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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60화 (6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0화

한탄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삼켜 냈다. 감정에 휘말리는 것은 나중 일이다.

지금은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체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해 보기로 했다.

“착각일 거야.”

“…….”

“내가 너를 위로해 줘서, 잠시 착각을-.”

말을 하다가 멈췄다. 불현듯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착각할 수 있어, 유디트.’

아셀과 마찬가지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이것을 흉내 내는 것조차도 아셀과 똑같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셀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의미 없는 다정함으로 남을 착각하게 만들고, 혼자 기대하도록 만들지 않기 위해선.

유디트는 헛된 희망을 주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지만 기어코 말을 끝맺고 말았다.

“너를 사랑하지 않아.”

“…….”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으나 견뎌 냈다.

순간적으로 체이스의 모습 위로 자신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아셀에게 숨기고 있던 마음을 겨우 꺼내 보였던 지난날의 자신이.

그래서 말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체이스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마지막까지 생각했던 말을 모두 내뱉을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마. 네 마음은 절대 보답받을 수 없을 테니까.”

차라리 자신이 아셀에게 들었더라면 좋았을 말이었다.

그랬다면 일찍이 그에 대한 마음을 단념해, 지금 이렇게 체이스를 괴롭게 만들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 잘한 거야.

유디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영부영 넘기다간 체이스가 더욱 괴로워할 테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끊어 내는 게 맞는 거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재빨리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막상 굳게 마음을 먹었다지만 상처받은 체이스의 표정을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붙잡으면 어떡하나 긴장하기도 했지만, 이번만은 체이스도 붙잡지 않았다.

결국 도망쳤다.

자신은 나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과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자신과 같은 감정을 말하는 체이스의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 * *

주말이 끝나자마자 카렐 교수는 연구실로 한 학생을 불러들였다. 다름 아닌 그의 수습 교수 후보인 유디트였다.

그녀를 불러낸 이유는 간단했다. 미리 자신이 보충 수업에 참관할 거란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카렐 교수는 이를 악물며 일전에 점성술 교수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하여튼 둘 사이가 이렇게 좋은데, 만약 결혼을 하면 유디트가 수습 교수 일을 할 수 있겠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꼭 둘 사이를 막아 내고 말 것이다.

똑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연구실 문이 열렸다. 곧 문턱 너머에서 유디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렐 교수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반겨 주었다.

“유디트, 왔느냐.”

유디트는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였다.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닌데 왜 저렇게 지쳐 보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그 망할 놈의 벌 청소를 도와주느라 큰 힘을 소모했기 때문은 아니겠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카렐 교수는 더욱 언짢아졌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쨌든 그녀는 카렐 교수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렐 교수는 그녀를 편안한 소파 자리에 앉히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네가 보충반을 맡아 수업을 한 지도 꽤 지났구나.”

“그러게요.”

“혹시 그동안 보충반 학생들과 친분도 많이 쌓은 게냐?”

마음 같아선 체이스의 벌 청소를 도와줄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거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체면이 있으니 애써 돌려 물은 것이다.

눈을 끔벅거리던 유디트가 이내 대답했다.

“아, 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는데 몇 번 만나다 보니 몇몇 친구들과는 종종 점심도 함께 먹을 정도로 친해졌어요.”

“점심도 함께 먹을 정도라고?”

“네.”

끄응, 카렐 교수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아무래도 더 친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체이스를 유디트의 곁에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할 것만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카렐 교수가 본론을 내뱉었다.

“사실 내가 오늘 너를 연구실로 부른 이유는, 그동안의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아, 성과요? 안 그래도 최근에 본 쪽지 시험에서-.”

“아니, 전해 듣는 것 말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구나.”

“……그 말씀은……?”

유디트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카렐 교수는 네 짐작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음 주 보충반에 참관하도록 하마. 네가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직접 한번 살펴야겠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양, 유디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 *

카렐 교수의 참관 수업 날.

유디트는 단단히 수업 준비를 해 두기 위해 평소보다 더 일찍 반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늘은 교수님께서 직접 참관하시는 날이니 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수업에 참여해야만 했다.

다행히 리아나는 보충반에 들러 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텅 빈 교실에 도착하니 자신보다 더 일찍 자리에 착석해 있는 리아나가 보였다.

유디트는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리아나. 보충 수업에 참석해 줘서 고마워.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아니야, 나도 괜히 카렐 교수님에게 눈도장이 찍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회계학 수석의 수업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구나. 별건 없지만 기대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을 하며 유디트는 은근슬쩍 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왜냐하면 유디트는 사실 그녀가 아셀과 여름 파티에 참석하는 것에 관해서 물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리아나는 그것에 대해선 전혀 내색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 수업 열심히 들을 테니까 비법 많이 알려 주기다?”

“……당연하지.”

대답은 반 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리아나는 잘 부탁한다며 유디트의 두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떠한 악감정도, 거리낌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리아나에게 나는 견제 상대조차 되지 못하는 걸까.

리아나는 유디트를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데 유디트만 리아나를 의식하고 있는 이 상황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끝으로 학생들이 하나, 둘 교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교실은 불참한 사람 없이 가득 찼고, 마지막으로 카렐 교수 또한 등장하였다.

그렇게 참관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오늘 수업할 내용은…….”

카렐 교수는 수업을 지켜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우선 그는 수업 내용보다는, 유디트와 체이스의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지에 대해 조금 관심을 두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유디트가 체이스를 바라보는 눈빛이라든가, 대하는 행동이 참 사무적이기 그지없었다.

또한 체이스는 오늘이 수업 참관일이란 걸 잊은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나눠 준 유인물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유디트 쪽으론 시선 한 톨 주지 않았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관계가 더 데면데면해 보였다.

왜 저렇게 어색해 보이지? 꼭 싸운 것처럼 말이다.

카렐 교수는 의아함에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곧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상태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그들의 약혼도 금방 무산될 테고, 그러면 유디트는 순조롭게 수습 교수의 길을 밟게 될 테니.

그나저나 저렇게 서먹해서야 결혼은 이미 물 건너갔겠구먼.

마음이 편해진 카렐 교수는 그제야 유디트의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우는 것은 잘하지만 타인을 가르치는 것은 못 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유디트는 그 외의 것까지 재능을 갖춘 학생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와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답변을 해 나갔다.

카렐 교수는 예상보다 더 뛰어난 유디트의 수업 실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군.

자신의 안목에 칭찬을 날렸다.

그때 유디트가 손뼉을 짝 쳤다. 잠시 집중이 흐트러졌던 학생들의 이목을 잡아끈 것이다.

“자, 다들 한번 들어 봐.”

큼,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이내 조잘거리며 회계학의 중요한 공식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창피함까지 무릅쓰다니 정말 대단했다.

저 열정을 보아하니 유디트 또한 보충반 수업을 진행하면서 나름의 보람을 느끼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수업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대로만 간다면, 체이스와의 내기에서 이기는 건 당연히 그가 될 것이다.

카렐 교수는 강한 확신을 하며 미소 지었다.

* * *

유디트에게 있어 지금 무엇보다 곤란한 건 약혼자인 체이스와의 관계였다.

지난번 그렇게 매정하게 말했으니 체이스가 저와의 약혼 관계를 더 이어 가길 원치 않는대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적으로 아셀을 잊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러니 체이스가 원한다면 파혼해 주어야 해.

그런 각오를 하며 잔뜩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며칠 뒤 다시 얼굴을 마주친 그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디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오늘은 수업 들으러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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