에게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런 복을 타고났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었다.

이윽고 지헌과 예나가 바닷가에서 돌아와 거실에는 거한 생일상이 차려졌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식사를 한 지헌이 국순에게 다가왔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제가 먹었던 미역국 중에 제일 맛있는 미역국이었어요.”

“…….”

“그런데 언제나 그래요, 어머님 음식은.”

사위의 인사에 뿌듯해졌다.

국순은 생각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거라고.

*

평범한 날들 사이에서 흘러가는 하루였던 생일이, 올해는 시끌벅적한 잔칫날 같았다. 그저 가족에게 마음껏 사랑을 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지헌은 사랑을 받는 마음도 이에 못지않게 기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일잔치를 하고, 승규네 가족에게 선물을 받고, 아이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간 정들었던 이들과 인사를 하고, 차가 출발했다. 예나와 도빈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또 오자’를 열창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 조금은 정신이 없었던 시간이 지나, 차는 서울에 이르렀다. 도빈네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어느덧 어두워졌다. 예나는 저녁을 먹고 바로 잠들었고 국순도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지헌은 잠잠히 정오의 뒤를 쫓아다니며 기회를 엿보았다. 바라는 바가 있어서.

정오에게 아직 선물을 받지 못했다. 정오는 요즘 꽤 바빴으니 아마 선물을 준비할 새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도 지헌에게는 유용했다.


‘내 선물은? 선물 어디 있어?’

‘아…… 이런. 어쩌지?’

‘선물도 준비 못 했어? 흥.’

‘오빠 미안해. 대신 나를 선물할게.’

‘흥. 그럼 각오해.’

 
머릿속으로 원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본 지헌은 정오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 선물은? 선물 어디 있어?”

“잠깐 기다려봐.”

“선물도 준비 못 했어?”

“짠!”

그러나 지헌의 예상과는 달랐다. 지헌이 선물에 대해 묻자마자 정오는 침대 아래에서 주섬주섬 상자를 꺼냈다. 다른 기대를 하며 실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지헌의 얼굴이 맹해졌다.


“얼른 열어봐.”

지헌은 정오의 들뜬 목소리에 이끌려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맹했던 얼굴은 조금 더 뚱해졌다.

정오가 준비한 선물은 다름 아닌 마음의 양식, 책이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사장님이 알아야 할 110가지 리더십」, 「똘똘한 리더십이 회사를 구한다」……. 제목 또한 무척이나 의도가 엿보이는 것들…….

네가 보기에 부족했구나. 내 리더십이.

아주 확 휘어잡아주리.


“오빠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샀어. 이래 봬도 진짜 열심히 고른 거야. 그 수많은 리더십 책 중에서 제일 괜찮은 책이야.”

“흥.”

“어?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쏙 들어. 그러니까 각오해.”

“응?”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줬으니 나도 보답해야지.”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지헌의 종착지는 같았다. 살포시 눈웃음을 짓고 있던 정오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그녀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서 손끝으로 턱을 간질이는 버릇에 그녀의 눈동자가 꽉 긴장했다.


“공부를 좀 했어. 우리 정오랑 심쿵이한테 부담이 가지 않는…….”

이런 순간을 위하여 공부도 했는데.

드르르르. 드르르르.

생일날의 대미를 장식할 지헌의 계획은 문명의 방해를 받고 말았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지헌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휴대폰에 떠오른 글자를 정오가 먼저 알아보았다. 지헌의 아버지, 재광이었다. 정오는 휴대폰을 들어 지헌에게 건넸다. 지헌은 쓰게 한숨을 내쉬고서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어, 그래. 그게 저…….]

“…….”

[생일 축하하고.]

건조하게 받은 전화에 재광이 쑥스러운 듯 축하를 건넸다. 그 멋쩍은 목소리에 지헌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아버지께는 생일 축하 연락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아픈 영미 대신 재광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네 엄마도 축하한다고 전해달라네.]

“네. 어머니는 좀 어때요?”

[점점 좋아지고 있어. 빠르면 다음 주에는 퇴원할 수도 있겠다.]

“좋은 소식이네요.”

[퇴원하면 가족들 다 데리고 집으로 와. 사돈어른도 모시고.]

“그럴게요.”

전화는 담백하게 끊겼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조금 먹먹해졌다. 달라진 지헌의 표정을 금세 알아본 정오가 물었다.


“괜찮겠어?”

“뭐가?”

“생일엔 부모님한테 축하받고 싶잖아.”

“내가 애도 아니고.”

“그래도 엄마 아빠한테는 영원히 아기지.”

지헌은 피식 웃어 보였다. 축하받고자 하는 욕심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마저 짐작한다는 듯 정오가 권했다.


“다녀와. 어머니 뵌 지 오래됐잖아.”

“너무 늦었는데.”

“아직 안 늦었어. 얼른 다녀와.”

자신과 국순의 사이를 볼 때마다 매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을 남편. 그럼에도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았던 남편. 정오는 그런 남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도 부모님의 귀한 아들이란걸.

*

지헌은 정오의 조언에 따라 병원을 찾아갔다.

마침 복도에 나온 재광과 먼저 마주쳤다. 생각지도 못한 아들의 방문에 재광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정오가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네 엄마가 반가워하겠구나.”

재광은 앞장서서 지헌을 병실로 이끌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여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착하게 불러.”

재광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부드러워 영미가 톡 쏘았다. 까칠한 대꾸였지만 말투는 느릿했다. 마음만큼 기운이 나오지 않아 버거운 목소리였다.

지헌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침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영미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아들이 찾아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세 두 눈동자 위로 유리막이 부풀었다.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시간.

흐으윽. 흑…….

잠시 후, 많은 의미를 지닌 흐느낌이 흘렀다.

지헌은 들썩거리는 엄마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른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눈물로 뚝뚝 떨어지는 회한과 한탄이 영미의 마음을 조용히 증명해 보였다.

나를 용서해달라, 당신을 용서한다…… 사과와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시간이 흘러 지헌은 영미의 앞에 앉았다.

한참을 흐느껴 붉어진 두 눈으로 영미가 지헌을 응시했다.

지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있어요, 저한테.”

소유욕, 독점욕, 누군가는 이골이 날 정도로 집요한 고집.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모습들.

그토록 어머니를 원망했지만 실은 지헌 또한 그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독한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정오를 붙잡았고, 집요한 고집으로 어머니와 맞서며, 채은엽과 싸우며 가족을 지켰다.

이정오가 아니었다면, 그의 타고난 성향은 누군가를 해쳤을지도 모른다.

영미가 천천히 대꾸했다.


“예전이라면 네가 날 닮았다는 말이 마냥 흐뭇했을 텐데.”

“…….”

“이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 아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나은 사람이길. 나와는 다른 사람이길.

인생을 다시 배운 엄마는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네가 내게 없으니 정말이지 지옥 같았어.”

영미는 천천히 그간의 회포를 털어놓았다.


“네가 나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했을 때,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았어. 그제야 네 마음을 알게 된 거야.”

“…….”

“자식을 볼 수 없는 고통이 어떤 건지.”

“저는 평소에도 연락을 잘 안 했는데요.”

“그래도 다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전과는 천지 차이였지.”

영미의 목소리가 일렁거렸다.


“미안하다.”

“…….”

“네 기억을 막아버려서 미안해.”

영미가 지난날을 사과했다.

잠잠했던 지헌의 눈동자에도 파동이 일었다.

사실 지헌은 영미에게 사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오가 사과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독이 너를 너무 괴롭혔어.”

사랑이지만 독이었고, 독이었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던, 사랑의 독.

그 속박에 대한 사과를 받았다. 어머니에게서.


“이제 내가 잘못하면 네가 알려줄래?”

“…….”

“알려줄 수 있겠어? 엄마는 잘 모를 테니까.”

힘주어 낸 어머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감정의 여울을 만드는 처절한 사과는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쓰리고 아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줄래?”

어느덧 지헌의 눈에도 어머니의 것과 닮은 눈물이 생겨났다.

나뭇잎 위에서 부피를 키운 이슬방울이 햇살에 부풀어 올랐다가 토옥 터지듯,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얼음이었던 벽이 서서히 녹아든다.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내내 서성거리고 있었다.

고요한 병실.

지헌은 어머니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함께 잠이 들어버렸다.

꿈속에 나비가 찾아왔다. 아니, 나비가 된 것 같았다. 몸이 가벼웠다.

꽃밭 이곳저곳을 노니던 나비는 오래전 사랑했던 꽃을 찾아 날아올랐다.

나비의 날개가 7년 전의 어느 날에 내려앉았다.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날. 어머니께 정오를 소개해 드릴 생각에 마음이 들떴던 그날.


“제 걱정은 마시고 쉬세요. 조만간 들를게요. 소개시켜드릴 친구가 있어요.”


[뭐? 누구?]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하루 앞선 밤.

정오가 임신했단 사실을 알게 되어 떨리고 설렜던 그 밤.


“미안해. 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내가 발목을 잡아서.”


[오빠가 싫어할 줄 알았어.]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어. 그저 너한테 미안할 뿐이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다정한 제 목소리가 살랑거리는 바람 같았다. 바람에 나비가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지.


“오빠가 나보다 예뻐서 주눅 들었어. 좀 덜 예뻐지면 안 되겠어?”


“무슨 소리야. 네가 훨씬 더 예뻐.”

 
또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죠?”


“…….”


“제가 아까 부딪힌 사람인데요, 혹시 많이 다치셨나 해서.”

 
7년 전, 멜버른의 어느 거리.

길에 떨어진 10달러를 찾아 헤매다 한국 사람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트려버린 그 예쁜 여자를 가슴에 담게 된 그날로 나비가 지헌을 안내했다.

밀물에 잠겼던 갯벌이 썰물에 드러나듯 자연스럽게.

스물여섯의 앳된 정지헌이 인사했다.

스물다섯, 스물넷의 어린 정지헌도 그를 반겼다.

안녕. 돌아왔구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늦지 않게 찾아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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