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23화
그렇게 그의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파도가 그녀를 휩쓸고 갔고, 그러는 동안 마음은 조금씩 마모되어 무뎌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셀이 아는 유디트의 모습은.
“하…….”
유디트는 보충반 명단을 들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리아나의 앞에서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네고, 멀쩡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리아나 제르니아스는 아셀처럼 타고난 존재감으로 빛나는 인물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야 하는 자신과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또한…….
별다른 노력 없이 아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좀 고생하더라도 인원이 더 늘어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 세드릭과 리아나와 직접 부딪힐 일은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이미 회계학 보충반은 만들어졌다. 이제 와 구성 인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리아나와 마주치게 될 운명이겠지.
꾸깃. 유디트가 쥐고 있던 보충반 명단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 * *
세드릭 벨루안은 나름대로 어렸을 때부터 아셀 페델리안을 봐 왔기에, 나름대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셀은 그조차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세드릭은 아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희미한 빛이 드는 창문 위로 아셀의 얼굴이 비쳤다. 그의 표정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분명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가는 붉게 물들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실컷 고함을 지르며 감정을 토해 내기라도 하는 게 낫지. 지금 그의 표정은 우는 것보다도 더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너 무슨 일 있어? 너 표정이 말이 아니야.”
“그래?”
아셀이 손을 들어 제 뺨을 만졌다. 그러곤 본인조차도 생소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는지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세드릭은 어쩐지 아셀이 조금 전보다 더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자신에게 힘든 일을 털어놓아도 좋을 텐데.
일종의 결벽증처럼 남에게 틈을 내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아셀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그게 설령 옹알이를 시작할 때부터 서로를 봐 온 오래된 친구의 앞일지라도 말이다.
자신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셀 페델리안이 원래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건 세드릭은 아셀의 이런 점이 가끔은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다 보니 네 걱정을 다 하게 될 줄이야. 맨날 내가 사고를 쳐서 걱정하는 건 네 몫이었는데, 이건 또 새로운 경험이네.”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 장난스럽게 내던진 말에도 아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어두운 복도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쫓는 듯이.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평소에 아셀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어색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셀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게 특기였고, 금방 관심사를 파악해 대화를 원활하게 진행해 주곤 했으니까.
낯선 기분에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눈동자만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다물려 있던 아셀의 입술이 열렸다.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어.”
제법 심각해 보이는 것치고는 예상외로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세드릭이 눈을 크게 뜬 채 대꾸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난 최선을 다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나를 왜 피하는지라도 알면 고칠 텐데 그 이유조차 모르겠어.”
세드릭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아셀의 옆모습을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아셀의 목소리는 평상시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
길 잃은 아이처럼 무질서한 눈동자.
그것에 세드릭은 아무런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아셀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고민하는 건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세드릭이 딱딱하게 경직된 입매를 풀고 내뱉었다.
“누가 널 피해?”
형식상 질문을 하긴 했지만 세드릭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셀이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라면 원인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로 아셀의 오랜 소꿉친구, 유디트 말이다.
물론 세드릭은 그 분홍 머리 여자애와 직접적으로 어울려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셀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기에 그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세드릭은 문득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아셀, 너 요즘 평민이랑 어울린다며?’
세드릭이 유디트의 존재를 입에 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는 일부러 유디트를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아셀은 자신이 인정한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아셀이 보잘것없는 신분의 아이와 어울린다는 게 도통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없는 셈 치며 그 존재를 잊으려고 했다.
어쨌든 난생처음으로 유디트에 관해 묻자 아셀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유디트를 어떻게 알고 있어?’
‘어머니께서 알려 주시던데. 네가 하인이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고.’
어머니는 아셀이 평민 아이랑 노는 행동을 ‘격 떨어진다’라고 표현했다. 아셀이 왜 그런 평민이랑 어울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덧붙이시기도 했다.
어렸던 세드릭은 그런 어머니의 말이 기분이 나빴다.
자신의 친한 친구가 고작 평민과 어울린다는 사실 하나로 명예가 실추되는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세드릭은 오늘 아셀에게 조언할 셈이었다. 더 이상 그 평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지만 아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딴지를 걸어 왔다.
‘유디트는 하인이 아냐.’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단호한 어조였다. 의외의 반응에 세드릭은 눈을 깜박거렸다.
……하인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던 건가?
하지만 하인인가 아닌가는 지금 이 대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거나 평민이잖아. 앞으로는 그 아이랑 놀지 마.’
‘왜?’
‘왜긴 왜야. 너한테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사실 아셀이 이유를 물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세드릭은 그때 처음으로 아셀의 굳어진 표정을 보았다.
늘 자신의 말에 다정하게 맞장구쳐 주던 아셀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셀이 무표정한 얼굴로, 처음으로 ‘싫다’고 대꾸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정도로 그 평민 계집애가 중요하다는 건가?
하지만 그 이후로도 아셀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 여자애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소중한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대체 어째서?
세드릭은 그 표현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과 유디트가 아셀에게 친구로서 동등하다니.
평민이 어떻게 우리와 같은 동등함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몸속에 흐르는 피부터가 다른데 말이다.
그걸 아셀 페델리안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애써 좋게 포장하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드릭은 그 분홍 머리 평민이 친한 척하며 빌붙어 오는 것엔 아셀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 그렇게 어쭙잖게 틈을 내어 주니까, 그 여자애가 제 주제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여자애도 아셀을 짝사랑하게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그건 그 분홍 머리 여자애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상시 그 애는 항상 따분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셀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에 생기가 깃들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곤 했다.
그 모습을 상기한 세드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여자애가 품고 있는 감정은 아셀이 말하는 ‘우정’과 거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처럼 괜히 입 밖으로 내었다가 혹시라도 둘 사이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유디트에 대한 화제만 나오면 민감하게 구는 아셀이었다.
그런 그에게 괜한 사실을 알려 지금 이상으로 그 여자아이에게 신경을 쏟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에 대한 아셀의 감정이 생각보다 더 무겁다는 걸, 세드릭은 그의 약혼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니, 너 대체 리아나랑은 어떻게 하다 약혼을 한 건데? 언제부터 계획했던 거야?’
둘 사이에 전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사교계 소문에 빠삭한 자신의 어머니까지 몰랐던 소식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만큼 일이 진행되었다니.
세드릭은 아셀에게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뭐라고 더 따지려는 찰나, 아셀이 세드릭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별건 아니고 어머니가 유디트의 혼처를 알아보고 계셨거든.’
……지금 그게 이 약혼이랑 무슨 상관이지?
입만 벙긋거리던 세드릭이 곧 대강의 전후 사정을 추측해 냈다.
아무래도 페델리안 부인은, 언젠가 성사될 아셀의 혼담에 유디트란 아이가 누가 될까 걱정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