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외전] 2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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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외전] 2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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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외전] 2호의 탄생
2023.01.04.
따뜻한 봄.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계절.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차츰 새 생활에 적응해갔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까지 끊임없이 놀기만 하는데도 그 안에서 배우는 것이 생기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지헌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첫봄. 아이의 첫 소풍을 챙기고, 아이와 함께 나무를 심고, 아파트 단지를 가득 채운 벚꽃을 구경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5월이 바짝 다가왔다.
새 가족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정오와 지헌의 침실 옆에는 아기방이 생겼다. 아기방 꾸미기의 일등공신은 예나와 영미였다.
영미는 매주 정오네 집을 찾아와 예나와 함께 아기방을 꾸며나갔다. 당연히 아기방은 예나의 취향으로 꽉꽉 채워졌다. 예나가 주문을 하면 영미가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뜨개질을 배운 이후 영미의 솜씨는 쑥쑥 성장해갔다. 예나의 주문이 나날이 어려워져 절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영미는 스파르타 정예나 선생의 요구로 온갖 인형들의 옷을 만들다가 이제 손수 인형을 만드는 데에 이르렀다.
“할머니이. 심쿵이는 예나보다 작으니까 작은 토끼인형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예나 인형이랑 심쿵이 인형이랑 크기가 똑같으면 어떡해요.”
“할머니는 아직 이 크기밖에 못 만들어.”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요.”
“그래. 할머니가 아직 노력이 부족했다. 미안해.”
“괜찮아요. 앞으로 잘하면 되죠. 얼른 다시 만들어요.”
“이걸 또 만들라고?”
“잘못했으니까 다시 해야죠.”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정오는 몰래 웃었다. 예나가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 맥스기획의 정지헌 이사가 직원들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정말로 이 사실을 모르는 영미는 예나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 손녀딸은 말을 왜 이렇게 잘할까, 하며 감탄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만든 것들로 손주의 방을 꾸밀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부지런한 것은 몸도 건강하게 만들었다. 영미의 병은 과거에도, 지금도 예나가 치료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겉이불과 모빌과 인형들을 비롯하여 지인들이 보내준 많은 선물들로 어느새 아기방은 다채로워졌다. 예나도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동생의 방을 매일 드나들며 아기가 얼른 태어나길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 오고, 남들보다 아기도 큰 편이었지만 정오는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첫 아이 때와 다르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챙겨주고 다들 그녀의 컨디션에 맞추어주니 절로 힘이 났다. 무엇보다도 그때와 달리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정작 지헌은 조금 예민해졌다. 정오를 잘 챙겨주려다 보니 생긴 예민함이었다.
“왜 손에 핏기가 없지? 진통 오는 거 아니야?”
“진통은 무슨. 아직 아니야.”
“그래도 너무 걱정되는데. 나 오늘 출근하지 말까?”
“그래도 가야지. 오빠가 본부장인데.”
“그러다가 갑자기 진통 오면 어떡해. 병원에 데려가야 하잖아.”
“그럼 오빠는 병원으로 달려오면 돼. 알아서 병원에 갈 수 있어. 여기는 엄마 있으니까 괜찮아.”
“어머님은 예나 봐주셔야 하고.”
“오빠. 회사 가기 싫어서 그래?”
정오가 정곡을 찔렀다.
정오의 물음에 지헌은 부정하지 않고 순한 아기 짐승처럼 고요히 정오를 바라보았다.
4월 말에 정오가 육아휴직을 하여 지헌 또한 회사를 다니는 의미가 없어졌다. 지켜야 할 사람이 회사가 아니라 집에 있으니 지헌의 신경 또한 하루 종일 집에 가 있었다.
“얼른 일하고 와. 내가 없으니까 오빠가 내 몫까지 열심히 일해야지.”
“하…… 가기 싫다.”
지헌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쿵아,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빠 대충 일 끝내고 빨리 올 테니까.”
“대충 일하지 말라니까!”
지헌이 정오의 배에다 대고서 농담스럽게 말하자 정오가 버럭했다. 아이도 아빠의 농담이 재미난 지 몇 번 엄마의 배를 차댔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배가 꿀렁거리는 것이 지헌의 눈에도 잘 보였다.
회사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등 떠밀듯 출근시키고 아이도 학교에 보내고, 드디어 집이 한산해졌다. 정오는 국순과 거실에 나란히 앉아 평온하게 시간을 보냈다.
국순이 정오의 배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말했다.
“어떤 말썽쟁이가 나오려는지, 엄마가 잠시도 쉴 틈을 안 주네.”
“딸꾹질하는 거야.”
정오가 아기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확신을 갖고서 대답했다. 돌아다닐 때는 잘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태동이 잘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은 딸꾹질을 길게 하네, 걱정되게. 심쿵아, 이제 딸꾹질 그만해.”
정오가 고개를 깊이 숙여 아기에게 말했다. 그때 무언가 속에서 툭, 하는 느낌이 났다.
“아아…….”
“왜 그래?”
정오의 창백해진 얼굴이 국순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했다.
국순은 바로 정오를 준비시키고 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님.]
“어, 정 서방, 병원으로 와야겠어. 양수가 터진 것 같네.”
[지금 어디신데요?]
“이제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가려고.”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10분이면 돼요.]
정말로 지헌은 10분도 안 되어 집으로 달려왔다. 그 스피드에 깜짝 놀란 정오가 물었다.
“어떻게 9분 만에 와? 회사 안 간 거 아니야?”
“…….”
“왜 말을 못 해. 정말로 회사 안 갔어?”
“가긴 갔지. 회사 들렀다가 미팅 나갔다가 바로 온 거야. 요즘엔 이 근처에서 미팅을 잡아.”
미팅을 이 근방으로 잡는다고?
정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기가 막혀 탄식했다.
어쨌든 자신을 1순위로 생각하는 남편 덕분에 정오는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가족분만실로 안내를 받아 옷을 갈아입고 여러 검사를 하는 사이에 어느덧 오후가 되었고 진통은 서서히 강도가 세졌다.
진통은 계속되었지만 아직 아기가 전혀 내려오지 않아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에 정오는 옆으로 몸을 말고 누워 울먹거렸다.
“무서워…….”
지헌이 그런 정오를 다독였다. 지헌 또한 왜인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하여 준비했던 격려의 말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아내에게 든든한 남편이 되어주어야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배고파서 힘 못 줄까 봐 무서워…….”
“……응?”
“오기 전에 밥 좀 많이 먹을걸…….”
정오의 후회 가득한 푸념에 지헌은 어쩐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심쿵아, 오늘 나와야 해. 내일은 안 돼…….”
힘 빠진 와중에도 정오의 웅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내일 나오려면 차라리 모레 나와라…….”
“모레는 안 돼요. 진통은 오래하면 위험해요. 늦어도 내일 새벽엔 나와야 해요.”
정오의 상태를 체크하러 왔다가 정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간호사가 대꾸했다. 정오는 간호사의 조언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내일 새벽에 나오면 안 돼요…….”
“…….”
“심쿵아, 그냥 오늘 빨리 나와라, 제발…… 내일은 어버이날이잖아…….”
흐읍.
순간 웃음 한 줄기가 끼어들어 지헌은 급하게 입을 막았다. 아픈 와중에도 챙길 것은 챙기고자 하는 아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 마음을 솔직하게 밝혔다간 원망의 말을 곱절로 들을 것 같아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웃음을 머금을 새는 없었다. 진통의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지헌의 손을 붙잡은 정오의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정오의 짧은 손톱이 지헌의 손등에 깊은 자국과 피멍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지헌도 정오도 이를 느낄 수는 없었다.
“하아, 하아…….”
점점 정오의 호흡이 가빠졌다. 지헌은 숙지해온 호흡법대로 정오와 함께 호흡해가며 자리를 지켰다.
이제 진통의 강도는 100을 쉽게 찍고 내려왔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신음하는 아내를 보며 지헌은 자꾸 눈이 젖어갔다. 7년 전, 자신이 지켜보지 못한 그때에도 아내가 이토록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중간에 무통주사의 도움으로 진통을 줄일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마저도 소용없었지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기가 내려오고 자궁문이 열렸다. 어벤저스가 들어와 침대를 분만침대로 변신시킨 후 의사가 들어와서는 진행이 훅훅 이루어졌다.
정오가 이토록 힘들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지라 지헌도 덩달아 혼란이 왔다. 당장 쫓아가서 정오의 얼굴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출산 과정에서 남편은 별 필요가 없었다.
어벤저스팀이 아내와 함께 힘을 주는 동안 지헌은 뒤편에 우두커니 서서 그저 속만 앓을 뿐이었다.
“엄마, 힘주세요. 지금 힘 안 주면 아기 위험해요.”
아기가 위험하다고?
힘을 쓰다가 잠시 졸도했던 것 같은 정오가 의사의 충고에 체력회복 물약이라도 먹은 듯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바짝 힘을 주었다.
“머리가 보여요. 조금 더 힘냅시다. 하나, 둘!”
의사의 구호에 맞추어 모두가 힘을 쏟았다. 그리고.
“아기 나왔습니다. 아들이에요.”
뻣뻣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아기는 처음부터 곧장 울지는 않았다. 간호사들이 팔다리를 마사지해주고, 의사가 기구로 입을 통해 호흡을 넣어주고 나서야 아기의 울음소리가 쨍하며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
한 발짝 떨어져서 멍하니 서 있던 지헌은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어정쩡 걸어가서 아기의 탯줄을 잘랐다. 이후 의사가 후처치를 하고 간호사들이 아기를 씻기는 동안 지헌은 기진맥진하여 눈을 깜빡거리는 정오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목에 무언가가 걸려 있는 듯이, 어쩐지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고생했어.”
“오빠까지 울고 그래.”
정오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지헌은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쓱쓱 눈물을 닦고 나니 간호사가 아기를 안아 들고 왔다. 아기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4.0kg이에요.”
……그래서 정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어째 아기가 통통하고 보송보송하다 싶었는데, 지헌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컸다.
5월 7일 22시. 4.0kg 우량아 탄생!
통통한 정지헌이 태어났다.
지헌은 왠지 자신의 어릴 적 앨범에서 본 듯한 얼굴의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새빨간 아기의 이마에 박힌 거뭇한 연어반이 눈물짓는 와중에도 피식 웃게 만들었다.
날 닮은 아이.
찌르르하며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온몸을 벅차게 흔들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순간.
“심쿵아, 안녕. 아빠야.”
8년 전 이정오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헤어지고 다시 만나 가족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날들이 아기의 배경 뒤로 훅훅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운명이 또 하나 찾아왔다.
엄마의 배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하는 듯, 아기는 아빠의 품에 안겨 울음을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