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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22화 (2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2화

“그래. 짝사랑한 지 몇 년이면 내가 말을 안 해. 길어 봤자 몇 개월일 테니까 아직 접기는 일러.”

한나는 이 말을 하면 유디트가 조금이지만 기운을 차릴 줄 알았다. 하지만 유디트는 더욱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몇 년이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아직 포기하기 한참은 이르다는 거야.”

유디트는 달래는 듯한 한나의 토닥임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그저 황금색 눈동자를 몇 바퀴 데구루루 굴리더니 문득 물었다.

“한나, 혹시 내가 뭐 때문에 고민하는지 알아?”

“당연하지.”

한나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너 사실 체이스를 좋아하잖아.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 것 같니? 이래 봬도 간접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니까?”

“…….”

“내가 너무 눈치가 빨라서 깜짝 놀랐구나.”

유디트는 말을 잃었다.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이는 유디트를 보며 한나는 짓궂게 웃곤 덧붙였다.

“그런데 아카데미 내에 너랑 체이스가 사실은 정략 약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그런 헛소문이 돈다고?”

유디트의 황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근거 없는 것 같지는 않던데? 카페테리아에서랑 디저트 카페에서 체이스랑 네가 사이좋게 있었다는 목격담이 많아. 그리고 생전 수업을 듣지도 않던 체이스가, 널 만나기 위해 수업까지 들었다고 하더라고.”

“……오해야. 단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체이스가 수업을 들은 것도 그냥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서였어.”

유디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한나는 다급히 변명을 내뱉는 유디트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가능성 있어. 유디트, 나를 믿어.”

“……가능성 없어.”

유디트는 의기소침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분홍색 머리카락 틈새로 보이는 눈망울이 꼭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슬퍼 보였다.

이렇게 약해 보이는 유디트의 모습은 또 처음이라 한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입생 때 유디트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힘들어하진 않았는데, 체이스에게 생각보다 깊이 마음을 준 모양이구나.

그때 유디트가 고개를 들고 단호히 말했다.

“한나. 자꾸 오해하는 것 같아서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나 진짜 체이스 안 좋아해.”

“그래, 그래.”

한나는 침울한 얼굴을 한 유디트를 꼭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유디트는 얼떨결에 한나에게 끌어안겨선 중얼거렸다.

“정말 안 좋아한다니까? 괜히 오해해서 네가 이상한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하지 마. 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해.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야.”

“……정말인데.”

쑥스러워하기는.

한나는 뒤늦은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유디트를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내가 도와줄게. 네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의지를 담아 속삭이는 말에, 유디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지도 않지?”

“아니야, 빠짐없이 다 들었어. 너 체이스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한나는 또 인자한 어른의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 *

유디트는 차라리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힘들지언정 다른 잡생각은 안 들었으니까.

유디트는 일에 중독된 것처럼 자신을 혹사했다.

예상보다 회계학 보충반 신청자가 무척 많았다.

지원자를 간추려서 대략 10명 정도만 뽑으려고 했는데, 선정 기준도 모호했고 잘못 뽑았다간 형평성 문제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곤란해하던 유디트를 본 카렐 교수는 말했다.

‘그러면 졸업 기준 미달인 성적을 가진 녀석들로만 반을 구성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미 지원서까지 다 받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진 않을까요?’

‘뭐. 불만은 나올 수 있겠지.’

걱정이 역력한 유디트를 향해 카렐 교수는 간단히 내뱉었다.

‘그런데 불만을 품어 봤자 뭐 어쩔 거냐?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

‘문제 있으면 나한테 와서 따지라고 하려무나.’

카렐 교수라는 막강한 방패를 얻게 된 유디트는 학생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워낙 제멋대로 굴던 카렐 교수였기 때문에, 갑자기 바뀐 말에도 학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지 뭐라고 더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어쩌면 카렐 교수에게 가서 따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회계학 보충반이 만들어졌다.

백 명이 족히 넘는 사람들이 신청했던 것과 다르게 막상 구성 인원은 6명으로 확 줄었다.

하지만 인원이 줄었다고 해서 유디트의 근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 절반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체이스 카르단디, 리아나 제르니아스, 세드릭 벨루안.

하나같이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유디트는 명단이 적힌 종이를 보다 중얼거렸다.

“역시 괜히 한다고 했나.”

우선 체이스는 며칠 지켜본 결과, 노력하겠다는 말대로 제 지시에 잘 따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유디트가 뭔가를 시키면 인상을 쓰고 입으로는 투덜거릴지언정 시키는 대로 행동하긴 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이 문제였다.

세드릭 벨루안.

일명 벨루안 백작가의 망나니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교수님들 사이에서는 통제 못 할 문제아로 통할 정도로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마법에 꽤 재능이 있었는데, 신입생 때부터 마법으로 못된 장난을 많이 치면서 명성을 날렸다.

특히 가장 유명한 사건은 수업 시간에 바람을 일으켜 열심히 수업 중이던 약초학 교수의 가발을 홀라당 벗긴 일이었다.

왜 이런 발칙한 장난을 하냐며 길길이 날뛰는 교수님에게 세드릭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밌잖아요. 더워 보이시길래. 이젠 시원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약초학 교수님의 얼굴이 더 흉흉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수님을 빤히 바라보던 세드릭은 또 상큼하게 웃으며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가발을 다시 씌워 주었다.

‘이제 됐죠? 화 푸세요. 주름 생기겠어요.’

그런데 그런 세드릭은 의외로 모범생인 아셀과 친분이 있었다. 페델리안 부인과 벨루안 부인이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두 사람도 부인들 모임에 얼굴을 비추며 종종 만남을 가져 왔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세드릭은 아셀 앞에서는 나름 얌전해진다는 것이다. 아마 그를 어르고 달래는 기술이 아셀이 유독 특출났기 때문인지도.

하지만 회계학 보충반 교실에는 아셀이 없다. 즉, 세드릭을 통제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듯했다.

그녀는 명단 아랫줄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인물도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아나 제르니아스. 제르니아스 공작가의 금지옥엽 공녀.

리아나와 유디트는 당연하게도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 둘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리아나의 입장에선 유디트를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유디트도 리아나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었다.

회계학 수업을 갈 때마다 수업이 끝난 그녀와 종종 마주치곤 했지만 서로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저 유디트가 아는 것이라곤, 그녀가 아셀의 소중한 약혼녀라는 사실뿐이었다.

* * *

유디트는 아셀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렸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다.

아셀이 뭐라고 하면서 약혼녀에 대해 설명했더라. 내게 설명하긴 했었나?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어 보던 유디트는 곧 떠오른 기억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생각해 보니 먼저 내 쪽에서 듣기를 거절했었지.

하긴, 당연했다. 들어 봤자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도 없고, 괜스레 제 속만 타들어 갈 것이 뻔했으니까.

‘리아나는…….’

‘됐어.’

그 당시 유디트는 뭐라고 말하려는 아셀의 입을 재빨리 손을 들어서 막았다.

리아나.

아셀이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는 고작 그 사실만으로도 유디트는 가슴에 번지는 통증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아셀의 연이은 설명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언제 자신도 모르는 새 그렇게 친해졌을까.

아셀과 몇 년을 알아 온 친구라고 들었지만, 그사이 일이 진척된 것을 보면 아마 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고작 소꿉친구 정도의 사이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에 칼날처럼 가시가 박힌 것 같은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내가 네 연애사에 대해 구구절절 알 필요는 없잖아.’

유디트는 아셀의 시선을 피했고, 아셀은 시선을 피하는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곧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너는 내게 지나치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약한 입김이 유디트의 뺨을 간지럽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물론 이는 전혀 틀린 말이었다.

유디트가 아셀에게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다면 모를까.

아셀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그녀는 늘 곁눈질로 그를 살피기에 바빴고, 남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몰래 엿듣기도 했다.

그저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며, 능숙하게 자신을 포장해 온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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