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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61화 (6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1화

‘졸업은 해야 하니까.’

체이스가 간단히 답해 주었다.

그는 전처럼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진 않았지만,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는 유디트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칠판만 응시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본 얼굴에는 지루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심했다. 체이스가 유디트의 존재를 지워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면 자신과 똑같은 아픔을 겪진 않을 테니까.

아셀처럼 잔인한 사람이 되진 않아서 다행이야.

역시 냉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유디트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 수업이 끝난 후, 체이스가 유디트를 불렀다.

‘유디트.’

유디트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흐트러졌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잠깐 걸을래?’

체이스는 옆에 있던 르데샤를 힐끗 보곤 덧붙였다.

‘둘이서.’

체이스는 지금 속으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화를 내려고 단둘이서 걷자고 제안한 걸까.

그래서 순순히 따라나섰다. 원망이든 화든, 체이스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심산이었다.

새 지저귐조차 없는 고요한 정원.

비록 유디트는 죄를 지어 잡혀가는 죄수와 다름없는 처지일지라도 가을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을 느끼며 체이스와 유디트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생기를 잃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때였다.

유디트는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시간만 끌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매도 차라리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그녀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나를 원망해도 괜찮아.’

체이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발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바스락, 체이스의 발밑에서 나뭇잎이 짓밟히는 소리만 대답처럼 들려왔다.

왜 아무 말이 없을까. 유디트의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냥 내 말을 무시하려는 걸까.

‘나한테 화를 내려고 부른 거 아니야? 나는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해.’

‘…….’

‘정략결혼을 결심할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일이니까.’

분명 체이스가 주저하면서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하기 망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곁에서 지켜본 체이스는 알고 보면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은 못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속엔 원망이 한가득 차올랐어도 그걸 내색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이스가 답했다.

‘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

‘참지 않아도 돼. 나는…….’

‘참는 게 아니라 화가 안 나.’

체이스와 유디트는 항상 나란히 걸었다. 하지만 지금 체이스는 유디트의 몇 발자국 앞에서 걷고 있다.

그렇기에 고개를 들어 체이스를 바라보아도 그의 뒷모습만 보일 뿐 표정을 볼 순 없었다.

‘나는 너한테 화를 낼 수 없어, 유디트.’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저 태연하고 평온했다. 지금 하는 말들이 정말 진심이라 믿어질 만큼.

‘그럼, 왜 나를 부른 거야?’

자신의 말에 체이스가 앞발로 흙바닥을 짓이기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잠깐 망설이던 그가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서.’

‘……?’

유디트는 가만히 선 채로,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지 곰곰이 유추해 보았다.

아무리 관대한 체이스라도 제 약혼자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게 아주 달갑지만은 않을 텐데.

설마 관계를 이만 끝내자고 제안하려는 거려나.

만약 그런 거라면 망설이지 않고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있을 때였다.

‘지난번에 네가 우리는 정략적인 관계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었잖아.’

‘…….’

‘서로를 이용할 목적으로 붙어 있는 것뿐이라고. 기억나?’

‘……응.’

‘그래서 묻겠는데.’

체이스가 슬쩍 고개를 들자 그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눈에 담겼다.

‘지금까지의 난, 네 약혼자로서 쓸모없었어?’

‘……그건 아니야.’

오히려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자신에게 해가 된 적은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아셀과 부딪히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고, 지내다 보니 성격이 소탈하고 편해서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목적에 체이스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체이스가 모든 걸 알게 된 지금,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털어놓게 된 지금.

그에게 전과 같은 역할을 바라는 건 역시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관계는 이대로도 문제 없지 않을까.’

‘……뭐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넌 이 약혼이 필요하고, 난 너를 좋아해. 날 네 곁에 이대로 있을 수 있게 해 준다면 바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

너에게만 너무 손해이지 않아?

유디트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려던 말을 겨우 삼켰다. 하지만 말을 잇는 체이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튼 내 용건은 이거 하나뿐이야. 전과 다름없이 지내자는 것.’

‘…….’

‘오늘처럼 내가 괜찮은지 괜히 전전긍긍하며 신경 쓰지 말고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

말을 마친 체이스가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다시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말이야, 체이스. 너도 나와 같은 걸까?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파도가 널 휩쓸고 가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무뎌진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태연한 얼굴로 그런 말들을 할 수가 있어.

그렇게 모진 말들을 쏟아 냈는데 나에게 화 한번 내지 않을 수가 있어.

체이스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감정을 애써 숨기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느 샌가부터 그는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있다. 아픔과 상처를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내가 그를 망가뜨려 버린 걸까.

상처를 받는 것엔 나름대로 익숙했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엔 익숙하지 못했다.

햇살 속에 눈부신 은발을 바라보았다. 견고히 서 있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체이스, 아니야…….’

내뱉는 목소리가 최대한 담담하게 들리길 바라며 마저 이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아.’

* * *

학생회장 아셀 페델리안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몸을 회복해 간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에 따라 여름 파티도 다시 순차적으로 준비되었다.

파티의 설렘으로 한나는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유디트, 이것 봐.”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유디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한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소식지 일부분을 읽어 보았다.

“무알코올 칵테일 바?”

“응, 재밌겠지?”

유디트는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한나의 시선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적당히 호응해 주며, 재미있겠다는 듯 함께 소식지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읽는 내내 어떤 설렘도 들지 않았고,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기만 했다.

시험공부에 마저 집중이라도 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체이스를 봤을 때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붉게 충혈된 두 눈. 분명 자신과 있었던 일로 내내 심적으로 시달렸었던 거겠지.

결국 그날의 대화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파혼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사는 전달했지만, 체이스가 아무런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 약혼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몇 번이나 파혼 의사를 밝히려, 주선인인 페델리안 부인에게 몇 번이고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지만 번번이 망설이느라 편지를 부치진 못했다.

내가 이제 와 약혼을 깨겠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하실까. 놀라실까, 아니면 실망하실까, 그것도 아니면 내게 노하실까.

만약 그러면 잘 설명을 드려야지. 체이스만 아니면, 어떤 상대든 상관없다고……. 그 녀석만 내 상황에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이 모든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기엔, 이미 체이스에게 너무 많은 정이 들어 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 다른 약혼 상대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니 그것도 염치가 없는 듯했다.

결국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감 없이, 어느새 여름 파티 날이 도래하였다.

여자 기숙사는 무척 시끌벅적했다. 들뜬 여학생들이 곱게 치장하고 방을 나서느라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유디트는 대충 준비하고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그런 그녀를 한나가 기겁하며 잡았다.

“유디트, 너 설마 그렇게 입고 파티에 참석할 건 아니겠지?”

유디트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깔끔하고 무난한 차림이었다.

이 정도면 다른 이들에게 별로 흠 잡힐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한나는 왜 이렇게 기겁을 하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평범한데, 왜?”

“그래! 그게 문제야. 모처럼의 파티인데 대체 왜 평범하게 입는 거냐구.”

그렇게 말한 한나는 유디트를 순식간에 방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자신과 그녀의 옷장을 열어젖히며 비장하게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의상이랑 머리만 좀 가다듬으면 될 거야.”

어서 자신에게 몸을 맡기라며 한나가 손을 까딱이는 모습을, 유디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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