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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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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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외전] 아이들은 자란다 (3)
2022.12.31.
도빈과 예나의 음성을 들은 정오가 달려왔다.
“이쁜이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아, 박도빈이 화냈어.”
예나가 와락 정오에게 안기며 말했다. 새별도 예나를 거들었다.
“그림 그리면서 노는데 도빈이가 크레파스 다 가져가서요. 예나가 못 가져가게 하니까 도빈이가 화냈어요.”
으아아앙!
울상이 되어 굳어 있던 도빈의 서러움이 기어이 폭발해버렸다. 정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예나야. 친구를 초대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도빈아, 아줌마가 도빈이 크레파스 하나 줄게. 울지 마.”
정오는 울음이 터진 도빈을 안아서 다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빈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도착했다. 도빈의 외갓집에 방문한 적이 있는 정오가 이들을 반갑게 환영했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응. 아침에 애가 슬슬 아프다고 연락했어. 오늘이 날인가 싶어서 바로 출발했지. 아까 도빈이 아빠한테 전화해보니까 분만대기실에 들어갔다고 하네.”
오늘 아기가 나오겠구나! 정오도 왠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예나 할머니는 계시나?”
“학원 가셨어요.”
“여전히 멋지시네.”
정오와 도빈의 할머니가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도빈이 훌쩍이며 달려왔다.
“할머니이. 으어어엉…….”
아직 풀리지 않은 서러움이 할머니 앞에서 울컥울컥 터졌다. 정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애들끼리 다퉈가지고…… 죄송해요. 정말 사이좋은 애들인데 오늘은 예나가 예민했나 봐요.”
“도빈이도 그랬겠지 뭐. 애들은 다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미안할 거 없어요.”
도빈의 할머니가 도빈을 품에 안아 달래었다.
“도빈아, 집에 가자.”
으어어엉. 안 돼요. 정예나, 강새별만 여기 두고 혼자 집에 갈 순 없어요.
도빈은 울음으로 마음을 표현했지만 할머니는 도빈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도빈아, 이따가 동생 태어나면 같이 보러 갈 텐데 계속 이렇게 울 거야?”
할머니가 연거푸 도빈을 달래는 사이에 새별의 엄마 또한 정오의 집에 도착했다. 그제야 도빈은 울음을 그쳤다. 다들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서먹서먹하게 헤어졌다.
정오는 손님들과 인사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았다.
그제야 입술이 오리주둥이처럼 불쑥 나온 딸이 보였다.
“예나야. 도빈이랑 사이좋게 지내더니 왜 갑자기 싸웠어.”
“박도빈은 바보야.”
“정예나. 친구한테 바보라고 하면 안 되지.”
“근데 진짜 바보란 말이야. 박도빈이 나빠.”
예나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정오에게 죄다 털어놓았다. 예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별이도 예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도빈이가 질투를 하는구나…….
아이의 솔직한 이야기가 엄마를 기분 좋게도, 걱정스럽게도 만들었다.
“박도빈이 나한테 넌 예쁘면 다냐고 화냈어.”
“응?”
“넌 예쁘면 다냐? 그래서 싸웠다고.”
그러다 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꺼낸 깜찍한 이야기에 정오는 조금 모호해졌다.
이상하다. 요즘 애들은 그렇게 싸운단 말이지.
“그래서 예나 기분이 안 좋았어?”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보며 눈을 깜빡이던 예나는 별안간 눈물을 뚝 떨구었다.
“도빈이가 예쁘다고 그랬을 땐 좋았는데, 내가 좋아했던 걸 가지고 공격하니까 화나잖아아…….”
그게 서운했구나.
정오는 예나를 안아주었다.
친구에게 좋은 말만 듣던 아이라면 서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도빈 또한 마음을 많이 다쳤을 것 같아 걱정되었다.
“도빈이가 화내니까 서운했지?”
끄덕끄덕.
“도빈이가 매번 예쁘다고 말해줬던 게 얼마나 고마운 거였는지 알겠어? 그건 우리 예나가 예쁘기도 하지만, 그만큼 도빈이 마음도 예뻐서 그런 거야.”
흐에에엥. 정오는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를 거듭 닦아내며 설득했다.
“친구랑 싸우니까 마음이 안 좋지?”
끄덕끄덕.
“그러니까 화해해야겠지?”
예나는 대답대신 정오의 목에 매달리며 폭 안겼다. 정오는 예나의 등을 쓸어주었다.
*
진통 네 시간 만에 아기가 태어났다. 3.2kg의 건강한 아기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병실을 가득 울리자 진서는 앞날이 두렵기도 했다.
저녁 시간에는 진서의 엄마, 아빠와 도빈, 도윤이 찾아왔다. 도윤은 동생을 보고 신기해했지만 도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여동생은 하나로 족한데 한 명이 더 생겨서 서운한 걸까 싶어 은근슬쩍 물었지만 도빈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예나랑 싸웠다더라.”
도빈의 할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진서가 도빈에게 물었다.
“그래? 도빈이 예나랑 싸웠어? 왜. 어쩌다가 싸웠어.”
“예나가 나랑은 안 놀고 강새별이랑만 놀잖아.”
도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심통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듣고 있던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싸워.”
“…….”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으니까 너도 예나랑만 놀지 말고 다른 애들이랑도 놀아야지. 남자애들이랑도 놀고. 다른 여자친구도 사귀고.”
“할머니는 아무것도 몰라.”
할머니의 의견에 도빈은 퉁명스럽게 쏘아대고는 벽에 등을 기대앉아 무릎을 감쌌다.
이세상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모른다.
마음이 그렇게 흘러간다고요.
마음의 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나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막을 수도 없는 거예요.
*
예나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주신 사탕을 한 봉지 안고서 학원에 갔다.
하지만 바둑학원에도, 미술학원에도 도빈은 오지 않았다. 바둑학원엔 새별이 있는데도 어쩐지 허전했다. 미술학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예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예나는 혼자서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었다.
“예나공주. 아빠 왔다.”
퇴근한 지헌이 집으로 돌아와 반갑게 아이를 불렀지만 예나는 힘없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예나의 눈치를 보던 지헌이 슬그머니 정오에게로 가서 눈짓으로 물었다. 정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의 말미에 오늘 지켜보며 느낀 점을 덧붙였다.
“새별이도 예나가 좋은가 봐.”
“아…… 그래?”
“응.”
“왜 나는 울고 싶지?”
“그렇지? 나도 기분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반대인데.”
딸이 너무 예뻐서 아빠는 울고 싶다. 그렇다고 예쁘게 낳아준 정오에게 무어라 따질 수도 없고.
지헌의 심각해진 표정을 장난스럽게 여긴 정오는 히죽 웃고는 예나에게 갔다. 그런데 쫓아가자마자 소리가 높아졌다.
“정예나!”
엄마의 흥분한 목소리에 예나도 놀라 사탕을 더 꽉 깨물고 말았다.
“너 이걸 또 그새 다 먹었어?”
정오는 거의 비어있는 사탕 봉지를 흔들며 예나에게 따졌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지만 오늘은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빈이가 없어서 사탕을 도로 가져왔으면 내일 도빈이를 줘야지 네가 먹으면 어떡해!”
하지만 잔소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예나의 입안에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
지헌과 정오와 예나는 서둘러 저녁 진료를 보는 치과를 찾아갔다.
흔들리는 치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앞니 두 개에서 피가 흘러 더욱 입안이 흥건해졌던 것이다.
“둘 다 뽑아야겠네요.”
의사의 소견에 예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질겁했다. 하지만 몸부림치며 도망치기도 전에 이 하나가 쏙, 하며 뽑혀나갔다. 이미 흔들릴 대로 흔들리고 있어 발치에도 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사탕을 왕창 씹어먹으니까 이가 와장창 흔들리지.”
그사이에 정오가 한마디 했다. 예나는 울상이 되어 나머지 이를 의사에게 맡기며 괜스레 앓는 소리를 냈다.
상냥한 의사가 말끔하게 발치를 마쳤다.
“자, 다 뽑았다. 시원하지?”
“졍말요?”
예나가 발음이 새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예나의 이쁨이 10% 감소되었습니다.
예나의 귀여움이 20% 증가했습니다.
정오는 그 모습을 보고 웃어버렸다.
“예나 못난이 됐네!”
예나의 미모를 완성시켜주었던 앞니가 뻥 뚫려 대문 열린 집 같았다. 그 새로운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자연스럽게 소감이 튀어나왔는데, 언제나 엄마에게 예쁨만 받고 싶은 아이는 실망하고 말았다.
“흐잉. 왜애!”
울먹울먹하는 예나를 지헌이 재빨리 달래었다.
“이제 유치가 빠졌으니까 그 자리에 어른 이가 날 거야. 어른 이는 관리 잘해야 해. 다시 또 나지 않으니까. 알았지?”
“히잉…….”
엄마가 못난이라고 말한 것이 서운했지만 아빠의 위로에 잠깐 맺힌 눈물은 쏙 들어갔다.
아기 이가 빠진 자리에 어른 이가 생긴다. 그 사실이 예나에게는 근사하게 들렸다. 아직 키는 덜 자랐지만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엄마와 아빠는 병원에 있어 할머니가 도빈의 등교 준비를 도왔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한참 느려서 도빈은 수업이 시작할 때쯤에야 교실에 도착했다.
도빈의 자리는 1분단의 맨 뒷줄이라 교실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당연히 3분단의 첫 번째 줄에 앉은 예나도 잘 보였다.
하지만 도빈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건 예나의 뒤통수뿐. 1분단의 첫 번째 줄에 앉아 예나의 옆모습도 볼 수 있는 강새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멀거니 예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순간, 고개를 돌린 예나와 갑작스레 눈이 마주쳤다.
두근두근. 입가의 근육이 실룩거렸다.
하지만 도빈의 기대와는 달리 예나는 입을 꾹 다물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인사해주면, 다 잊어버린 척하고 밝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도빈도 자존심 때문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
1교시 내내 도빈은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예나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 사이에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도빈도 정신을 차렸다.
예나는 화장실에 가려는 것 같았다. 교실 문을 나선 예나를 따라 도빈도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예나와 가까워지기 전에 그 사이를 강새별이 끼어들었다.
“예나야. 오늘 우리 누나랑 학원 같이 가자. 누나가 너랑 대국하고 싶대.”
“그래.”
두 사람의 정다운 대화를 들으니 다시 마음이 상했다. 그런데 실망스런 마음으로 발을 돌린 순간.
“너 앞니 빠졌어? 어? 두 개 다 빠졌네.”
새별의 목소리에 도빈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예나 앞니가 빠졌다고? 두 개나?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또 울컥 심술이 났다.
“그래서 이상해?”
예나가 새별에게 물었다.
그래. 이상해. 아주 별로야. 흥.
정예나는 바보고, 아주 별로야.
“아니. 이는 다 빠지는 거야. 엄마가 나도 빠질 거랬어.”
새별이 예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예나가 기다리던 대답은 아니었다. 예나는 새별에게 더 묻지 않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박도빈.”
예나가 도빈의 이름을 불렀다.
도빈이 움찔하며 눈을 멍하니 떴다.
“나 이 빠져서 이상해?”
앞니가 빠져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친구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쁜 얼굴이 못생기게 변한 건 아니었다.
예나는 빠진 이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곧장 또 입을 닫았다. 도빈의 대답에 따라 눈물을 떨굴 것 같기도 했다. 거울처럼 도빈도 그 표정을 따라가게 됐다.
도빈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이 몇 개 빠진 일로 울적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예나가 울적해하면 자신 또한 슬퍼질 것 같았다.
“아니. 안 이상해.”
“…….”
“안 이상한 게 아니고, 예뻐. 당연히.”
네가 제일 예뻐.
네 이가 몽땅 다 빠져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도빈의 대답에 예나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되살아났다. 빠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해사하게 웃음 짓는 모습은 정말로 꽃처럼 예뻤다.
그제야 도빈도 언제나처럼 예나를 따라 웃었다.
마음의 길은 막을 수가 없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