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1화
팔을 붙잡은 손은 단단했기에, 한나는 넘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친절을 베풀어 주면서도 체이스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괜찮냐는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었다.
“……고마워.”
어쩔 수 없이 고맙다는 말을 건넸음에도 체이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한나를 귀찮다는 듯이 잠시 바라보다가 볼일은 끝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한나는 그런 체이스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래, 평소에는 무심하고 쌀쌀맞기 그지없지만, 가끔 베풀어 주는 이런 작은 호의들에 유디트의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몰라.
시종일관 착한 사람이 한 번의 선행을 하는 것보단 매번 나쁜 짓만 하던 놈이 한 번의 선행을 하는 게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아주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표본이었다.
체이스, 이 나쁜 놈!
한나는 체이스가 자신을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더욱 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체이스 선배님?”
바로 그때, 아까까지만 해도 풀 죽어 있던 르데인이 체이스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둘이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체이스가 불쑥 이곳에 나타난 거로구나.
하지만 한나의 그러한 추측은 곧 이어진 둘의 대화로 인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선배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쪽은 여자 기숙사로 향하는 길목인데.”
“당연히 유디트를 만나기 위해서지. 유디트에게 좀 전해 줄 게 있어서.”
그제야 한나는 체이스의 손에 들린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기시감을 느꼈다.
한나가 저런 휘황찬란한 포장지를 마주할 일은 잘 없었다. 그런데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건…….
“……선배님. 설마 그 ‘줄 것’이라는 게, 졸리 제과점의 한정판 쿠키인가요?”
“그래, 이걸 구하느라 꽤 고생했어.”
체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거에 관심이 많나 보다? 어떻게 알았어?”
“……그야 저도 줄을 서서 구해 왔으니까요.”
르데인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들어 올렸다.
“선배님과 마찬가지로, 유디트 선배님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서요.”
한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랬다. 르데인과 체이스는 똑같은 선물을 준비해 온 거였다. 포장지마저 똑같은 걸 보니 확실했다.
라이벌들이 한날한시에 잇따라 같은 선물을 들고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이런 기막힌 상황이 다 있담?
체이스의 매끈한 미간에 실금이 갔다. 르데인은 그런 체이스에 비해 여유롭게 웃어 보이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즐거운 심정일 리는 없었다.
“네가 어떻게 이걸 알고 구해 온 거지?”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선배님이 어떻게 이 쿠키를 찾아내셨나 하고요.”
“나는 장장 몇 시간을 기다렸어. 이거 하날 사기 위해서.”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분위기가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둘 중 한 명이 양보한다면 좋았겠지만, 당연히 둘 다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과연 이 기막힌 관계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나는 구경꾼처럼 상황을 관망하기 시작했다.
르데인이 쿠키 봉지를 꼬옥 껴안으며 순진하게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혹 출입증은 받으셨어요? 남자가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사감 선생님께 출입증을 전해 받는 게 우선이라서요.”
체이스가 혀를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셨나요? 그럼 이렇게라도 알게 되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르데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입매를 누그러뜨리며 기쁜 듯 내뱉었다.
“저는 체이스 선배님이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막무가내로 여자 기숙사에 몰래 침입했다가 곤란한 일을 겪으시는 건 원치 않거든요.”
유들유들한 어조였지만,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이스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아마 체이스가 지금 발걸음을 돌려 사감실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여자 기숙사 출입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감 선생님에게 출입증을 얻어 내는 건 특정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체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유디트와 만날 생각이었는데?”
“저는 한나 선배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어요.”
체이스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럼 나도 부탁 좀 하자.”
“……네?”
“거기 너, 한나라고 했던가? 나도 유디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만나게 해 준다면 고맙겠어.”
곧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대체 언제 봤다고 저렇게 명령조지?
싹퉁바가지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무례할 줄은 몰랐다.
더욱이 매사 유디트를 저런 식으로 대할 거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결론을 내린 한나는 곧 팔짱을 끼며, 딱딱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럼 왜 유디트를 방문했으며, 선물을 건네서 뭘 할 건지 먼저 목적을 알려 줘.”
“뭐?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아가든가.”
“…….”
그러기는 싫었는지, 잠시 입을 꾹 다물던 체이스가 마지못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지난번에 유디트가 날 도와 같이 벌 청소를 해 줬거든. 거기에 대한 감사 표시야.”
체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마 유디트가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유디트가 너랑 같이 벌 청소를 해줬다고? 너 혹시 착한 유디트를 네 편의대로 이용한 거야?”
“……무슨 말이야? 유디트는 내 약혼녀이니 나를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하?”
그 말에 더더욱 한나가 눈썹을 사납게 치켜올렸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유디트가 직접 나를 위해 목이 따가운 먼지 구덩이 속을 자진해서 들어와 준 거라고.”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곧 손을 들어 자신의 입매를 가렸다. 하지만 입은 가렸어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는 감추지 못했다.
시원하게 탁 트인 눈매는 웃지 않을 땐 조금 서늘해 보였지만 웃을 때는 더없이 따뜻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반전 매력을 가졌다며, 진짜 잘생겼다며 호들갑을 떨어 대고 감탄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마치 그 모습이 유디트의 마음을 이용해 놓고 대놓고 즐거워하는 듯 보였기에.
한나는 버럭 외쳤다.
“체이스! 너 정말 못된 애구나?”
“뭐라고?”
“다 들었어! 너 유디트와의 첫 만남 때, 약혼은 하겠지만 너를 사랑할 생각은 없다고 그랬었다며!”
“그, 그건…….”
“그래 놓고 네가 좋을 때만 약혼녀야?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문이 턱 막혔어.”
말문이 막혔다는 것치곤 한나는 논리정연하게 말을 끝마친 뒤였다. 곧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체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나는 머리끝까지 혈압이 올랐다.
“너 때문에 유디트가 얼마나…….”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해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체이스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예상은 했다지만 체이스는 유디트를 전혀 소중하게 대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디트가 체이스와 함께 벌 청소를 해 줬다는 건데.
체이스는 그걸 유디트한테 미안해해도 모자랄망정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다니.
저런 사람과 약혼한다고? 그렇다면 유디트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아픔과 시련을 겪어야 할까?
그런데 체이스는 어딘가 멍하니 눈만 끔벅거리다가, 곧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 때문에 유디트가 얼마나……?”
마치 깨끗한 물에 붉은색 물감을 한 방울 툭 떨어뜨린 듯, 그의 하얀 뺨 위로 붉은 기운이 사르르 번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유디트를 사랑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 때문에, 유디트가 상처받기라도 했어?”
“뭐어?”
이 상황에서까지 저런 말을 한 것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니. 체이스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임이 틀림없다.
“그런 악독한 말을 듣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는데 유디트의 마음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다 곧 자신이 과민 반응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나가 아차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일로 유디트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는 곤란했다.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그녀가 덧붙이듯이 말했다.
“물론 겉으로는 티를 전혀 안 내긴 했지. 하지만 약혼할 상대가 그런 말을 했는데 힘들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랬구나. 유디트가 워낙 태연해서 나도 눈치채지 못했어.”
체이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이 저 멀리 어딘가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그래 놓고 내 앞에서는 그렇게 멀쩡한 척했던 거였어?”
한나는 눈을 꾹 감았다. 체이스의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유디트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무심하고 잔인한 남자를 혼자 짝사랑하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