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화
자신을 좋게 봐준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유디트로서는 곤란할 따름이었다.
“교수님, 아시겠지만 저는 평민인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너 같은 인재를 놓치는 게 아까우니까 제안한 거다. 어차피 아카데미 교칙에는 평민이 교수를 하면 안 된다는 규정도 없어.”
“하지만 귀족인 학생들이 평민이 가르치는 수업을 들을…….”
카렐 교수가 또 유디트의 말을 가로막았다.
“멍청한 놈은 안 들을 거고, 멍청하지 않은 놈은 듣겠지. 너는 멍청하지 않은 놈들만 가르치면 되니까 신경 쓸 것 없다.”
“…….”
“그래서 대답은?”
유디트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교수라니. 그것도 명망 높은 프로이센 아카데미의…….
물론 유디트도 알긴 알았다. 이건 분명 좋은 기회라는 것을.
하지만 섣불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유디트가 굳이 수많은 전공 중 회계를 선택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여 취직이 잘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페델리안 공작 부인으로 인해 취직 대신 약혼을 먼저 해야 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내내 대답이 없는 유디트를 뭐라고 생각한 건지 카렐 교수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약혼해서 그러는 거냐?”
“네?”
“삼자대면하자꾸나.”
유디트가 약혼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그사이 학생들 사이에서는 체이스 카르단디와 유디트가 약혼을 한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긴 했다.
그날 유디트가 체이스를 보러 몰려든 학생들 앞에서 당당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혹시 카렐 교수가 그들에게서 얘기를 전해 들었나?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유디트를 향해 카렐 교수는 말했다.
“체이스 카르단디. 설마 그 고약한 놈이 약혼하면 집안일만 하라고 시켜서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뇨, 그런 것은-.”
“삼자대면하자꾸나.”
대화는 자꾸 삼자대면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유디트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카렐 교수가 가로막으며 “체이스 카르단디를 불러오거라. 삼자대면하자꾸나.”라고만 대답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니 유디트는 카렐 교수가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아차렸다.
교수님도 알고 계신 것이다. 자신이 제안을 거절할 거라는 걸.
그래서 시간을 끌 명목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굳이?
카렐 교수가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보던 카렐 교수는 불쑥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디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디트, 너 자신을 못 믿겠으면 내 안목을 믿거라.”
“…….”
유디트는 이제 입을 떡 벌렸다.
카렐 교수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정신 차리라며 책으로 내려친 것도 아니었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다른 학생들에게 말한다면 꿈이라도 꿨냐며, 헛소리 말라고 코웃음을 칠 테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일이었다.
유디트는 조금 건방지지만, 재차 여쭐 수밖에는 없었다.
“교수님, 저로서는 교수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눈여겨보고 있었다.”
카렐 교수는 정말이지 뜻밖의 말을 입에 담았다.
“신입생이었던 네가, 기초 회계학 시험을 치렀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어. 아직도 그 시험지는 내 탁자 속에 있다.”
“네? 대체 그걸 왜…….”
기초 회계학 시험이라면, 유디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시험지에 적힌 답들은 허접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을 게 분명했다. 창피함에 유디트의 얼굴이 빨개졌다.
대체 자신을 왜 눈여겨보고 있었을까. 전혀 티가 안 났다.
그도 그럴 게 카렐 교수는 그 누구도 특별히 대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학생도, 낮은 학생도, 수석인 학생도 다 똑같은 온도로, 시종일관 미적지근하게 대했으니까.
“사실 나는 네가 당연히 졸업하면 내 연구실로 올 줄 알았어.”
“네?”
“네 자리도 미리 마련해 두었단 말이다.”
카렐 교수가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여백의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걸 본 유디트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체이스 카르단디, 그놈이 너를.”
마치 체이스가 자신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카렐 교수가 들끓는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다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삼자대면하자꾸나.”
* * *
유디트가 카렐 교수에게 스카우트를 받았다는 사실은, 누가 일부러 소문을 퍼트렸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교실에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는데 닿는 시선에 뺨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누가 말하고 다닌 걸까?
설마 카렐 교수님?
그것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너무 믿기지 않았다.
유디트를 스카우트했다며 떠벌리고 다니는 카렐 교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으므로.
뭔가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푹 숙이고 뛰듯이 복도를 지나고 있었지만, 유디트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눈에 너무 잘 띄었다.
그리고 불길한 상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유디트.”
누군가 유디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표독스러운 표정을 한 학생이 팔짱을 끼고 유디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은 주홍색 머리의 소녀. 그녀는 유디트도 익히 아는 아이였다.
고급 회계학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이스와 함께 수련장에 있었을 때 쫓아낸 무리 중 한 명 같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르데샤 로지에나, 회계학 차석이었다.
유디트는 일단 기가 죽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무슨 용건이 있냐는 듯 르데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독기 품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르데샤가 이내 팔짱을 풀었다.
표독스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유디트의 손을 간절하게 덥석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카렐 교수님께 그 노트 들켰어.”
오늘따라 예상치도 못한 말을 많이 듣는구나.
그 생각을 하며 유디트는 르데샤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독기를 품어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주황색 눈동자는 눈물이 그렁 맺혀 있었다.
또, 표독스러운 게 아니라 눈꼬리가 위를 향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르데샤는 면목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카렐 교수님께 불려 간 거지?”
“그건 맞지만,”
“미안해, 그런데 나는 네 이름은 전혀 말하지 않았거든?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교수님께서 네 필체를 알아보시더라구.”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애초에 르데샤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교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고작 예상 문제들을 정리한 노트를 교수님께 들킨 것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노트 덕에 수습 교사 스카우트까지 받은 것이긴 했다.
물론, 유디트로서는 곤란할 따름이었지만.
유디트는 울먹이는 르데샤를 달랬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
“응, 정말 괜찮아.”
그러자 르데샤는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이 회복해선 방긋 웃었다.
“그럼 같이 점심 먹자, 어때?”
* * *
‘계속 안 보면 잊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최대한 피하면서 살면 언젠가는 잊히더라.’
한나가 알려 줬었던 짝사랑을 잊는 법. 최대한 안 보기.
그걸 실천하기 위해 유디트는 근래 들어 점심때는 방에 틀어박혀 포장해 온 빵을 먹곤 했다.
혹시라도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아셀을 마주칠까 봐.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팔짱을 껴 오는 르데샤를 뿌리치진 못했다.
사뿐한 걸음으로 카페테리아를 향하는 르데샤와는 다르게 유디트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겨우 걸어 도착한 카페테리아에는 다행히 아셀이 없었다. 왠지 허전한 마음은 애써 무시했다.
“유디트, 어떤 거 먹을 거야?”
“나는 A 메뉴.”
A 메뉴는 빵과 수프로 간단하게 이루어진 조합이었다. 혹시 모르니 빨리 먹고 나가려는 속셈이었다.
르데샤 또한 점심은 가볍게 먹어야겠다며 A 메뉴를 골랐다.
조리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르데샤와 유디트는 금방 접시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당연히 자리는 가장 구석이었다.
굳이 구석을 골라 앉는 유디트를 르데샤는 조금 의아한 듯 보았지만, 그래도 이유를 묻지 않고 앉아 주었다.
여기라면 만약 아셀이 카페테리아에 오더라도 발견하지 못하겠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데 누군가가 유디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깜짝 놀라 쳐다보니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은발이 보였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약혼자, 체이스였다.
언제 온 거지?
적어도 아셀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디트는 그를 멀뚱히 응시했다.
“얘는 뭐야?”
곁에 앉은 체이스가 곧 르데샤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물었다.
방해꾼은 자기면서. 유디트는 그 천연함에 기가 막혔다.
“……같이 점심 먹으러 온 친구지 누구겠어. 그리고 그 질문은 르데샤가 너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어째서? 쟤는 기껏해야 친구고, 나는 네 약혼자인데.”
정말 자기 좋을 때만 약혼을 들먹거리는 체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