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0화
쓸데없는 서론이 너무 길었다. 르데인은 드디어 진정으로 묻고 싶었던 본론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 선배님께서 겪고 계신 그 시련이 뭔가요?”
“……음, 그게 그러니까.”
여전히 한나가 사실을 털어놓기를 망설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르데인을 바라봤다.
“내가 네게 말하더라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르데인은 잠시 멈칫했다.
과연 무슨 얘기이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한나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문득 르데인은 마지막으로 세드릭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자신은 어차피 유디트 선배와 잘 될 가능성이 없다며, 아예 단정하듯이 말했었지.
그때 세드릭의 반응도 그렇고, 유디트 선배의 친구라는 한나의 반응도 묘하게 일치하는 듯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쓰려 왔지만, 결국 궁금증이 앞선 르데인은 용기를 내어 묻고 말았다.
“이렇게 숨기실 정도라면, 설마 유디트 선배님이 사실 이미 다른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인가요?”
본능적으로 여기서 물러선다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곧 들려올 대답을 각오했다.
“……!”
그리고 한나가 보인 반응이 곧 그의 짐작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놀란 듯 치켜 올라간 눈썹, 멍하니 벌어진 입술. 그런 입가를 가리기 위해 기도하듯 모은 두 손.
곧 그녀가 거세게 숨을 들이쉬며 르데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안 거야?”
차마 선배의 반응이 너무 티가 난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르데인이 힘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제 예상이 맞다는 걸 확인받자마자 자꾸 입꼬리와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 반응을 한나도 눈치챘는지 곧 가엾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미안, 많이 충격받았니?”
여전히 르데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제게 질문을 던졌으니 대답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유디트의 진짜 마음이 어떻든 간에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그래서 다시 관계를 쌓아 나가면 된다고.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자꾸 난동을 부려 왔다.
르데인은 날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셔츠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정상인의 맥박 수가 아니었다.
한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창백해진 르데인을 향해 중얼거렸다.
“충격이 큰가 보네. 하긴, 고백도 못 했으니까…….”
당연히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냉혹하기 짝이 없던 그 유디트가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거기에 한나가 연달아 직격탄을 날렸다.
“미안, 네가 유디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너를 도와줄 수가 없어.”
“……왜죠? 제게 일말의 가능성도 없기 때문인가요?”
“그런 게 아냐, 단지 유디트의 마음이 그만큼 한결같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에 르데인의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에 세드릭이 했던 말과 한나의 말이 묘하게 겹쳐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야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만한 사람이 라이벌이니까.’
사실 그 말을 들은 르데인은 그 ‘라이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세드릭의 뒤를 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성격이 나쁘기로 유명해서 그런지 세드릭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래서 딱히 특정할 만한 인물은 찾지 못했다.
별로 소득이 없던 그때, 그는 특이한 광경 하나를 목격하고 말았다.
바로 파티 홀에서 리모델링 상황을 점검하던 아셀 페델리안의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셀 페델리안은 그것을 충분히 피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에 르데인이 숨어서 엿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사고를 막기 위해 막 달려 나가려던 찰나.
때마침 다행히 아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세드릭이 마법으로 그를 날려 보냈고, 덕분에 그는 다행히 큰 사고를 모면한 듯 보였다.
만약 그때 세드릭이 곁에 없었더라면 어찌나 큰 변을 당했을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어쨌든 여기까지가 르데인이 목격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곧, 르데인은 세드릭이 중얼거리는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엿듣게 된다.
‘대체 걔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흘려넘겼는데, 문득 그때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혹시, 그때 세드릭이 말한 ‘걔’란 유디트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유디트와 아셀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 차이 때문에 서로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셀은 유디트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는 걸 지켜보며 큰 시름을 앓고 있었던 거라면.
그래서 넋을 빼놓고 다녔기에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피하지 못했던 거라면?
그렇게 가정하면 모두 맞아떨어진다.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면 자신에게 가능성이 희박한 건 사실이니까.
드디어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세드릭이 말했던 그 ‘라이벌’의 정체는 바로 아셀 페델리안이었다.
* * *
역시 말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괜히 입방정을 떨어 댄 대가인가?
한나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벌린 채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르데인을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제가 이 어린 친구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짓을 한 게 아닐까.
근 몇 년간 이렇게까지 곤란하고 어색한 상황에 부닥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때마침 르데인이 생각을 마쳤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한나가 그 틈을 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짝사랑을 접을 생각은…….”
“아직 고백도 못 했는데 벌써 접을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없겠지.”
다시 고개를 든 르데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눈빛이었다.
회복 속도가 참 빠르기도 하지.
유디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체이스를 사랑하고, 르데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유디트를 사랑하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마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얽히고설킨 삼각관계였다.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옆에 계셨다면, 이 주제에 대해 밤을 새워 가며 수다를 떨 수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까웠다.
물론 소설이 아닌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니까 사생활을 존중해서라도 사감 선생님께는 알리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르데인에겐 유디트의 짝사랑 상대가 누군지는 끝까지 밝히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르데인이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둘 사이를 훼방 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가엾은 유디트는 아마…….
한나는 르데인의 처량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늘이 높아진 것을 보니, 벌써 계절이 바뀌어 간단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곧 졸업을 하고 나면, 유디트는 곧장 원하는 대로 체이스와 결혼을 하게 될 테지…….
그런데 문득, 유디트에게 약혼자로 체이스를 추천해 주었던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나는 체이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러니 유디트의 약혼자인 그에게 지킬 의리 따위도 없었다.
더욱이, 체이스가 ‘약혼은 하지만 널 사랑하진 않을 거다’라며 유디트에게 막말했던 사실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만약 유디트가 그 오만불손한 녀석과 결혼하더라도 자신은 마음 깊이 그들을 축하할 수 있을까?
앞으로 유디트가 겪을 마음고생이 그리 훤한데?
차라리 그런 나쁜 체이스보다는 지고지순한 마음을 품고 있는 르데인이 낫지 않을까?
적어도 르데인은 유디트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건 틀림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르데인은 정체 모를 황금색 포장지를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선물이었다. 유디트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겠지.
한나는 문득 얼마 전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을 떠올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는 것, 둘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행복할까? 라는 주제였다.
한나는 확신의 후자였다. 전자와 연애를 해 봤자 마음고생만 할 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자와 후자가 치열하게 대립했고, 덕분에 꽤 접전을 이루는 듯 보였다.
물론 유디트에게 어느 쪽을 고를 것인지 의견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답은 뻔했다.
“하아…….”
괜찮은 척, 태연한 척하며 미소 짓던 유디트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한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체이스 이 나쁜 놈.
길 가다가 마주치면 뒤에서 몰래 돌멩이라도 던져 볼까? 아니면 자주 걸어 다니는 복도에 바나나 껍질이라도…….
그런데 그 순간, 한나의 시야에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은발이 들어왔다.
“으아악!”
남몰래 체이스를 골탕 먹일 계획을 짜는 와중, 갑자기 당사자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다니!
한나는 놀란 나머지 뒤로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휘청거리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턱.
날렵하게 손을 뻗어 온 체이스가 한나의 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