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3화
유디트가 사이를 회복한 것에 작게 기뻐하고 있을 때, 잠시 침묵하던 르데인이 입술을 뗐다.
“혹시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면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뭔데?”
“혹시 저를 거절하신 건, 약혼자가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미 선배께서 따로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인가요?”
그 말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도로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디트는 곧장 아니라고 말하려 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르데인이 먼저 선수 쳐서 말했다.
“죄송해요.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일에 대해 자연히 민감해지다 보니까, 눈으로 선배님의 뒤꽁무니만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그런가. 하긴 자신도 아셀보다도 그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세드릭에게 그 마음을 들키기도 했는데, 충분히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아셀을 좋아하는 것쯤은 들켜도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자신이 체이스와 곧 결혼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곧 아셀에 대한 마음도 완전히 접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었으니까.
그때 르데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배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무척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아셀 선배님을 짝사랑하고 계시는데 약혼은 다른 사람과 하시다니…….”
그가 걱정 어린 눈으로 유디트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부디 선배님께서는 저처럼 힘든 일은 겪으시지 않길 바랄게요. 진심이에요.”
“……고마워.”
그의 말을 들으니 다시금 아셀과 여름 파티에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디트는 르데인에게 다음 보충 수업에서 만나자며 배웅해 준 뒤,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돌아보았다.
마치 제 기분처럼 어둠이 내려앉은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려 왔다.
* * *
체이스는 유디트에게 간단한 제안만 하고 갈 생각이었다.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한나에게 이끌려 기숙사 담벼락을 막 벗어났을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디트에게 그동안 신세 진 데에 대한 보답으로 쿠키를 선물하긴 했지만, 정작 내 잘못에 대한 보상은 해 주질 못했네.’
한나에게서 얘기를 전해 듣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유디트의 표정이 왠지 떨떠름해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풀어 줘야겠다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곧 그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유디트가 달콤한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주말에 함께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놀러 가자고 하면 어떨까.’
이에 체이스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아까 유디트가 있었던 자리로 향했다.
멀찍이서 아직도 르데인과 대화를 나누는 유디트의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체이스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하여튼, 저 자식…….’
하필이면 같은 날 방문을 한 것부터 시작해서, 같은 선물을 준비해 온 것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체이스는 저렇게 재수가 없는 녀석은 처음이라며 혼자 투덜거리다가, 모퉁이 너머에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곧장 말을 걸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사위가 고요해서인지, 아니면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컸기 때문인지.
곧 르데인에게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무척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선배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무척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아셀 선배님을 짝사랑하고 계시는데 약혼은 다른 사람과 하시다니…….”
일반인보다 오감이 발달한 체이스였으니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모퉁이 너머의 두 사람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유디트는 르데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라도 한 양.
왜일까, 그 순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곧 체이스는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교복이 더러워지는 것쯤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누군가 지나간다면 이런 제 형편없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놀랄 만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아셀 선배님을 짝사랑하고 계시는데 약혼은 다른 사람과 하시다니…….’
귓가에서 르데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때, 다시 유디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보충 수업에서 만나자며 르데인을 배웅하는 목소리였다.
곧 정신이 든 체이스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르데인이 저벅저벅 걸어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마자 그의 옷소매를 재빨리 붙잡았다.
르데인은 기겁하듯이 놀라면서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상대가 체이스란 걸 알고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으-.”
“쉿.”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재빠른 체이스의 손놀림에 의해 입이 틀어막히는 것이 먼저였다.
그에 르데인이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냐며 눈으로 묻자, 체이스가 드물게 말이 없더니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유디트와 나눴던 대화…….”
이내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덧붙이듯 말했다.
“뭐였는지 나한테도 알려 줘.”
* * *
유디트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책상 위의 황금색 쿠키 상자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서로 똑같이 생겼지만 각기 다른 사람이 선물해 준 쿠키.
그녀는 팔을 뻗어 자신의 쪽에 더 가까이 놓여 있는 상자를 들고 와 포장지를 뜯어 보았다. 금세 달콤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유디트는 그 안에서 가장 먹음직스럽게 생긴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 안에 기분 좋게 퍼진 달콤함은 잠시 산책하러 나갔던 한나가 돌아오고 나서야 사라졌다.
방에 들어온 한나는 그녀의 얼굴을 요목조목 살피더니 물었다.
“르데인은 나갔어?”
“응.”
간단히 대꾸하곤 유디트가 쿠키를 내밀었다. 한나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양이 많으니 좀 먹어 달라는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쿠키를 야금거리며 먹던 한나가 별안간 물었다.
“혹시 르데인이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봐도 돼?”
유디트가 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한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
한나가 르데인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은 이유는 대충이지만 짐작이 갔다.
한나와 같이 방을 쓰는 4년 동안 한나의 친구들은 이곳에 놀러 왔지만, 유디트의 친구들은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유디트에겐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존재가 한나 한 명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처럼 별안간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에 대해 궁금해할 만도 하겠지.
물론 이제 와 르데인은 유디트와 화해하고 정말 친구가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별 대화는 안 했어. 르데인이 내게 조금 실수한 게 있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아 준 것뿐이야.”
“아아, 그래? 좋게 끝났나 보네?”
“……그런 것 같아.”
대화만 놓고 본다면 좋게 끝났어야 하는데, 르데인에게 아셀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십 년 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걸 최근 들어 연달아 들키게 되다니……. 무슨 마라도 낀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유디트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한나는 왠지 그녀의 대답에 기쁜 듯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아! 하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숙사에 늦게 들어왔던 거야?”
그 말에 유디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며,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별거 아냐. 그저 잠깐…… 아셀의 병문안을 다녀왔어.”
고요히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던 아셀의 얼굴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디트는 상념을 털어 버리기 위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아아, 그래? 병문안을 다녀오느라 늦었던 거구나. 듣기로는 아셀이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던데. 상태는 어때, 괜찮아 보였어?”
“음…….”
유디트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자기가 찾아갔을 즈음에 아셀이 정신을 차렸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왔다고?
하지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자세히 털어놓고 싶진 않았기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기로 결심했다.
“맞아. 아직 의식이 없더라. 그냥 잠든 모습만 보다가 나왔어.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릴 거래.”
“그렇구나, 하루빨리 의식을 되찾아야 할 텐데.”
한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양심이 따끔하게 찔려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나가 다른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나도 건너서 들은 이야기인데, 학생회 애들이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하더라구. 아셀이 없으니까 계획 세워 뒀던 게 모두 엉망이 되었다나 봐.”
“그래?”
“응, 이러다가 여름 파티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뒤로 밀릴지도 모른다는데? 말만 여름 파티지 가을에 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구.”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아셀이 참 많은 역할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맥없이 기절한 거겠지.
아셀 한 명이 없으니까 아카데미 행사 계획에 차질이 생기다니.
“학생회에서 아셀을 제외하고 행사를 진행시키려 해도, 대부분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셀뿐이래. 그래서 준비가 많이 느려질 것 같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