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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9화 (9/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화

유디트는 4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아셀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유디트와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

그래서 그는 유디트도 함께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가문의 어른들께 졸랐다.

물론 유디트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선뜻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후원해 주었다.

그때부터 유디트는 페델리안가의 본격적인 피후원자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그건 그녀에게 있어 무척 좋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셀이 다니게 될 아카데미의 학비는 무척 비쌌다. 평민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도 없을 만큼.

그런데 페델리안 부인의 자비 덕택에 그런 곳에서 무상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지원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셀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면 방학에야 겨우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생처음 입어 보는 예쁜 교복보다도, 또래 하녀들의 부럽다는 눈빛보다도 유디트는 그 사실에 더욱 기쁘고 설렜다.

‘새로운 친구가 생기더라도 네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직전, 아셀은 유디트의 손을 꼭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둘은 강당에서 입학식을 치르는 와중에도 내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곧 반이 달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유디트의 주전공은 회계였고 아셀의 주전공은 역사학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주전공에 따라 반이 나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셀은 자신이 회계를 선택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유디트가 말렸다.

물론 아셀은 회계를 선택하든 역사학을 선택하든 잘할 게 분명했지만, 유디트는 역사책을 읽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기를 응원한 것이다.

아셀과 반이 갈라져 약간 아쉬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낙관적이었다.

아마 곧 다른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유디트의 아카데미 생활은 예상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친구는커녕 책을 펼쳐 보면 놀림 가득한 낙서가 꽉 차 있어 글자도 읽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어떨 때는 책상이 통째로 사라져 있기도 했다.

또한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적도 있었다. 어디를 가든 유디트를 비웃듯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왜? 아셀에게 가서 이를 거야?’

어떤 모욕적인 말보다도 그 말에 유디트는 더 화가 났다.

그들은 마치 자신은 아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무시했고, 심지어 자신을 아셀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로 취급했다.

유디트는 그들의 인식을 바꿔 주고 싶어서 그때부터 학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혹시 아셀의 도움을 받으면 또다시 민폐 끼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어떻게든 혼자서 극복하려 했다.

그 뒤 밥도 거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유디트는 계속 공부만 했다. 걱정하는 아셀의 시선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거머쥔 수석.

우수한 성취를 이뤄 내고 나자 먼저 교수님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페델리안가의 후광으로 낙하산으로 입학한 줄로만 알았던 평민 학생.

그 학생이 노력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모습에 교수들은 그녀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셀 페델리안이 어떤 여자애 하나에 단단히 홀려 아카데미까지 데려왔노라는 기분 나쁜 소문 대신, 가능성을 알아보고 후원을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원석을 발견해 낸 뛰어난 안목이라며 감탄하기 바빴다.

같은 반 학생들은 눈치를 보다가 유디트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유디트는 귀찮다는 기색도 없이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유디트를 둘러싼 불만과 질투, 시기 어린 시선들이 서서히 호의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유디트는 나름대로 자신의 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디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고난을 극복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겨우 만든 평온한 아카데미 생활이었다.

섣불리 체이스를 도와주었다간 그 노력이 다시 물거품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디트는 고심 끝에 결국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고,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단 걸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이 말을 한 이유는 비교적 단순했다.

유디트에게 있어서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셀이 유일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단 걸 입에도 대지 않는 체이스를 보면, 또 무심코 아셀을 떠올려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면 영영 아셀을 잊지 못하게 될까 봐 그랬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는 안다.

하지만 지금의 유디트에겐 아셀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걸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점심 식사를 제안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점심은 항상 학업이나 학생회 일에 치이는 아셀이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때였으니까.

혹시나 그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청해 온다면 선약이 있다는 말로 거절할 계획이었다.

만약 끈질기게 부탁해 오더라도, 선약자가 체이스라는 걸 알면 아셀도 꺼리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별것 아닌 부탁이었다.

하지만 별것 아니어도 이렇게 작은 부분부터 아셀을 가능한 한 끊어 내고 싶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아셀의 존재를 서서히 지워 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상실감조차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그렇게 유디트의 일상에서 아셀이 흔적 없이 지워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결국 유디트의 부탁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별안간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며 이상한 말만 해 댈 뿐.

거절하는 건가? 아셀을 멀리할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를 놓치다니.

유디트는 속이 조금 쓰렸다.

* * *

다음 수업은 고대 역사학이었다.

고대 역사학 수업은 서쪽 건물에 교실이 위치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수업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유디트, 카렐 교수님이 너더러 당장 연구실로 와 보래.”

재빨리 교재를 챙기고 있던 유디트는 반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도 잘 모르겠어.”

반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딘지 측은한 눈빛으로 유디트를 보던 반장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역사학 교수님께 말씀드려 놓을게. 일단 빨리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늦었다간 밉보일지도 몰라. 카렐 교수님 성격…… 너도 알잖아.”

반장은 말을 고르고 골라 그렇게 말했고, 대신 눈빛으로 유디트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했다.

반장은 힘내라는 듯이 유디트의 어깨를 몇 번 토닥거렸다.

그렇게 유디트는 카렐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종종 졸업반인 학생들을 제자처럼 두어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카렐 교수는 아니었다.

쓸데없는 핏덩이들을 관리할 시간에 논문을 한 글자라도 더 적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카렐 교수의 연구실 안까지 들어가는 건 아마도 유디트가 최초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왜 불렀을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걱정도 되었지만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사학 수업은 아셀과 겹치는 시간대였으니까.

최근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들러 본 적 없는 수련장을 방문하질 않나, 이번엔 카렐 교수의 연구실을 찾게 되다니.

“이거, 네 짓이냐?”

유디트를 본 카렐 교수가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카렐 교수는 인사를 하려고 허리를 숙이는 유디트를 한 손으로 가볍게 제지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뭔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무척 낯익은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고급 회계학 예상 문제>

바로 어제 유디트가 체이스를 훔쳐보던 학생들을 내쫓으려고 미끼로 흔들었던, 그 노트였다.

저 노트가 어떻게 교수님의 손에 있는 걸까.

유디트가 생각하는 도중, 카렐 교수는 노트를 팔랑팔랑 펼쳐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하…… 정말이지. 봐도 봐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프로이센 아카데미 교수 생활 14년 중 너 같은 학생은 처음 본다.”

카렐 교수는 골머리를 앓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유디트는 혹시 자신이 뭔 실수라도 한 것인지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별로 실수랄 만한 건 없었다. 그저 시험 범위 내에서, 예상되는 문제를 만들어 나눠 준 것뿐이었으니까.

눈만 끔벅이는 유디트를 향해 카렐 교수는 쯧 혀를 찼다.

“너 때문에 문제를 싹 다 다시 출제해야 할 판이야. 어떻게 그렇게 출제자의 의도를 잘 아는 거지? 설마 머릿속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카렐 교수는 사납게 인상을 쓰고 있고, 마치 유디트를 향해 다그치듯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들어 보니 그건 온통 칭찬이었다. 카렐 교수의 짙은 회색 눈동자에는 감탄과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유디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카렐 교수는 그런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졸업하면 뭘 할 거지?”

“저는-.”

결혼을 할 것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카렐 교수에게 가로막혔다.

“수습 교수가 될 생각은?”

“……네?”

“내 밑에서 한 5년 정도 배우고, 학생들에게 고급 회계학을 가르쳐 볼 생각은?”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유디트는 말문이 막혔다.

교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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