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2화
“왜 일부러 감춘 거지? 혹시 내가 죄책감이라도 가질까 봐 걱정한 건가?”
혼자 뭔가를 번뇌하며 중얼거리는 체이스는 여전히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얼굴은 대체 왜 붉히고 있는 걸까?
얼굴만 떼어 놓고 본다면 상황에 걸맞지 않게 마치 수줍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나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매섭게 호통쳤다.
“그러니 너도 인간이라면, 유디트에게 죄책감을 좀 가져 봐!”
그때였다. 체이스가 곧장 한나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큼, 네 말을 들어 보니 내가 유디트에게 심한 짓을 한 것 같아. 지금 당장 사과해야겠어.”
“……으응? 사과한다고?”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식간에 한나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 * *
아셀이 잠든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던 유디트는 가까스로 회복실에서 빠져나왔다.
정작 그와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건만, 벌써 온몸의 힘을 모두 소진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힘없는 걸음걸이로 여자 기숙사로 향하던 유디트의 눈앞에, 곧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황당함에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들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체이스와 르데인.
저 두 사람은 남자애들이면서 왜 여자 기숙사 앞에 서 있는 거람, 그것도 제 룸메이트인 한나와 나란히?
유디트는 멀찍이 서서 투닥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 문득 고개를 돌린 한나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유디트!”
유디트는 차디찬 얼음을 씹어먹은 것처럼 아려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그러니까.”
한나에게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랬다.
체이스와 르데인이 유디트를 만나기 위해 기숙사로 찾아왔다는 것.
그런데 오늘따라 유디트가 귀가하는 게 늦어져, 한나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체이스와 르데인은 왜 굳이 유디트를 찾아온 것일까?
사실 유디트는 르데인이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에 일부러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까부터 르데인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무시하고 있었다.
참 난감했다.
유디트는 우선 덜 난감한 쪽인 체이스부터 대화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다.
“체이스, 너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으면 아까 수업 때 하지 그랬어.”
그러자 체이스가 머뭇거리다, 손에 든 것을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황금빛의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둘러싸인 상자였다. 받을 때까지 내밀고 있을 것 같았기에 유디트는 우선 받아 들었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줄 서는 게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네가 저번에 나랑 같이 벌 청소를 해 줬잖아, 이건 그 보답이야. 그리고…….”
체이스가 잠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은발 사이에 귀가 새빨개진 것이 보였다.
그때 그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내가 미안해.”
뜬금없는 사과에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내가 옛날에 너한테 심한 말을 했었잖아. 그거 사과하려고.”
“심한 말?”
유디트는 체이스와의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시치미 떼지 않아도 돼. 지금껏 내가 네게 했던 행동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체이스와의 관계가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마치, 아무리 자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던 그때 그 시절로…….
대체 무슨 일로 또 저런 착각을 하게 된 거지?
그때 유디트의 눈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후, 일단 알겠어. 선물은 고맙게 잘 받을게.”
유디트가 선물을 받아 든 뒤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또 다른 상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르데인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유디트 선배님.”
그는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한 채, 유디트를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르데인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르데인도 자신이 껄끄럽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일 텐데.
왜 르데인은 굳이 유디트를 찾아온 걸까?
지금 르데인은 제게 건방지게 군 평민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기 위해서 찾아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유디트의 눈에 비치는 그는 매우 저자세였다. 마치 바닥에 배를 납작하게 붙이고 엎드린 강아지 같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르데인은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한나와 체이스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혹시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실 수 있나요?”
“뭐? 내가 왜-.”
“알겠어.”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데인을 향해 ‘힘내!’라고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후 체이스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체이스는 버티고 서 있으려고 했지만, 전혀 말리지 않는 유디트의 태도를 보곤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했다.
어느덧 둘 사이엔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그때 유디트에게 르데인이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조금 전 체이스에게 받았던 것과 똑같은 선물이었다.
“쿠키예요. 제 사죄하는 마음을 작게라도 표현하기 위해서 사 왔어요.”
유디트가 여전히 눈만 끔벅거리며 황금색 포장을 보고 있자 르데인이 움찔하곤 덧붙였다.
“설마 체이스 선배님이 저랑 똑같은 선물을 준비해 오실 줄은 몰랐어요. 겹치게 되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고마워.”
선물로 주는 물건을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우선 그가 건넨 것도 받아 들었다.
그러자 르데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유디트는 눈동자만 굴리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르데샤가 전달해 주지 않았어? 요점 정리 노트.”
아무리 생각해도 르데인이 찾아올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물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르데인은 웬일로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것에 관해서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처음에는 선배님께 불건전한 의도로 접근한 건 맞아요……!”
그가 강아지 같은 눈을 들어 올리며 유디트를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로지에나 가문의 일원인 누나가, 선배 때문에 한 번도 일등을 못 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작게나마 누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만…… 못된 생각을 하고 말았어요.”
말을 마친 르데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편 그의 속마음을 전해 들은 유디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요점 정리 노트가 목적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르데샤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니.
여전히 자신을 속인 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매를 생각하는 마음은 참 애틋하다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선배님을 방해하려고 했는데, 계속 함께 지내다 보니 점점 선배님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게 되었고…….”
거기까지 말한 르데인이 흘낏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말을 끝맺었다.
“이성적으로도…… 좋아하게 되고 말았어요.”
“뭐?”
이어지는 말에 유디트는 깜짝 놀라 인상을 찡그렸다. 지난번에 고백이 설마 거짓이 아니었단 말야?
“……저도 정확히 언제부터 선배님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더니 르데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젖은 눈매를 감추었다. 유디트는 가만히 눈만 끔벅거리다 겨우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보충반에 참석하지 않았던 건 뭐였어?”
“……그게, 왠지 선배님 얼굴을 보기가 창피해서 도무지 보충반 수업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
“이런 저에게 선배님께서 실망하고 기분 나빠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선배님만 괜찮다면 좋은 선후배 사이로라도 남고 싶어서…… 기분 나쁘실 것 알지만 이렇게 찾아오고 말았어요.”
“…….”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
유디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말했다.
“일단 난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 네 마음엔 응해 줄 수 없지만……. 이렇게 용기 내서 사과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
곧 유디트가 그를 경계하던 눈빛을 지우고 예전 같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너는 르데샤의 동생인데다 그간 같이 지내 온 정이 있어서 내심 이렇게 된 게 나도 좀 불편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너와 풀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야.”
사실 그와 지내던 순간들에 아무런 정도 쌓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르데인은 매번 제 수업에 성의를 다했고,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며 자신을 웃겨 주기도 했다.
비록 예전에는 그의 저의를 알 수 없어 곁에 두기가 꺼려졌다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밝혀 왔으니 쌓인 껄끄러움도 금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